레이블이 마이아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마이아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출석부

출석부에 또 하나/ 붉을 줄을 긋는다.

수업료를 안 가져 온다고 꾸중당한 아이./ 교무실에 불려와 울던 아이.

한 달 전부터 소식이 없더니/ 오늘 아침엔 편지가 왔다.

“서울에는 피를 빼어가며/ 고학하는 학생이 많다는데,/ 피를 사줄 사람도 없으니……” 하고,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출석부에 또 하나 붉은 줄을 긋는다.

7번/ 9번/ 12번/ 26번…

달마다 늘어가는 붉은 줄/ 어쩌자고 붉은 줄은 늘어만 가는 것이냐?/ 갈수록 삶은 고달픈 것이냐?

지난 체육 대회 날/ 거리에서 나를 만나 얼굴 돌리고/ 땅을 보며 걸어가던 아이

함께 다니던 동무들을 피해/ 뒷골목을 들어가던 아이/ 그 아이는 9번이었다.

수업료를 장만하기 위해 자주 결석하고,/ 일요일이면 수리공사장에 나가/ 짐을 진다던 아이는 32번이었다.

찬바람 불어오는 어느 아침/ 흙덩이를 져 나르다가 엎어져 가슴을 다치고/ 병원에 갔다 하더니/ 기어코 퇴학하고 말았다.

명년 가을에는 군대에 간 형님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형편이 풀릴 것이니/ 한 해만 휴학해 달라던 아이는/ 그 한 해가 다 가도 다시 오지 않고

이제 먼 산에 바람이 얼어붙고/ 들마다 마을마다 눈이 내려 쌓이는데,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는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지게를 지고 산을 넘고 있을까?

오늘 아침엔 따스한 죽이라도 배불리 먹었을까?

붉은 줄이 자꾸 늘어가는 출석부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우런 얼굴, 때 묻은 손발, 힘없는 걸음걸이…/ 똑같은 모습들이

둘이요, 셋이요, 넷, 열, 스물, 백, 천, 만…

아아, 수없이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이제 시업(첫 수업시간)종이 치는데, 종소리가 울려오는데,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가면/ 나는 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1955.11.23. 경북 군북중학교 국어교사)


―故 이오덕(1925~2003) 선생의 「출석부」

2024년 12월 29일 일요일

이태석 신부의 묵상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수단의 오지 마을 톤즈에서 헌신하다 숨진 故 이태석(세례자 요한) 신부가 1980년 고3 시절 대입학력고사를 본 뒤 작사 작곡한 성가 ‘묵상’ 중 일부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사난살주 (live, alive and life)

다큐공연 「사난살주」를 관람하고 있다. 극의 제목 ‘사난살주’는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라고 했다.

1부의 타이틀(국가는 우리에게)이 ‘억장’이다. 3m짜리 장(丈, 10척)이 1억개나 쌓인 높다란 억장지성(億丈之城, 30만㎞)이 무너지는 슬픔과 아픔이라니… 참척의 비통을 겪은/겪고 있는 남겨진 사람에게는 그냥 죽지 못해 산다, 마지못해 행한다로 다가올 법하다.

객석 곳곳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연극도 아니고 안연극도 아닌 이상한 것이 보는이의 가슴을 후빈다. 4·3의 따님, 5·18의 동생, 4·16의 아버지, 10·29의 어머니와 그 이웃들이 이렇듯 지성(至誠)을 드리니, 너그러이 받으사 이제 고만 감천(感天)하시고 정의를 세워 눈물을 닦아 주시면 좋으련만…

--------------------------------------------------------------------
국가적 참사의 아픔 보듬은 연극 「사난살주」
아픔 딛고 무대 오른 유족,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한 이웃

제주 4·3과 광주 5·18, 4·16 세월호와 10·29 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다룬 다큐멘터리 연극 「사난살주(live, alive and life)」가 28일(월)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막을 올렸다.
극의 제목 ‘사난살주’는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1부 억장(億丈)은 김은숙 배우가 4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극을 인도해 나갔다.
제주 4·3은 현애란 배우가 고영일·강순옥(부모) 희생자의 애달픈 이야기를,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김호준 배우가 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형) 희생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야기는 단원고 2학년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氏가, 10·29 이태원 참사 이야기는 문효균氏의 어머니 이기자氏를 대신하여 성가소비녀회 조진선(안나) 수녀가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들려주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하는 유족들의 울음 섞인 하소연에 객석에서는 흐느낌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박수가 쏟아졌다.

<>29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제주4·3, 광주5·18, 4·16세월호, 10·29이태원 참사를 다룬 연극 「사난살주」가 상연되었다. 왼쪽부터 김호준 배우, 문종택 아버지, 김은숙 배우, 조진선 수녀, 현애란 배우

2부 감천(感天)은 하늘을 감동시켜 이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게 만들고픈 소망을 담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연극을 기획하고 연출한 방은미(요한네스)氏는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신 기도가 이 연극을 만들게 했다”면서 “연극을 통해 바치는 기도가 학살과 참사로 별이 되신 분들과 그 가족분들께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공연 후에는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 첫 구조요청 시간인 오후 6시 34분에 맞춰 묵주기도가 이어졌고, 7시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관하는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이날 미사 중에는 참사 희생자 159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29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사난살주」 공연이 끝난후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수녀, 배우, 유족, 청중이 연대의 마음으로 사진 촬영하고 있다.

2024년 8월 21일 수요일

울분으로 관람한 「1923 간토대학살」

오후에 「1923 간토대학살」을 울분과 애상으로 관람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폭동을 일으켰다, 방화하였다, 강간하였다 등등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군경과 자경단 등이 조선인 6,661명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100년 전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본 정관계 인사들은 진정성 있는 추도 의사가 전혀 없다.

늘 그렇듯 폐륜범죄에 이은 은폐조작… 식민지배의 가해자인 일본인들은 스스로 가해를 긍정하기 위해 피해자인 척한 지 오래다. 이들은 피해자로서의 우위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그 보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허황된 욕구는 일본 내 역사 수정주의자들 사이에 공유되며 언동에 기세를 올리고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잊히고 지워진다.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다짐하기 위해서다. 학살 희생자들이 묻혔던 도쿄 아라카와 강변의 넋전사위가 영령들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영화 막바지에 몇몇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추모사업단 함인숙 대표님, AOK 정연진 대표님, 참으로 좋은 일 하셨다.

2024년 4월 8일 월요일

이웃과 함께하는 9일 기도 첫째날: 완고함

🎗의정부교구가 △완고함 △나아감 △위로함 △재촉함 △함께함 △살펴봄 △다짐함 △행동함 △기억함을 지향으로 오늘부터 참사 10주기를 맞은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는 九日祈禱를 바친다. 
기도지향이 첫날(완고함)만 형용사고, 둘째날부터는 동사로 구성돼 있다. 공동체에 행동을 촉구하고 스스로도 실행·실천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것과 같게 된다. 혹여나 숫자 ‘9’가 들어간다며 딴지 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9원 소명은 십자가 죽음이었다(가톨릭성가 123).

#잊지않을게 #기억할게 #함께할게 #9일기도

🎗“그들 안에서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에페소서 4:18


🎗“자국민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사회 안에 일류 계층과 이류 계층, 곧 존엄성과 권리를 더 가진 이들과 덜 가진 이들이라는 범주를 세웁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이를 위한 자리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3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99항: 보편적 사랑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 


2024년 4월 7일 일요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2014년 참사에서 살아나온 사람, 참사에 숨져간 사람의 혈육, 참사가 일어난 해에 태어난 사람이 각자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들려주었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의 언니와 이태원참사 희생자의 누나는 본격적인 북콘서트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감정이 북받쳐 한바탕 눈물부터 쏟아내더라.

그치지 않는 사회적 재난을 겪어내고 있는 동시대의 시민으로서 어른들의 태도 변화를 또박또박 요청하는 2014년생 초등 아이에게 참 부끄럽고 미안했다. 생존자와 유족이 피해자 혐오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힘을 모아주어야겠다. 언젠가 밝혀질 진실의 그날을 위해, 비극적인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각자가 처한 형편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며, 기록하고 충실히 살아내자.🎗

#잊지않을게 #기억할게 #함께할게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북콘서트 열어
세월호참사에서 이태원참사까지 10년간 마음속에 품어온 이야기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79

----------------------------------------------------------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재난 피해자의 삶과 시간 그리고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는 6일 오후 4시16분, 서울시민청 지하 2층 바스락홀에서 북콘서트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주제 도서는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지난 10년을 톺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기약하며 펴낸 세월호참사 10주기 공식 기록집 2종 중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이다.

북콘서트 1부 ‘단원고 생존자와 2014년생의 이야기’에서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의 배경내 작가의 사회로 김도연氏와 백송시원 어린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김도연氏는 2014년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 3반 생존자이고, 백송시원 어린이는 지난해 연행된 연극 「2014년생」에서 주연 배우를 맡아 활동한 초등학생이다.

도연氏는 최소한의 배경지식 없이 무례한 질문을 남발하던 기자들의 행태를 떠올리며 ‘피해자 감수성’을 들려주었다. 백송시원 학생은 “어린이는 자리가 없는 관객 같다”면서 “어른들이 차별이나 편견 없이 어린이와 약한 사람, 작은 동물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진 2부 ‘세월호 형제자매와 이태원 형제자매의 이야기’에서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의 이호연 작가가 사회를 맡아 8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참사의 유가족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대담에 나선 남서현氏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3반 남지현 학생의 언니이고, 김혜인氏는 2022년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김의현氏의 누나다.

서현氏는 “특별법에 대한 유언비어가 난무한 상황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소위 ‘피해자다움’을 보여주려 애썼던 면도 있었는데, 이태원 형제자매는 스스로 ‘피해자 프레임’을 벗어나 대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혜인氏는 “투쟁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무턱대고 올라오는 북받치는 감정을 지금도 주체할 수 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관련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지면 무얼 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마땅한 답변을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에 대한 고민도 해나가겠다고”고 소감을 전했다.

배경내 작가는 “참사의 본질은 참사 이후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진단하며 “참사의 복잡성과 사람들의 다면성을 책으로 엮어내는 일에 함께할 수 있어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호경 작가는 “재난참사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게 됐다”면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마음,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전했다.

6일 4시16분 서울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 2014년생 어린이가 함께하는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북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북콘서트는 편안한 환경에서 참여하고 소통하기 위해 개인적인 녹음과 촬영 등이 제한됐다.

한편,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펴낸 또다른 공식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의 북콘서트는 전날인 5일 저녁 7시, 마포구 동교동 다리소극장에서 열렸다.

세월호운동 10년에 대한 백서인 「520번의 금요일」은 피해자 가족 62명을 비롯해 총 117명의 인터뷰를 12개 키워드로 구성했다.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돌아보는 책자로는 「520번의 금요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외에도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월간 십육일」이 있다.


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제가 떠나겠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나라가 이 지경입니다. 하 수선하고 시끄러운 소리만 자꾸 들려오는데, 이 나라 백성으로 어찌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모른 척 지낼 수 있겠습니까?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선 얼마든 신부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허나, 국가와 애국심에 관한 문제라면 신부님은 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집이 아닙니다. 숙명입니다. 이 산하에 사는 자의 운명입니다.
신부님, 제 정치적 언사가 신부님의 성무에 어떤 방해를 끼친답니까? … 죄송합니다. 신부님께 염려를, 신부님 성무에 방해를 드려서요. 하지만 저는 분명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그것을 눈감고 귀 닫고 모른 척 지낼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신부님.

3년 전 안도마는 그렇게 부모와 두 형제를 데리고 떠났다. 그 이후 거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 음악극 「안중근의 고백」, 국립극장 달오름, 2023.10.6(금) PM 7:30


2024년 2월 22일 목요일

단심(丹心)의 슬픔

단재 신채호 순국 88주기를 맞아 낭성귀래 묘소에서 참배하고 옛일을 생각했다.

추모식장 단재 영정 우편의 용산발 화환이 강점의 그날처럼 부끄러웠다.

△我와 非我의 투쟁 사관 △묘청의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상고사 연구 △낭가사상 △조선혁명선언 기초로 상징되는 쓸쓸한 아나키스트의 한 조각 붉은 삶(丹生)에 나는 겨울비처럼 서러워졌다.

짧지만 강렬했던 박자혜와의 보랏빛 신혼은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님은 역사를 이어 잇겠다 했건만 우리는 여직 바다를, 반도를 잇지 못하고 있으니…

2023년 12월 28일 목요일

Bloody child's shoes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Feast of the Holy Innocents, martyrs)이다.

테헤란의 하프테티르 광장(Haft-e Tir Square)에 늘어진, 가자에서 숨진 죄 없는 아이들의 사진과 신발이 애처롭다. 12월 말 기준으로 가자지구에서 최소 2만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5만2천명이 부상당하고 7천명가량이 실종됐다. 죽은 사람의 70%는 어린이와 여성이다. 권좌를 놓지 않으려는 헤로데의 망령은 2천년을 넘어 지구 행성을 배회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한 줌 정의를 으스대며 그것을 구실로 온갖 불의를 행한다. 세계가 불의의 수렁에 빠져 죽게 된다. 사실 저들이 “난 정의롭다”고 말할 때, “나는 복수심에 차 있다”는 말로 들린다. -니체



2023년 11월 11일 토요일

사비의 눈물

부소산 낙화암 아래 고란초(皐蘭草)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틈에서 스며 나오는 고란정(皐蘭井) 약수물을 2잔 마셨다. 이로써 6년이 젊어진 셈인가.
고란사(皐蘭寺) 법당 뒤편 벽면에는 700년 백제의 마지막날이 그려져 있다. 그림멍…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오른편 소정방 침략군은 병장기를 번뜩이며 노도와 같이 쳐들어온다. 가운데 사비도성은 화염에 휩싸여 있다. 왼편 바위 위에는 애달픈 비빈 궁녀들이 서로 부둥켜안아 울면서 치마를 뒤집어 얼굴을 가리고 차디찬 백마강에 몸을 던지고 있다. 일연은 성이 함락되던 날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삶을 놓았다며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적었다.

660년 7월 12일… 남부여는 평제(平)당했다. 약탈자는 당군(굴기국)이자, 벨기에 레오파드2세이고, 일본제국, 아라사, 이스라엘, 천조국이다. 눌린 이는 백제이자, 손목 잃은 콩고인이고, 조선 민초,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여윈 한반도와 다름아니다.

♬반월성 넘어 사자수 보니, 바람은 나불나불 물빛은 칠백 년.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홍(三千紅) 간 곳 어데냐. 옛 꿈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엔 물새만 운다. ♪


2023년 10월 30일 월요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10.29이태원참사 1주기 추모미사 현장에 가지 못하고 유튜브 중계로 참례한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누구더냐. 너를 이토록 만든 자!
모든 것에 대해 중립을 Yuji하는 것은 실제로 악한 경향을 조장한다.

돌아간 이를 부르는 초혼招魂의 밤에…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주님, 연령을 구원하소서~
성 스테파노, 연령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Seoul Halloween crush: One year on

ITAEWON CROWD CRUSH: A LOOK BACK

First anniversary of South Korea's deadly Halloween crush approaches



2023년 8월 13일 일요일

제국의 비애

지난주에는 하계 창의체험 활동으로 대한제국의 흔적을 쫓아보았다. 경운궁은 월산대군의 사저로 시작하여, 환도한 선조의 시어소(정릉동행궁), 인목왕후의 유폐지(서궁), 인조의 즉위지(즉조당)를 거쳐 고종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선포하면서 제국의 정궁이 되었던 곳이다.

인화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중화문을 바라보며…

단청 없는 2층집 석어당의 소박함과 다양한 동식물 문양으로 꾸며 놓은 정관헌의 이국적 풍광 사이로 야영지에 있어야 할 외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지나다녔다. 덕홍전, 정관헌, 석조전의 오얏꽃문양을 확인하면서 조동탁의 「봉황수」 시구를 떠올리는데 망국의 설움이 전이되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광장 건너 Westin Josun호텔의 정원 조경물쯤으로 전락한 환구단 터를 걷다 보니 목은 선생이 부벽루에 올라 돌계단에 기대어 휘파람 불던 심정을 헤아릴 것도 같다.

1946년 석조전에서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와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되새겨보았다.

이러매도 중립외교, 국권침탈, 자주독립 주제어 학습에 열중했다. 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와 일제의 의도적인 훼철로 뭔가 많이 허전하고 텅 빈 느낌이 든다. 태풍 카눈이 몰고 온 장대비 속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을 실천한 고령의 어머님들이 참 고맙다. 이번주 창체수업엔 명동성당과 명동일대를 답사한다. 

광무황제는 1899년 환구단의 북쪽에 3층 팔각정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였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그대 너무 서러워마요

어제 이 시간 명동성당 꼬스트홀… 홀로아리랑(35플러스 합창단), 그날이 오면(한선희), 늙은 군인의 노래(박준), 한 입의 아우성으로(꽃다지),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 광야에서를 따라 불렀다. 이 뜨거운 노래들을 이렇게나 한꺼번에 불러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장을 지낸 기춘氏는 1985년에 광주학살 비디오테이프를 서울시내에서는 처음으로 이곳 문화관(현 꼬스트홀)에서 상영하여 신자·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참여를 불러왔다고 회상했다. 가민연 옛친구 순이누나의 추모편지에 울컥, 눈물을 훔쳤다.

미친 세상, 모진 바람 안고 그대는 다시 못 올 곳으로 푸른 계절에 떠났지. 조찬배 아버님의 바람대로 그의 쇠붙이, 그의 학생증, 그의 사진첩을 온전히 회수해 소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상식 신부(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말처럼 지금 잠들어있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깨달음의 불을 지를 수 있기를… 야만으로 뒷걸음치는 안녕하지 못한 시대. 부끄럽지 않도록 추하지 않게 잘 늙어가자… 

가톨릭평화공동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한 통일열사 故조성만(요셉) 35주기 추모공연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콘서트」

1988년 5월15일, 통일열사 故조성만(요셉) 형제가 투신 산화한 명동성당 교육관은 기억하고 있다. 그대 너무 서러워 마요.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지난해와 같이 이번 오월에도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에서 준비한 광주순례에 함께했다. 이 청년조직은 다수의 2030과는 달리 ‘민족’을 얘기한다.
순례단은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금남로와 광산동 옛 전남도청사를 차례로 돌아보면서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들풀의 생명력을 쓰다듬으며 먼저 울고 간 영혼들을 어루만졌다. 무명지 자른 안중근의 수결(手決)이 새겨진 흰 셔츠가 이리도 벅차던가.
「님을 위한 행진곡」에는 내 이름이 있다. 당신 이름도 있다. 산 자…



「택시운전사」의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2016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모발과 손톱 등 유해의 일부는 “광주에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항아리에 담겨 그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5.18 구묘역 입구에 안치됐다.



2023년 5월 17일 수요일

그 푸른 계절에 떠났지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의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원 한 사람이 교육관 옥상에 올랐다. 김제 출신의 서울대생 조성만(요셉)이었다. 전주 해성고 시절 중앙성당에서 문정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영원한 우방인 줄만 알았던 미국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후에 있었다는 견해가 대두하던 무렵, 대학 언더서클에서 만난 김세진의 분신 죽음을 목도한 24살 청년은 조국의 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은 예수승천대축일을 기해 유가협·민가협의 양심수 석방운동과 본당 청년들의 마구달리기 발대식 등으로 떠들썩했다. 오후 3시30분, 조성만은 준비한 자필유서를 뿌리고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자신의 배를 찌른 후 긴 그림자를 남기며 12m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저녁 7시20분경 세상을 떠났다.

일요일엔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참배한 후 어제는 35주기 추모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왔다. 관할 주교나 본당 신부의 재가가 있었기에 미사가 봉헌되는 것이렷다. 하지만 명동성당 역사관에 조성만 요셉 형제의 이름은 없다. 2018년 교황청이 국제순례지로 승인했다는 천주교 서울순례길은 물론이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소문순례길, 중구에서 운영하는 명동역사문화투어에서도 해설사는 조성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명동 일대 답사를 진행하게 되면 내가 얘기해보련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

1988년 조성만(요셉) 형제의 장례미사는 명동성당에서 봉헌되지 못했다. 가톨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 대해 공식적인 추모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죽음은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사람이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의견이다.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시대의 새벽길 걷다가

금요일 저녁(4월21일) … 길 위의 화음 종합예술단 ‘봄날’의 첫 번째 정기공연을 관람하러 소월아트홀 가는 길… 우선 왕십리역 11번 출구로 나갔다. 김종분 어머니는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다. “귀정이가 늦게 과외 마치고 택시를 타고 와서는 ‘엄마, 엄마’ 부르며 차비를 달라고 했어. 내가 택시비 내주면서 ‘엄마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무턱대고 왔어.’ 물으면 ‘엄마는 항상 여기에 있잖아. 엄마는 결근을 안 하니까’라고 했어.”

그 어머니(1938)는 57년 노점 만렙으로 이곳 행당동에서만 32년째 한 자리에서 길거리 점포를 꾸려오고 있다. 둘째딸 귀정이는 1991년 5월 당시 노태우정권의 신공안정책에 반대하는 범국민대회(3차)에 나섰다가 충무로역 진양상가 부근에서 26세 젊은 나이로 서러운 이별을 치렀다.

옥수수를 싸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 귀정이 찾아 예까지 왔다’며 그냥 주시더라. 이거 참…

젖은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와 눈물 같은 소원들을 흩어버린다. 전태일 삼촌,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김용균 형제, 김귀정 누이, 세월호 이태원… 너무 아픈 사랑과 청춘이 너무 빨리 차가운 죽음과 대면했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본다고 했던가. #봄날 15人의 햇살은 시대의 새벽길을 걷다가 떠나간 사연들을 잘 표현해주었다. 응원 갔다가 눈물 훔치고 왔다. 추억은 섧게 적힌다.

비정규직, 산업재해, 부당해고, 갑질, 성차별, 성폭력에 맞서 싸우는 거리의 외침에 노래를 더하고 마음을 보태려 나선 사람들… 종합예술단 봄날 제1회 정기공연(2023.4.21. PM7:30. 소월아트홀)


2023년 3월 26일 일요일

천지가 전율한 안중근 의거

1910년 일본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1871~1911)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엽서에 하얼빈 의거를 기리는 4언체 한시를 썼다.

舍生取義(사생취의)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며
殺身成仁(살신성인)  몸을 죽여 인을 이루네.
安君一擧(안군일거)  안 군의 의거 한 번에
天地皆振(천지개진)  천지가 다 진동하네.

           -秋水 題(추수 제)  슈스이 지음.


「혁명전설(革命伝説)」 제3권(1970) 156쪽에 수록돼 있다.

義士시여, 이 나라를 보소서~

JUNG-KEUN AN
The Korean Martyr who killed Prince Ito at Harbin. As seen in this picture, 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t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us.
The characters of the upper corners of the picture is facsimile of the Poem written by D. KOTOKU, a proni-Lent Japanese Anarchist, praising the brave conduct of the marty.

神崎 清. 大逆事件の人びと 革命伝説3 ― この 闇黑裁判. 카미자키 키요시. 대역사건의 사람들 혁명전설3 ― 이 어둠의 재판. (사진=김창덕)


2023년 2월 20일 월요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어떤 분이 톡방에 등재한 춤비평가 이만주(1949~ ) 님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2022)를 공유한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를 뒤집어놓은 현실 직시의 제목을 아프게 기록하고 냉철히 기억한다. 역시나 깨끗하고도 변치 않는 것은 水 石 松 竹 月 뿐이런가.

――――
독립의 투사라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지도자들이 조국이 독립한 후 집권자가 되어서는 과거 종주국의 총독이나 관리들보다도 더 강권정치를 한다.
민주화의 투사라는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했다는 리더들이 민주화가 된 후 집권해서는 과거 독재자나 수하들보다 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웠다는 사람들이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던 이들이 사회주의 정권의 집권자나 관리가 되면 인민과 평등은 아랑곳없이 제 배, 제 곳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 모두가 과거의 명분은 구호였을 뿐 집권자가 되면 임금으로 착각하고, 행세하며 전제왕정의 군주들보다 더 권력에 취한다.
그들 모두가 권력을 잡으면 지저분해져 물불 안 가리는 축재를 한다. 특히, 사회주의 리더와 관리들의 축재와 부정부패에는 넌덜머리가 난다.
독립, 민주화, 사회주의 다 구호였을 뿐이다. 지나고 보니 그들 모두가 집권욕, 권력욕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마약쟁이들이었을 뿐이다.

젊어서부터 탄압받고 29년간, 옥에 갇혔던 이력으로 조금만 술수를 썼더라면 종신집권 할 수 있었는데도 한 번만 집권하고 사랑을 찾아 나선 만델라가 한없이 우러러진다.

―이만주(2022). 「괴물의 초상」. 현대시학.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 중3 국어시간에는 하근찬의 전후 단편 「수난이대」를 공부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왼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6·25전쟁 중 수류탄 쪼가리에 맞아 한쪽 다리가 절단된 아들 박진수 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나간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두 사람이 건너가야만 하는 외나무다리는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 외팔이 아버지 만도가 외다리 삼대독자 진수를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은 자신들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극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진수: (독백)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만도: (독백)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진수: 아부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노니 첫째 걸어 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만도: 야야,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걸어 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아버지와 아들의 2대에 걸친 전쟁을 수난으로 연결시키며 개인적 차원의 고난 극복이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연물(용머리재)의 시선이 탁월하게 묘사돼 있다. 우리에게 당면한 ‘외나무다리 건너기’는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남북적대를 극복하는 것이다. 문득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 「파친코(Pachinko)」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놨지만(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