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 월요일

운악산 봉선사 편답

어제는 申時(오후3시~5시) 경에 진접 광릉숲 자락의 봉선사에 다녀왔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기슭에 운악사로 창건하였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광릉 원찰로 삼아 초창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이름을 받게 됐다.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던 명종 6년(1551)에 보우대사는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만들었다. 6·25전쟁 중에 삼성각 정도를 제외한 16개동 150간의 가람이 전소되었고, 이후 60년 넘게 복원과 신축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과 갑찰로 불리는만큼 일주문의 다포가 화려하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봉선사를 초창할 때 절 입구에 심은 한 그루 느티나무가 아직 건재하다. 수고 21m, 나무둘레 5m, 수령은 550년에 이른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幢)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봉선사 당간지주는 예종 1년(1469)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1551)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僧科旗)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의 대석을 깎아내어 양쪽 기둥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 드문 형태이다. 기둥높이 148㎝, 기둥너비 34㎝, 기둥사이 40㎝, 전체너비 108㎝, 두께 100㎝로 웅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범종루 2층에는 아침과 저녁 예불 때 치는 4가지 불구(佛具),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걸려 있다. 그런데 진짜 눈여겨봐야 할 것은 1층의 동종이다.


봉선사동종(奉先寺銅鐘)은 예종 원년(1469)에 선왕인 세조대왕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총 높이 229.4㎝, 입지름 156㎝의 대형 청동범종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돼있다.
종의 고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역방향으로 향하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형성하였으며, 중심 정상부에는 용의 발톱으로 여의보주를 소중히 받든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는 상부로부터 연판, 연곽, 보살상, 범자, 하대장식이 배치되었으며, 상대와 당좌는 생략되었다. 천판은 반구형으로 조형되었으며, 주연(周緣)에는 넓은 단엽복판연화문(單葉複瓣蓮花紋)을 돌려 장식하였다. 그 밑에는 2조의 융기된 선각(線刻)을 돌려서 종신(鍾身)과 구분을 이루었다. 종신 중복(中腹)에는 융기된 3조의 횡대를 돌려 몸체를 상하로 구분하였다. 사방의 연곽대에는 섬세한 당초문이 장식되었고, 그 안에는 반구형으로 돌출된 8엽화문이 모두 9개씩 정열된 모습이다. 보살상은 얕은 선각부조로 조형되었는데 상호, 의습, 영락 등의 묘사가 매우 섬려하다. 하대에는 나선형의 거친 파도문이 정려하게 장식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은 15세기 후반에 왕실의 발원으로 관장(官匠)에 의하여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용뉴 조각이나 각부 장식의 조형 상태가 우수하고 종신의 연곽과 보살상, 하대문양 등 부분적으로 한국종의 문양요소가 반영된 조선전기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큰법당’은 1970년 운허(1892~1980) 스님이 옛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데,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이다.
보물 제1792호인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毘盧遮那三身掛佛圖)가 큰법당 안 괘불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괘불도의 아래쪽 화기를 통해 제작연도, 시주자, 화사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영조 11년(1735)에 봉안되었고, 시주자는 상궁 이성애로 정조의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고, 화사는 임응 스님을 팀장으로 학총 등 4명의 도화서 화원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원래는 봉선사를 초창하여 개산(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선사와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당우(堂宇)인 개건당(開建堂)이었다. 1977년 월운 주지가 그 오른편에 새로 개건당을 지어 개산(開山)과 중건(重建)의 공덕주들을 모시고, 원래의 개건당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 등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1926년 월초화상이 독성각(獨聖閣), 북두각(北斗閣), 산령각(山靈閣)으로 건립하였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한다.


광복 후 몰아친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가 이곳 봉선사 요사채(寮舍) 어딘가에서 1년 간 은둔하였다고 한다. 삼성각 왼편은 가장 고즈넉해 보이는 공간이어서 담아봤다. 수많은 작은 돌탑이 기와마다 3층 이상으로 올려져 있다.


봉선사 경내 주차장 연못에 서식하는 붉은귀거북… 원래 미시시피 강변에 살아야 할 외래종 별주부가 상대적으로 싼 가격 때문에 애완용으로 많이 수입되었고, 사찰의 방생(放生)법회 등을 통해 퍼져 나가 고유종 남생이를 밀어내고 우리 생태계에 적응한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불살생계라는 선한 의도가 생태계 교란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다.

2018년 5월 25일 금요일

왕실묘역길 역사문화트레킹

5월 22일 음력 사월초파일, 불기 2562년 맞이 트레킹은 도봉산 둘레길 일부 구간이다. 2년 전부턴가 석탄일(석탄절, 석가탄신일) 대신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용어를 공식 명칭으로 내거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문법상으로는 맞지 않은 표현이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기는 싯타르타의 탄생이 아닌 열반을 기준으로 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 1일 개관한 국립공원산악박물관은 1940년대부터의 산악 관련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산수(山의 전신), 사람과 산, 마운틴 등 국내 3대 산악잡지의 창간호를 비롯한 다양한 산악서적들도 전시하고 있다.

산악박물관 오른편엔 조계종 광륜사(光輪寺)가 있다. 일본 국보 1호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장하고 있다는 교토 소재 광륭사(廣隆寺·고류지)와 사찰명이 얼핏 비슷하여 혼동이 오기도 했다. 조대비 신정왕후(1808~1890)가 도봉산 입구에 만장사(萬丈寺)를 새로 짓고 별장 삼아 만년을 보냈는데, 흥선대원군도 휴식처로 찾았다고 한다. 2002년에 지금처럼 광륜사로 개칭되었다.


1969년 김수영 1주기를 맞아 현대문학사가 주축이 되어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 시인의 무덤 앞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모친이 별세한 후 1991년에 도봉서원 앞쪽으로 시비를 옮기고 시인의 유해를 화장하여 담은 유골함을 시비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수영 시비가 곧 김수영의 무덤인 셈이다. 장방형의 시비에 예서체의 金洙暎 詩碑 글자 아래로 대표작 ‘풀’의 몇 구절이 김수영의 육필로 음각돼 있다.


영국사(寧國寺)는 고려 광종 때 3대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지목될 정도로 큰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15세기 초에 다시 세웠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한때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번성하는 듯했으나 성종대 이후 쇠퇴하면서 16세기 중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발굴 때 일부 탁본으로만 전해져 오던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道峯山寧國寺慧炬國師碑)의 오른쪽 상단 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 길이 62㎝, 폭 52㎝, 두께 20㎝의 비편에 새겨진 281자와 문헌의 기록으로 혜거국사를 전후한 선종구산 사자산문(獅子山門) 초기 5대 선사의 계보(도윤-절중-신정-혜거-영준)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금강령(金剛鈴)과 금강저(金剛杵)는 불교의 의식을 위해 사용된 의식구(儀式具)이다. 금강령은 손으로 흔들어 소리를 내는 요령(鐃鈴)의 일종으로 의식 때에 소리를 내어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금강저는 마음 속 번뇌를 없애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도봉서원터에서 출토된 금강령·금강저 세트는 손잡이 끝부분에 갈고리와 같은 고(鈷)가 각각 5개인 오고령(五鈷鈴)과 오고저(五鈷杵)이다. 금강령의 방울 부분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윗단의 5면에는 오대명왕을, 아랫단의 5면에는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을 나타내었으며, 고 부분에는 사리(舍利)를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 등이 섬세하게 표현된 물고기 모양의 탁설(鐸舌)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리공과 함께 11구의 존상이 모두 표현된 금강령은 우리나라에서 도봉서원터 출토 금강령이 유일하며, 고려시대에서도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을사사화를 무효화하는 을사삭훈으로 정국을 주도한 사림은 선조 6년(1573), 터만 남은 영국사 자리에 조광조를 배향하는 도봉서원을 건립한다. 숙종 연간에는 정치 엘리트인 노론이 기사환국으로 피화된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병향한다. 영조의 서원훼철에도 무난했던 도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원되었다.


세종의 9남인 영해군(1435~1477)의 묘를 만들면서 생긴 무수동(無愁洞)은 수철동(水鐵洞)에서 이름이 바뀐 지역인데, 지금은 무수골이라고 부른다. 무수천변에 조성된 무수골 주말농장은 생태체험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은 쌍분으로 정면 왼편이 정의공주의 묘다. 정의공주(1415~1477)는 문종의 동생이자 세조의 누나로 세종의 차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하였다는 기록이 공주의 시가인 <죽산안씨대동보>에 전하고 있다. ‘양효’는 공주의 남편인 안맹담(1414~1462)의 사후 내려진 시호다.



군왕의 무덤이지만 릉(陵)이라 불리지 못하는 연산군묘(사적 제362호)… 세종이 상왕인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한 의정궁주 조씨(?~1454)의 묘에 객식구 넷이 들어왔다. 중종반정 이후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묻힌 연산군과 배위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위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이 아래쪽에 자리하여 500년 넘게 세를 살고 있다.



연산군묘 남쪽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최대 수령 830년으로 추정되는 방학동 은행나무(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데,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불이 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고. 인근 원당마을에 모여살던 파평윤씨 일가가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원당샘은 ‘피앙우물’이라고도 불리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김수영의 선영과 본가, 집필실이 도봉동에 있었던 인연을 기려 2013년에 건립된 김수영문학관… 방학동 498-31에 자리한 문학관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풀>은 ‘울다’와 ‘웃다’, ‘눕다’와 ‘일어나다’의 대립, 과거시제와 현재시제의 대립을 통해 결점 많고 나약하지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시련을 견뎌 내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2018년 5월 24일 목요일

에버트 인권상 수상

1925년에 설립된 독일의 비영리 공익·정치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riedrich Ebert Stiftung)은 1994년부터 매년 인권 증진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상을 수여해 왔다. 지난해에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국민’이 수상한 첫번째 사례라고 했다. 2017년 12월 5일 베를린에서 세월호 생존자인 스무살 장애진 씨가 시민대표로 참석해 수상한 바 있다.
“촛불시민들은 에버트 인권상 받으러 오시라”는 SNS 메세지와 신문 기사를 지난 주부터 마음에 두었다. 2차 배부일이어서 오후에 잠깐 짬을 내어 종각역 6번출구로 나갔다. 서울 글로벌센터 앞에서 줄을 서고 상장을 받고 기념촬영도 했다. 뿌듯하다. 총23번의 집회 중 13차례 촛불을 들었으니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합당하지 않을까.


상장을 챙겨 걷다가 종각역 5번출구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동상을 마주쳤다. 이곳은 1894년 12월 5일 공주 우금치 학살 이후 체포되어 고신(拷訊)당하고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이 순국한 서린방 전옥서 자리다.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촛불혁명은 동학운동에 닿아 있다. 녹두장군도 조금은 자랑스레 생각하실 게다.


인구의 3.5%가 꾸준하게 비폭력 평화시위를 이어간다면 어떠한 정권도 무너진다는 에리카 체노웨스 교수의 3.5% 법칙은 다시한번 입증되었다. 워싱턴포스트는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한국이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줬다)”며 찬사한 바 있다. 촛불혁명은 분명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한층 높여 주었다. 이제 국민소환, 국민발안제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증대하는 일에도 좀더 힘을 모아야한다는 생각이다. 엄청난 노력과 희생으로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을 붕괴시키고도 화장을 고쳐 등장한 또다른 권력자에게 지배의 자리를 내주고 자유를 억제당하는 일이 우리 역사에서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둔감함의 습관된 마비에서 벗어나 암울함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차이를 숙고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생활 속에서 꾸준히 유지해나가야 한다.


2018년 5월 21일 월요일

삼국통일과 후삼국통일에 비춘 21세기 한반도통일의 방향성

주제: 신라 삼국 통일과 고려 후삼국 통일을 비교하고, 21세기 한반도 통일의 방향성을 제시하시오.

<채점 기준>
① 신라 삼국통일의 한계점을 제시하였는가?
②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신라 삼국통일과 비교하고 발전적인 면을 제시하였는가?
③ 고려 후삼국 통일이 신라에 비해 발전적인 원인을 국제관계와 관련하여 제시하였는가?
④ 21세기 한반도 통일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는가?
⑤ 21세기 한반도 통일의 방향성을 역사적 근거를 들어 제시하였는가?


“신라 삼국통일과 고려 후삼국 통일을 비교하고, 21세기 한반도 통일의 방향성을 제시하시오.”

지역의 G고등학교 한국사 1학년 1학기 논술 수행평가 문제인데, 대학의 학점과정으로 진행해도 손색 없는 수준 높은 주제다.

2018년 5월 16일 수요일

반면교사 5·16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20분,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출신의 박정희 소장을 추종하는 일단의 병력이 한강 인도교를 건넜다. 34년 후인 1995년에 또다른 독재자 전두환에 대해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내린 불기소 처분의 선험적 사건이었다. 박정희 세력의 이른바 ‘구국’을 위한 거사는 사전에 이미 인지되고 있었으나 결국 3,6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헌정을 파괴하며 국가 장악에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는 3차례에 걸친 개헌(5차·6차·7차)과 심복·거수기관(국가재건최고회의·중앙정보부·통일주체국민회의 등)을 통해 영구적 유신왕국을 꿈꾸었으나 김재규의 38구경 리볼버에 맞아 흙먼지로 돌아갔다.
요 며칠 한홍구의 유신(한겨레출판/2014), 김상구의 5.16 청문회(책과나무/2017)를 읽고 있다. 반면교사(反面敎師),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2018년 5월 15일 화요일

함양기행 2

5월 12일(土)과 13일(日)… 벼락치기로 경남 함양에 다녀왔다. 지난 가을 추석 시즌 이후 2번째 함양 방문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8시 20분 버스로 출발했는데, 주말에다가 빗길이어서인지 70분이나 연착해 함양터미널에 도착했다.


우산을 받쳐쓰고 함양읍내로 걸어들어가 학사루를 방문했다. 함양 학사루는 함양객사의 부속건물로 정면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이다. 통일신라의 함양태수 최치원이 자주 올라 학사루(學士樓)라 불리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숙종 18년(1692)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함양객사 자리인 함양초등학교 안에 있었던 것을 1979년에 지금처럼 함양군청 앞쪽으로 옮겼다.
학사루는 무령군과 점필재의 악연으로도 유명하다. 유자광이 경상도관찰사 시절에 시를 지어 학사루 현판으로 걸어놓았는데, 나중에 함양현감으로 부임한 김종직이 철거하여 불살랐다. 이 일을 마음에 새겨놓은 유자광은 후에 무오사화를 시발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까지 당하게 된다.



선사부터 근대까지 지역의 유물과 기증품을 전시해 놓은 함양박물관을 찾았다. 삼국시대의 말머리 장식의 뿔잔(角杯)이 이채롭다. 하단의 짧은 다리가 잔이 넘어지지 않게 하는가 보다. 청동거울은 문양이 특이하여 사진에 박아보았다.


사적 제499호인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의 미니어처… 백운동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건립된 서원이자,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사액된 서원으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지리산함양시장 내 병곡식당… 원조 할머니의 고향집이 함양군 병곡면이어서 ‘병곡집’ 간판으로 시작한 것이 올해로 72년이 됐단다. 현재는 딸과 손자가 운영하고 있다. 진한 국물의 순대국밥, 내장국밥, 머리국밥이 7천원이다.


농약사에서 사온 100원, 500원 하는 오이, 호박, 여주, 수세미, 무, 상추, 고추, 옥수수, 울타리콩, 박하 등 몇가지 모종을 심었다. 종두득두(種豆得豆)라 했던가. 일요일 오전까지 비가 내린 터라 잡초 제거도 수월하고 일일농부의 일이 재밌다.


80년 전 스물일곱의 백석은 나타샤를 생각하고,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지. 옆집 외양간에서는 흰 당나귀 대신 검은 염소가 응앙응앙거렸다.


멋진 느티나무가 매력인 별관집은 손을 많이 보아야 한다. 대문 우편에 흔히 똥돼지 뒷간으로 불리는 통시가 있다. 통시는 대소변을 누는 곳과 돼지를 가두어 기르는 곳을 하나로 합쳐서 만든 공간이다.


백전면 상신마을의 함양성당 운산공소 전경… 요아킴 형제님 댁에서 줌으로 당겨 찍어보았다. 운산공소 뒤편의 갈색집은 마을이 배출한 신부님의 본가라고 한다.


귀경길에 잠깐 들러본 운정연수원은 오래된 나무들이 운동장을 둘러 늘어서있었다. 작은 규모의 캠핑에 좋을 듯하다.


운정연수원 지척에 천연기념물 제406호인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30m, 가슴높이둘레 9.5m의 노거수로 수령이 800년을 넘는다. 대략 고려 명종과 강종, 고종 연간까지 연원이 올라간다.

2018년 5월 7일 월요일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 기획전시

청계천박물관에서 구보 박태원(1910~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을 소재로 5월 4일부터 7월 1일까지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1936년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잡지 조광(朝光)에 연재된 川邊風景은 1930년대 경성 청계천변을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는 중산층과 하층민의 세태 만상을 70여 명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전시실 입구를 들어서면 소설의 제1절 ‘청계천 빨래터’를 나무로 구현한 오토마타(autumata)를 만나볼 수 있다. 고단한 여성들의 작업장인 빨래터는 소설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기미꼬와 하나꼬가 여급으로 일하는 평화카페도 재현해 놓았다. 가난한 하층민 여성들은 유사가족을 형성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는다.


천변의 소식통으로 통하는 재봉이가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는 이발소의 모습이 예스럽다. 눈치 빠른 재봉이는 천변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나름의 비공식적 정보를 획득해 나간다.


제23절 ‘장마 풍경’을 미디어아트 영상으로 재현한 물길은 7분에 한 번씩 전시장 안으로 흐르게끔 장치하였다.


박태원은 소설 속 여성과 10대 아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남성들에겐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포목점 주인 중산모는 마지막 제50절에서 바람에 날려 개천에 빠진다.


5일 3시에는 청계천박물관 3층 강당에서 2시간 동안 노승지 교수의 연계강의가 이어졌는데, 박태원과 이상을 비교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또한 합리적 교환이나 계산, 설계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천변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설계의 결과라기보다는 설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라는 강의 말미의 언급엔 수긍가는 면이 있다.


참고로 천변풍경 속 50개의 절을 기록해 둔다.

제1절 청계천 빨래터              제2절 이발소의 소년
제3절 시골서 온 아이             제4절 불행한 여인
제5절 경사                          제6절 몰락
제7절 민 주사의 우울             제8절 선거와 포목전 주인
제9절 다사多事한 민 주사       제10절 사월 파일
제11절 가엾은 사람들            제12절 소년의 애수
제13절 딱한 사람들               제14절 허실虛實
제15절 어느 날 아침              제16절 방황하는 처녀성
제17절 샘터 문답                  제18절 저녁에 찾아온 손님
제19절 어머니                      제20절 어느 날의 삽화
제21절 그들의 생활 설계         제22절 종말 없는 비극
제23절 장마 풍경                  제24절 창수의 금의환향
제25절 중산모                      제26절 불운한 파락호
제27절 여급 하나꼬                제28절 비 갠 날
제29절 행복                         제30절 꿈
제31절 희화戱畵                    제32절 오십 원
제33절 금순의 생활                제34절 그날의 감격
제35절 그들의 일요일             제36절 구락부의 소년 소녀
제37절 삼인三人                    제38절 다정한 아내
제39절 관철동집                    제40절 시집살이
제41절 젊은 녀석들                제42절 강 모의 사상
제43절 흉몽                         제44절 거리
제45절 민 주사의 감상            제46절 근화 식당
제47절 영이의 비애                제48절 평화
제49절 손 주사와 그의 딸        제50절 천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