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7월27일,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전쟁반대, 평화선언 대회에 선보인 극단 ‘경험과상상’의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 교차 편집으로 리얼리티를 더했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난다. 소녀들은 트럭에 배에 다시 트럭에 배에 실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동한다. 혼인을 앞둔 막둥이가 잠순이 언니도 못가본 시집을 자기가 간다고 미안하다고 혼자 펑펑 서럽게 울더라는 (꿈속) 엄니의 말…

지옥 같은 더딘 시간이 흐른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한다. 셋은 홋카이도에 있는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왔노라고 미리 말을 맞췄다. 소녀들은 밥을 얻어먹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온다. 잠순이는 집에 오는 길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엄니의 신신당부를 기억하여 도정면 산새리 구장님 땅콩밭 지나서 첫번째 집 앞까지 온다. 기쁨도 잠시, 잠순이는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바라만 보다가 더럽혀진 몸으로 차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멀리 가서 맘 편히 살자. 일본 남자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미국 남자 만나서 멀리 떠났다고 하자. 조선은 지긋지긋하다고, 엄니 아부지 보고 싶지도 않다고…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 낯선 말, 낯선 눈빛에 둘러싸여 서로 의지하며 웅크리고 살아간다. 경희가 죽고 언니도 따라 죽고, 혼자 남은 잠순이 할머니는 인자 부엌에서 도마질하는 엄니 뒷모습, 마당 한켠에서 작두질하던 아부지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흩어지고 사라진 세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할머니의 소원이다. 타이틀곡 「갈 수 없는 고향」(한돌 사·곡)의 제목과 노랫말에 공명하며 진도아리랑 한 구절을 읊조린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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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광화문서 「7.27 평화선언대회」 개최
경험과상상,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 공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이하 민족위)는 정전협정 69주기인 7월27일(수) 오후 6시, 광화문 미대사관 우편 인도(5호선 광화문역 2번출구)에서 1, 2부로 나누어 「7.27 평화선언 대회」를 개최했다.

먼저 1부 순서에는 극단 ‘경험과상상’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기법으로 구성됐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세 소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맞닥뜨린다. 세월은 흘러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소녀들은 그리운 고향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잠순이는 더럽혀진 몸으로 도저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지켜만 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먼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숨죽여 살아간다. 경희와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잠순이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소원이다.

잠순이 할머니는 “전쟁은 절대로 안 돼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평화를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전쟁할라고 지랄하는 놈들(미국·일본·윤석열)하고 싸워야지. 또 통일을 해야 외세가 간섭을 못하고 전쟁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자주를 해야 평화가 오고 통일을 해야 평화가 옵니다.”라면서 “독립운동했던 선조들이 만들고 싶었던 나라, 우리가 만들어야지요. 이제 다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제의식이 집약된 할머니의 대사에 관객들은 큰 호응의 목소리와 박수로 화답했다. 뮤지컬은 9명의 배우가 함께 부르는 ‘아리랑’ ‘뱃놀이’ ‘진도아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27일 저녁, 광화문역 2번출구 인도에서 극단 ‘경험과상상’ 배우들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열연하고 있다. (사진=민족위 구산하)

2부는 사회자(민족위 김성일)의 안내에 따라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를 지키자!”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발언에 나선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는 “현재 전쟁 가능성이 큰 이유는 미국과 일본과 윤석열 때문이다. 남북이 합의한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고 통일도 할 수 있다”며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라고 강조했다.

윤미향 국회의원은 일본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는 것으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12월 28일의 굴욕적인 한일위안부합의를 소환했다. 윤 의원은 “국가책임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아닌 2015합의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왜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나”라면서 “전세계 1억인 평화선언으로 한반도에 정전, 휴전이 아닌 평화와 통일이 온다는 확신을 갖고 포기하지 말고 동행해 나가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소원 학생(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이제는 이 긴 전쟁을 끝내야 한다. 전쟁의 끝맺음은 무력을 통한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맞춰가는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한다”라고 전제한 후 “전임자들이 북과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면서 선제타격을 외치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화하는 전쟁광 윤석열을 퇴진시켜야 한다. 저희 대학생들도 앞장서서 우리의 평화, 미래를 위해 행동할테니 여러분들도 함께해 달라”라고 역설하여 함께한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펼쳐진 이날 「7.27 평화선언 대회」는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 김은진 교수(원광대로스쿨), 류성 대표(극단 경험과상상)가 ‘전쟁반대 평화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성료했다.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한 7.27 평화선언 운동에 이날까지 48개 단체와 852명이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민족위는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끝날 때까지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 전쟁반대 평화선언」 운동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후원: 우리 1005-604-265463)

류성(좌), 김은진(중), 백자(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공동대표가 「7.27 평화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가쓰라 다로의 조선 공략

초대 필리핀 총독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미합중국 육군 장관은 1905년 7월 말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제국 총리 겸 외상을 예방하고 이틀째인 1905년 7월29일 각서를 주고받았다. 각서의 골자는 ①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 의사가 없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②일·미·영 3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③미국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요컨대 일본은 미국 영향권의 필리핀에 관심이 없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보호령화에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1904년 2월8일 발발한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혹여라도 필리핀에까지 이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필리핀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일본측에 분명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태프트는 협약(pact)이나 협정(agreement)이 아닌 각서·비망록(memorandum) 형식을 취했다. 이는 1882년 5월22일 조인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불공경모(不公輕侮)’ 문구가 껄끄러웠기 때문일 수 있다. 불공경모는 대조선국(조선)과 대아미리가합중국(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받았을 때 서로 문제 해결을 알선하며 돕는다는 뜻이다. 영국 역시 일찌감치 영일동맹(1902.1.30)과 제2차 영일동맹(1905.8.12)을 맺으면서 유라시아대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본을 활용했다.

가쓰라 다로는 일본제국 제11대 내각총리대신 재임 시 태프트와 밀약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縣 고시 제40호를 발표(1905.2.22)했으며,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뉴햄프셔州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제국과 강화조약(1905.9.5)을 체결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공인받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섬을 할양받았다. 그리고 을사늑약(1905.11.17)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식민 지배의 포석을 깔았다. 제13대 총리 재임 때는 사법권을 박탈하는 기유각서(1909.7.12)와 의병 토벌(1909.9.1~10.30)을 거쳐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탄(1910.8.29)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에는 언제나 가쓰라 다로(계태랑)의 이름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으로 부르든 보수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서·비망록으로 깎아내리든 가쓰라와 태프트의 만남 이후의 우리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흘러갔다.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일본은 아세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대한제국을 차지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이용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것이 1894년에서 1910년 사이 구한말을 둘러싼 문법이었다. 우리는 2022년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도록 문법을 개정할 수 있을까.

2022년 7월 24일 일요일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

유토피아(utopia)의 u가 ‘없다’인 것처럼 아나키(anarchy)의 a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각각 ‘장소가 없다’, ‘지배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왜곡된 번역 ‘무정부주의’가 아닌 ‘무권력주의’ ‘무강권주의’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일찌기 아나키를 민중이 직접 세우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질서(Anarchy is Order=Ⓐ)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블랙 컬러를 선호하여 흑도회(黑濤會), 흑풍회(黑風會), 흑우연맹(黑友聯盟), 흑전사(黑戰社),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 같은 조직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제는 문경에서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과 워크숍에 함께했다. 지역 분위기는 지역신문의 취재조차 없을 정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1923년과 1926년 사이 대역사건과 괴사진사건으로 내각이 교체될 만큼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21살, 20살짜리 아나키스트에 주목할 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은 두텁지 않다. 가네코의 추도식임에도 불구하고 워크숍 발제 중 가네코 지사에 대한 온전한 논의는 전무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 문제를 꺼내고 싶었는데, 김미령 대표(자립지지공동체)님이 가네코 후미코의 제삿날에 남편(박열) 얘기만 해서 되겠느냐는 뼈 때리는 발언을 해주셔서 속이 시원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님 애쓰셨다. 무엇보다 60명 추모단을 이끌어주신 바우 손병주 회장님, 묵묵히 뒷받침해주신 이은영 사모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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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 봉행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 개최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1903~1926) 지사 96주기 추도식 및 워크숍이 7월23일(土) 오전과 오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공원 내 묘역과 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도식은 지역 내 정관계인사와 지역주민, (사)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회(네이버밴드) 멤버들이 함께한 가운데 약력보고, 추도사, 헌화와 분향 순으로 1시간가량 진행됐다. 특히 추도사에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氏가 전해온 연대의 인사말이 대독돼 의미를 더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지사 96주기 추도식이 7월23일(토) 10시30분, 박열의사기념공원 안에 모신 지사의 묘소 앞에서 봉행됐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당시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여서 소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다. 이후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고모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부강심상소학교에 적을 두고 약 7년 동안 학대받으며 부엌데기를 했다. 가네코는 1919년 부강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라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관계자와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2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문경 출신의 박열을 만나 동거를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대한 투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발생 이틀 후, 일제의 한인 단속에 부부는 불령사(不逞社)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이 알려지자 일제는 이를 천황 암살을 도모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는데, 10일 만에 이례적으로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지역의 형무소로 이감됐다. 3개월 후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아이를 밴 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동지들의 사인규명과 시신인도 요구가 묵살되어 타살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박열의 형 박정식이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제는 문제가 있는 유골이라 잘못돼서는 안 된다면서 유골을 소포로 상주경찰서로 보냈다. 가네코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8㎞ 북쪽의 팔영리 산중턱에 묻혀 방치돼 오다가 2003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사후 92년이 지난 2018년 가네코 후미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2004년 애족장)에 이어 2번째 서훈이다. 남편 박열 의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유일한 한일 부부 서훈자이기도 하다.

박열의사기념관 1, 2층에 전시된 초등학생들의 기록화. 박열-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의 옷을 입고 일제 검사·판사를 상대로 법정 투쟁하는 모습을 어린 학생들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은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50분까지 박열의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1,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워크숍의 첫 순서는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16개월 동안 발간한 3가지 제호에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에 대한 발제로 시작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잡지 ‘黑濤’의 제호는 아나키즘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에스페란토어 ‘LA NIGRA OND’가 병기되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절대자유를 강조한 아나키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흑도 폐간 후 발행한 ‘후토이 센징’(담대한 선인)은 검열 당국이 ‘후테이 센징’(不逞鮮人, 못된 조선놈)의 사용을 불허하여 엇비슷한 발음의 월간 잡지로 발간한 것이다. ‘흑도’와 달리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을 담았고, 박열의 아나키즘 예술론도 엿볼 수 있다. ‘후토이 센징’마저 과격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자 제호를 바꿔 3, 4호를 발간한 ‘現社會’는 당시 일제가 안고 있던 각종 모순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발간한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기사 투고자나 광고 참여자에는 1920년대 초 일본의 거의 모든 아나키즘 운동, 마르크시즘 운동 계열의 인물 및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

7월23일(토) 오후, 한국아니키즘학회장을 지낸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두 번째 발제에서 성주현 교수(1923제노사이드연구소)는 「해방 후 박열과 재일한인사회」를 고찰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22년 2개월이라는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1945년 10월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를 출소했다. 이후 신조선건설동맹(건동) 초대위원장,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거류민단)과 후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재일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도쿄를 방문,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고, 박열은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이는 이강훈, 원심창 등 단독정부 수립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그룹의 배제와 이탈을 가져왔다.
또한, 군국주의의 복멸과 천황제 타도를 주장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김천해와 달리 박열은 천황제 인정과 일본 내정 불간섭을 천명하여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의 위상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해방 후부터 1949년 영구 귀국까지 5년간 박열의 재일한인사회 활동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 세 번째 발제는 신진희 학예연구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가 「박열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주 내용은 1920년대 초반 일본과 조선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메이커 박열의 생애사, 사상사, 독립운동사 연구를 더듬어 정리한 것이다. 발제문에 아나키즘과 독립운동 분야를 나누어 서술하였지만 둘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발제 제목과 달리 연구 전망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있었다.

전반부의 3개 발제에 따른 후반부 지정토론 시간은 김명섭 교수(단국대)가 좌장 사회를 맡았다. 조동범 교수(중앙대), 김인덕 교수(청암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지정토론에 나섰고, 이어 질의응답 시간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한편, 이날 추모식·워크샵은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가 실무를 맡고, 역사나그네 손병주 회장(성남역사문화답사회)이 60명 규모의 추모단을 이끌면서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전경  [아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묘역

2022년 7월 15일 금요일

원팀 원스피릿으로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한양공고에 이르는 대략 2.74㎞의 거리를 말한다. 1984년 완전개통한 지하철 2호선(을지로 순환선)이 지나간다. 1914년 일제의 경성부 구역 획정 때는 황금정(黃金町)으로 불렸다. 구한말부터 화교들이 차이나타운 상권을 형성한 곳이어서 광복 후인 1946년 일본식 동명을 개정할 때 그 기를 누르려고 중국의 상극인 고수(高隋)전쟁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성씨를 따와 을지로로 명명했다는 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민의료기관인 혜민서(惠民署)가 자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원과 약방이 클러스터를 형성한 구리개길(구리 빛이 나는 고개) 권역이기도 하다. 혜민서 옛터라는 공간에 착안해 과자점(혜민당)과 가배점(커피한약방) 콘셉트로 1940년대 지어진 건물을 리모델링한 주인장의 선견에 감탄한다.

점심나절에 AOK 장김은희, 정연진, 정에스더, 최성주 선생님이 명동 한여연에 내방해 주셨다. 동강나루터에서 국물 진한 참게메기매운탕과 바삭한 새우굴튀김에 막걸리 한잔씩 하고 나와, 골목길 커피한약방에서 한약 빛깔의 가배를 복용했다.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한 얘기들… 1923년 1월 상하이 국민대표대회는 러시아·만주 계열의 창조파, 국내·미주계의 개조파, 김구·이동녕 등의 고수파로 갈리면서 통합에 실패하고,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나올 때까지 임시정부는 쇠락을 거듭했다. 적폐와 독재, 부조리라는 거악과 맞서기 위해 원팀 원스피릿으로 나아가야 하는 평화통일 사회단체와 시민조직이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2022년 7월 8일 금요일

산파 박자혜

탑골공원 건너편으로 삼일대로를 걷다가 남인사마당의 「박자혜 산파 터」 표석 앞에 멈춰 섰다. 산파(産婆, Midwife)는 산모(産母)의 출산을 돕는 여성을 가리키는데,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고 돕는 사람을 비유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해 사람들이 무지를 자각하고 새로운 사상을 낳게 만드는 산파술을 즐겨 사용했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자혜 선생은 덴노 치하의 태평천하 황국(皇國)에서 순탄한 신민(臣民)의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미래를 낳는 산모는 많지만,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는 드물다. 박자혜 선생의 삶은 부조리한 현실을 대면하고 각성한 뜨거운 신념(조국애)이 개인과 사회를 변혁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변신하며 영달을 추구하는 꺼삐딴 이인국이나 미스터 방삼복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조국광복을 낳는데 일조한 산파 박자혜 선생의 자비로운(慈) 은혜(惠)에 부끄럽지 않게끔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패관잡록(稗官雜錄)](29) 산파 박자혜
미래를 낳는 산모,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의 삶


한국여성연합신문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7.0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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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 한쪽에 「박자혜 산파 터」 표석이 있다.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가 간호역사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2020년 1월22일 종로구청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 신청한 표석 설치 件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가 심의하여 같은 해 8월26일 지금의 위치에 표석을 설치했다.

표석에는 “박자혜(1895∼1943) 간호사가 산파를 개원한 곳이다. 박자혜는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로 활동하며 나석주 열사의 의거(1926년)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28년 12월12일자 동아일보의 「신채호 부인 방문기」 기사는 “냉돌(冷突)에 기장(飢膓) 쥐고 모슬(母膝)에 양아제읍(兩兒啼泣)”이라는 제목으로 ‘三旬에 九食으로 三母子 겨우 연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시내 인사동 69번지 앞거리를 지내노라면 ‘산파(産婆) 박자혜(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서 추운 날 저녁 병에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니 이 집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 가정이다.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모 쓸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같은지 산파가 원채 많은 관계인지 10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서 돈을 벌어보기는커녕 간판 붙여놓는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임으로 자연 그의 아궁지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 될까 말까 하야 말과 같은 삼순구식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1928년 12월12일(수)자 동아일보 5면에 관련 내용과 함께 박자혜 여사와 산파 문패 사진이 게재돼 있다.

박자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있던 해 12월11일 수유리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애기나인으로 입궐해 궁중생활을 하다가 1910년 국권피탈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1911년 출궁했다. 이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서 공부하고 1914년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면허를 취득했다. 1916년경부터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부로 근무하던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자가 줄을 잇는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4명의 동료와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결성, 3월10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일경은 선생을 ‘악질적인 여자’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로 규정했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넘어가 회문대학(연경대학) 의예과 재학 중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15살 연상(25세-40세)의 신채호를 만나 1920년 혼인했다.

부부이자 동지로써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두 사람은 여느 독립운동가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자혜 선생은 경제적 곤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선의 아이를 이역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남편에게 전하고, 1922년 두 살 큰아이(수범)를 데리고 작은아이(두범)를 임신한 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종로구 조선극장 뒷골목에 ‘産婆 朴慈惠’ 간판을 걸고 전문 조산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중국과 국내의 연락을 중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국내에 밀파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사의 의거도 박자혜 선생의 경성길 안내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36년, 일경에 체포(1929)돼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이인 남편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에 쓰러졌다는 급전을 받은 선생은 급히 뤼순으로 향했으나, 신채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21일, 57세에 옥중 순국하며 찬란한 불굴의 삶을 마감했다. 남편의 만기 출소만 기다리던 박자혜 선생에게는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슬픔, 설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산원 벌이도 시원치 않아 선생의 삶은 더욱 곤궁하던 차에 큰아들 수범은 만주로 떠나보내고, 열다섯 작은아들 두범은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잃고 말았다. 가족을 모두 잃은 선생은 힘겨운 삶을 이어가다가 유일한 희망인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16일 단칸 셋방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고, 2008년에야 남편 신채호의 고향인 충북 청원 고령신씨 선산에 합폄(유골 없는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자혜 산파 터에서 불과 800m 거리 중학동에 주한일본대사관이 있고, 율곡로2길을 사이에 둔 수송동에 2011년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매주 수요일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알리는 단체와 그에 맞서는 보수세력 간 대치가 반복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이제 그 자리를 상당수 대체한 또다른 외세와 또 그 외세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기회주의자의 행태가 뭉쳐져 우리 사회의 통합과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미래를 낳는 산모는 많지만,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는 드물다. 조국광복을 낳는데 일조한 박자혜 산파의 자비로운(慈) 은혜(惠)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에 설치된 박자혜 산파 터(朴慈惠 産婆址) 표지석


2022년 7월 3일 일요일

마차공소의 어제와 오늘

영월군 북면 마차공소(磨磋公所)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했다. 이번 7월부터 매월 첫째주에 원주교구 영월성당에서 신부님(김진형 세자요한)이 나오셔서 4시 미사를 집전하는 일정이 잡혔는데, 운 좋게 날짜를 맞추게 됐다. 가톨릭교회에서 공소(公所)는 공적인 사무를 처리하는 장소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본당(本堂)보다 작은 규모의 교회 단위를 가리킨다. 공소에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기에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미사를 대신한 공소예절이 거행된다. 요컨대 공소예절은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 형식이다.

북면 마차리의 영월광업소(마차탄광)는 1935년에 문을 연 영월탄전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전력주식회사가 건설한 영월발전소의 연료원을 공급하기 위해 개발됐다. 영월광업소는 48개 철탑이 받쳐주는 가공삭도(架空索道)를 통해 12㎞ 떨어진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운반하며 전성기(1952년 전후 7천명 직원)를 구가했다.

영월 마차공소 전경

영월 마차공소 내부

광산의 호황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며 신자수가 100여 명에 이르자 ‘원주교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대화성당의 故이영섭(프란치스코) 신부가 마차공소를 짓기 시작하여, 1962년(10.16)에 축성식을 가졌다. 이후 대한석탄공사로부터 지금의 자리를 기증받아 현 공소 건물과 사제관 등을 새로 지었다. 1965년(9.8)에는 영월본당에서 독립해 원주교구 내 14번째이자 교구 설정 후 1번째인 마차본당으로 승격하고, 마차6리2반 1107-1번지에 새 성전을 신축했다(주보 한국순교복자 79위). 하지만 사양길로 접어든 탄광산업을 따라 인구가 줄고 신자수도 급감하면서 불과 3년 뒤인 1968년(7.17)에 1대 본당신부 재임 중 다시 영월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고 오늘까지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요컨대 마차공소(마차리 1107-4)는 영월 마차탄광촌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셈이다.

미사 후 23년 동안 마차공소의 공소회장를 맡아온 신대식(다니엘) 선생님 댁에서 사모님이 내어주신 체리차를 마셨다. 신 회장님은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號를 東天으로 하여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상] 동천 선생님이 쓴 서산대사의 禪詩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하] 「하늘새」 작품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고고한 鶴의 자태가 절묘하다.


2022년 7월 1일 금요일

쿼드? 오커스? 5아이즈? 그게 뭐지.

2015년 개봉한 007 시리즈의 24번째 영화 「스펙터 Spectre」(2015)의 한 장면. C(맥스 덴비)라 불리는 영국의 신임 합동정보국장이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통합안보회의에서 주요 9개국의 첩보를 무제한으로 쓰기 위해 9개국 첩보기관을 잇는 실시간 정보공유 네트워크인 나인아이즈를 개설하는 투표를 진행한 결과 찬성 8, 반대 1(남아공)로 부결된다. 영화에서는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 프랑스가 나인아이즈(Nine Eyes) 9개국이다. 2015년 당시 각본이나 제작 측에서 내세운 이 국가들은 서방세계가 생각하는 일반적 중견국을 포함한다. 여기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정도가 빠져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영미권 5개국 간의 군사동맹 및 정보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존재한다. 이는 상호 첩보동맹을 맺고 있는 앵글로색슨系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나, 뉴질랜드, 영국, 미국 5개국(AUS/CAN/NZ/UK/US EYES ONLY)을 이르는 말이다. 미국(NSA)은 영국(GCHQ), 오스트레일리아(ASD), 캐나다(CSE), 뉴질랜드(GCSB)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의 신호정보 수집 및 분석 네트워크를 통틀어 에셜론(ECHELON)이라 한다.

007 시리즈 「Spectre」(2015)의 한 장면. “나인아이즈(Nine Eyes)의 회원국들은 공유된 정보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미영캐호뉴 5개의 눈(Five Eyes)이 전세계의 사적 통신망까지 들여다보는 에셜론(Echelon)을 운용하고 있다.

아메리칸 국뽕영화 「탑건: 매버릭 Top Gun: Maverick」(2021)은 전작 「탑건 Top Gun」(1986)에 이어 자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슈퍼파워로서의 의지를 표출한다. 도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6년 「탑건」이 개봉하자 예년보다 2만명 많은 하이틴과 이대남이 군에 자원입대했고, 이중 1만6천명이 해군에 지원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1964~1975) 초반 해군 전투기조종사의 저숙련으로 공대공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바,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해군 전투기조종사 학교(US Navy Fighter Weapons School)를 설립(1969)하고 ‘탑건’으로 불리는 SFTI 프로그램(Navy Strike Fighter Tactics Instructor Program, 미해군 타격 전투기 전술 강사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엄호와 유인 등 윙맨(Wingman)의 역할을 강조한 팀플레이 전술을 중시한 결과 SFTI 프로그램 전 북베트남의 미그(MiG)機에 대한 미 해군의 살상률은 2.42대1에서 12.5대1로 증가했다.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C: Military–Industrial Complex)라고 하지 않던가. 최고의 국뽕 항공액션 엔터테인먼트에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부으면서 펜타곤과 해군성은 다시 한번 젋은이들의 군입대 러시를 기대하고 있다.

톰 크루즈는 「Top Gun」(1986)에서 입었던 재킷을 35년이 지난 「Top Gun: Maverick」(2021)에서도 그대로 입고 등장한다. 톰 크루즈가 걸친 항공점퍼 등짝에 미국기와 일본기, 타이완기가 선명하게 패치로 부착돼 있다.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서 3개국만 추린 미·영·호 3자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 Australia,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미·일·인·호 4자 안보대화 쿼드(QUAD, 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舊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창설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중국의 新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带一路, OBOR: One Belt One Road)에 대항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등 미국이 주도하는 對중국, 對러시아 포위·압박체는 화려하고 폭넓은 스쿼드를 자랑한다.

주요 플레이어 국가들은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 Route(길)와 Resouce(자원)를 확보하려 부단히 움직인다. 길과 거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장악·연결하고 있는가, 얼마나 전략자원이 있는 곳에 접근·통제하는가에 따라 국가가 취하는 행동은 달라진다. 우리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한미 실무협의체(ROK-US Working Group)에도 지정학과 국익에 입각해 주요 현안을 분석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미국에 끌려다니며 독자적인 대응권을 상실한 상태로는 다시금 우리 강토를 주전장(主戰場, The Main Battleground)으로 내주는 최악의 디스토피아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패권국가 미국의 우리땅 군사기지화를 90여년 전 일제의 병참기지화로 연결지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여전히 지평‘線’에 심취해 안주하면서 입체‘面’을 보지 못하는 굥本夫丈에게는 바이 기대할 바가 없다는 것이 답답한 한계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