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필리핀 총독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미합중국 육군 장관은 1905년 7월 말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제국 총리 겸 외상을 예방하고 이틀째인 1905년 7월29일 각서를 주고받았다. 각서의 골자는 ①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 의사가 없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②일·미·영 3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③미국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요컨대 일본은 미국 영향권의 필리핀에 관심이 없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보호령화에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1904년 2월8일 발발한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혹여라도 필리핀에까지 이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필리핀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일본측에 분명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태프트는 협약(pact)이나 협정(agreement)이 아닌 각서·비망록(memorandum) 형식을 취했다. 이는 1882년 5월22일 조인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불공경모(不公輕侮)’ 문구가 껄끄러웠기 때문일 수 있다. 불공경모는 대조선국(조선)과 대아미리가합중국(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받았을 때 서로 문제 해결을 알선하며 돕는다는 뜻이다. 영국 역시 일찌감치 영일동맹(1902.1.30)과 제2차 영일동맹(1905.8.12)을 맺으면서 유라시아대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본을 활용했다.
가쓰라 다로는 일본제국 제11대 내각총리대신 재임 시 태프트와 밀약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縣 고시 제40호를 발표(1905.2.22)했으며,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뉴햄프셔州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제국과 강화조약(1905.9.5)을 체결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공인받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섬을 할양받았다. 그리고 을사늑약(1905.11.17)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식민 지배의 포석을 깔았다. 제13대 총리 재임 때는 사법권을 박탈하는 기유각서(1909.7.12)와 의병 토벌(1909.9.1~10.30)을 거쳐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탄(1910.8.29)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에는 언제나 가쓰라 다로(계태랑)의 이름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으로 부르든 보수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서·비망록으로 깎아내리든 가쓰라와 태프트의 만남 이후의 우리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흘러갔다.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일본은 아세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대한제국을 차지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이용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것이 1894년에서 1910년 사이 구한말을 둘러싼 문법이었다. 우리는 2022년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도록 문법을 개정할 수 있을까.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가쓰라 다로의 조선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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