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1일 금요일

천강에 비친 달

영릉의 원찰 봉미산 신륵사 경내 여강(驪江)변에 있는 강월헌은 보제존자 나옹(1320~1376)의 처소 이름이자 당호였다. 나옹(懶翁)은 지공(指空)선사에게 법을 받아 무학(無學)대사에게 전해주었다. 세 선승의 영정이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다비(茶毘) 장소이며, 그 옆의 자그마한 3층석탑은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이다.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현판에서 월인천강(月印千江) 네 글자를 떠올렸다. ‘月’은 석가모니를 ‘千江’은 중생(衆生)을 비유한 것이다.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천개의 강물에 천개의 달도장…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가 중궁에 책봉된 1418년, 상왕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역모죄로 처형하고 어머니 안씨와 동생들을 관비로 만들어 외척의 발호를 원천 봉쇄했다. 1446년(세종28) 세종은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 불교의 전래 과정 등을 담은 책을 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문 불경을 한글로 옮긴 최초의 사례이자 한글로 된 최초의 산문자료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이 탄생했다.

1447년(세종29) 세종이 완성된 석보상절을 열람하고 그 내용을 게송처럼 요약해서 찬불가 형식(악장)으로 지은 한글 최초의 시가집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세종은 숭유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경전이 아닌 불교경전부터 한글로 옮긴 셈이다. 세종은 월인천강의 마음을 담아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내명부를 이끌고 왕비의 소임을 다한 소헌왕후의 공덕을 극진히 빌었을 것이다. 천강에 비친 달… 월인(月印)의 종교, 월인의 정치, 월인의 교육이 절실한 요즘이다.


2022년 10월 19일 수요일

임금의 밥상

임금은 수라(水剌)를 젓수고, 웃어른은 진지를 잡수며, 상민은 밥을 먹고, 천민은 끼니를 때운다고 한다지. 오늘도 문해반 어머니 몇 분이 선생 대접한다고 거한 양식을 싸 오셨다. 함께 배불리 나누어 먹고도 이만큼이나 남았다.
촉촉한 붕어빵에 검은콩 박은 쑥개떡과 아삭한 단감, 고소한 호두알에 따뜻한 커피까지 더하니 내게는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수라, 진지가 됐다. 늘 배우는 게 더 많은데 정말 잘 가르쳐 드리고 싶다.


2022년 10월 3일 월요일

홍암 나철…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자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출신의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8.15)은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지냈다. 나철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7.29) 이후 포츠머스 조약(9.5)을 앞두고 외부대신 이하영을 찾아가 대한제국 대표로 회담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회담 참석이 무산되자 메이지 덴노에게 보내는 격문(대한매일신보 1905.11.4)을 통해 ①동양3국의 평화 ②조선의 주권·영토 보존 약속 ③일본인의 경제적 침탈방지 이행을 요구했다.

을사조약(1905.11.17) 후인 1907년 비밀결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200여 동지를 규합했다. 사재를 털고 모금을 벌여 권총 50정을 구입해 을사5적의 처단을 결의, 매국대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배형을 받았다. 나철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절망스런 상황에서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1909년 1월15일(양력 2월5일) 단군을 국조로 한 단군교(檀君敎)를 중광(重光)하고 이듬해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다.

만주 독립군의 상당수가 대종교 출신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국경일이 ①3월1일 독립선언일(삼일절) ②10월3일 건국기원절(개천절)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1월1일(단기 4294년 12월31일)부로 단기(檀紀) 연호를 폐지하고, 공식적으로 서기 연호를 사용했다. 단 하루 사이에 2333년이란 시간이 사라졌다.

창덕궁과 원서공원 사이 창덕궁길에 들어서 금호문(金虎門)을 지나 50m쯤 가면 「개천절 행사 발상지」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표지판에는 “1909년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환웅이 지상에 내려왔다 하여 개천절로 정하고 이곳에서 첫 행사를 치렀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정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개천절(開天節)은 ‘하늘이 열려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기념하는 날이다. ①환웅이 처음 신시(神市)를 연 날이자 ②단군이 처음으로 개국한 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