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2014년 평생교육사 목요모임 프로그램

2014년 평생교육사 목요회 프로그램

날짜
회차
프로그램
진행
 1. 2(木)  39차 휴먼 라이브러리 Ⅰ - 대한민국 명장 김성철
 1. 9(木)  40차 소박한 평생교육원 운영 이야기 조광연
 1.16(木)  41차 매트릭스 독서법 윤여덕
 1.23(木)  42차 독서토론 - 평생교육사, 어떤 책을 읽는가 5 변자형
 2. 6(木)  43차 탈무드의 세계 이주환
 2.13(木)  44차 탈무드의 해석 이주환
 2.20(木)  45차 귀농·귀촌 김치순
 2.27(木)  46차 독서토론 「도가니」 변자형
 3. 6(木)  47차 독립운동사의 이해 신동현
 3.13(木)  48차 밋밋한 미팅 변자형
 4. 3(木)  49차 백범 김구 신동현
 4.17(木)  50차 10세 건강체조 이영희
 4.24(木)  51차 문상 예절법 김승기
 5. 1(木)  52차 약산 김원봉 신동현
 5. 8(木)  53차 앞서가는 리더의 퍼스널 컬러 커뮤니케이션 김승진
 5.15(木)  54차 천연화장품 스킨과 에센스 만들기 김은희
 5.22(木)  55차 발마사지 김의순
 5.29(木)  56차 웃음치료 문우택
 9.18(木)  57차 휴먼 라이브러리 Ⅱ - 북한탈출기 정귀옥
10. 2(木)  58차 나의 자연치유능력 윤계숙
10.16(木)  59차 우리가 모르는 성희롱 정선옥
10.23(木)  60차 건강을 지키는 생활습관 윤영희
11.13(木)  61차 지금 행복하십니까 성달현
11.20(木)  62차 사회적 기업 조한수
11.27(木)  63차 외화 파생상품의 이해 황인순
12. 4(木)  64차 괜찮아 한문이야 김경진





28일 명동 회의 끝나고 뒤풀이하면서 재미로 엮어본 남산논검(南山論劍)…
별호(別號)와 무공절기(武功絶技)
남산파(南山派)의 창시자 공공진인(空空眞人) 찬남 : 남산도법(南山刀法)
무심검(無心劍) 경희 :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
무부검(無浮劍) 현건 : 독고구검(獨孤九劍)
무정검(無情劍) 승기 :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무속검(無俗劍) 동현 : 일양지(一陽指)
무생검(無生劍) 자형 : 암연소혼장(暗然銷魂掌)
무안검(無眼劍) 윤배 : 합마공(蛤膜功)


어떠한 재정적·심정적 지원도 없이 만 2년에 걸쳐 도합 64회차의 평생교육사 모임을 준비하고 진행해왔지만, 이젠 지쳐간다. 또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을까.

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제천 의림지 소요(逍遙)

12월 26일, 제천답사 둘째날… 국가지정 명승(名勝) 제20호 의림지(義林池)를 소요했다.


제천(堤川)의 용두산(龍頭山, 874m) 끝자락에 자리잡은 의림지(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의 하나로 충청도를 가리키는 호서(湖西)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于勒)이 쌓았다는 말도 있고, 조선 세종 때 박의림(朴義林)이 만들어 의림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제천의 옛이름이 고구려의 땅이던 때에는 제방을 뜻하는 내토(奈吐)였고,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후에는 내제(奈堤) 혹은 대제(大堤)라고 고쳐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림지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시대이거나,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삼한시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산골짜기에서 흘러 들어오는 흙과 모래를 서쪽 끝자락에 용추폭포(龍楸瀑布)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밖의 홍류동(紅流洞)쪽으로  내뱉는 뛰어난 얼개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기에 수축이 있었고 일제 초기에 수문(水門)을 다시 고쳐 그 규모를 키웠으며 1972년 큰 장마로 둑이 무너지자 이듬해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둘레 약 2㎞, 면적 158,000㎡, 수심 8~10m이며 약 300정보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제천 사람들의 기상을 전하듯 천년묵은 이무기를 때려잡았다는 어씨(魚氏) 오형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 밖에도 전설이 깃든 제비바위(燕子岩), 우륵정(于勒亭), 신떨이봉(新月山) 등이 지금도 남아있다.
수백 년 묵은 노송들이 볼만한 이곳에는 진섭헌(振섭軒), 임소정(臨沼亭), 호월정(湖月亭), 청폭정(聽瀑亭), 우륵대(于勒臺) 같은 정자와 누각이 마련되어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맞았다고 하며, ‘제비바위에서 낚시하는 늙은이의 모습’(燕巖釣臾 연암조유)이 제천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여겨질 만큼 사랑받았으나 지금은 영호정(映湖亭)과 경호루(鏡湖樓)가 있을 뿐이다. 다섯가지 빛깔을 가진 붕어와 순채(蓴菜)가 이곳의 특산물로써 이름이 높았으며, 요즘에는 겨울이면 공어(空魚)를 낚는 태공들로, 날이 풀리면 산책이나 뱃놀이를 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제천의 대표적인 문화 유적지이다. 제천시에서 선정한 제천10경 중 제1경이다.


의림지를 소요(逍遙)하면서 ‘강호를 거만하게 비웃는다’는 의미의 진융(金庸)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떠올렸다. 의로운 숲(義林)을 생각하고 홍진(紅塵)의 썩은 명리(名利)를 거만하게 비웃는(笑傲) 삶이라면 어떨까.



평협 유영훈 국장님의 긴급 번개제안으로 출발한 크리스마스 제천여행은 제천 솔뫼학교 노병윤 교감선생님의 따뜻한 환대로 더욱 감사하고 뜻깊은 1박2일이었다. 특별한 고마움을 전해 드리며 솔뫼학교 모든 가족분들의 평안을 기원한다.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유람

크리스마스에 훌쩍 떠나본 제천여행…


충북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와 물태리를 연결하는 청풍대교(淸風大橋)는 전국 최초의 내륙지방 호수에 건설된 442m의 교량이다. 청풍호수와 조화를 이루는 멋진 풍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청풍대교를 건너서는… 총면적 5만 4,486㎡로 조성된 청풍문화재단지를 유람했다.
1978년 6월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충주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제천시의 청풍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 61개 부락과 충주시 일부가 수몰되자, 이곳에 있던 각종 문화재들을 청풍호 연안 망월산성 기슭에 모아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관광지로 활용하는 곳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팔영루(八詠樓)는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들던 관문으로 조선 숙종 28년(1702) 부사 이기홍이 창건하고 남덕문(覽德門)이라 한 것을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는데 이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의 8경을 시제로 지은 팔영시(八詠詩)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고 있다. 건물구조는 높이 2.2m의 석축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었으며 기단 위에 누각을 세웠다. 팔영루의 현판은 민치상의 글씨이고 출입문 천장의 호랑이 그림은 구전에 의하면 청풍의 재난(수해)를 막기 위하여 그려졌다고 한다.


제천 지곡리(池谷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는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주택이다.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으로 경계를 두었고, 중문으로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一자형의 초가로 되어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과 방앗간이 있고, 상부에 다락을 꾸미고 있다.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천 도화리(桃花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는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조선말기의 목조기와집으로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85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건물은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단의 낮은 냇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부엌·광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 2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가구는 3량 가구이며, 벽은 부엌과 웃방 뒷벽을 제외하고 모두 심벽(心壁: 기둥의 중심부에 흙벽을 쳐서 벽면보다 내보이게 된 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집은 본래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를 두었고 뒤뜰과 옆 마당은 밭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건물만 이전하여 예전의 자연환경은 찾을 수 없다.


제천 황석리(黃石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는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조선말기의 목조기와집이다. 충주다목적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안채는 4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오른쪽 앞면에 툇간을 두었다. 정남향의 一자형 구조인데 왼쪽부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마루를 놓았다. 조선시대의 시골의 양반가옥으로서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구조 형식과 건축공법이 특이한 건축물이다.


김중명(金重明, 1614~1685)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이회(而晦)였다. 아버지 김전(金㙉)은 병자호란 당시 빙고(氷庫)의 별제 벼슬을 지내던 사람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문안하려고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힘껏 싸우다 전사했으며 호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지냈다.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놈을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종이 중명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부르자, 중명은 모래흙 세 포대를 가져다 양쪽 겨드랑이에 한 포씩 끼고 나머지 한포는 등에다 지고는 대궐 밖에서부터 전각에까지 걸어오니 임금이 장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날로 총애가 깊어져 병마절도사 벼슬까지 받게 되었다. 기해년 효종이 승하하자 중명은 팔뚝을 어루만지며 “내 일은 이제 끝났구나!” 하고 크게 울부짓더니 결국 청풍고을의 백치에 물러나 살다가 생을 마쳤다. 묘소는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 있다.

수몰이전 옛 청풍·수산·덕산·한수지역에 산재 되어온 고대 사회의 장의(葬儀)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그리고 도호부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공덕비·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역대 관찰사·현감·군수의 치적·공적비 10점 등 총 42점의 비지정문화재가 배치되어 있는 석물군(石物群)을 통해 고대에서 근대까지 남한강변의 거석문화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의 공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금남루(錦南樓)는 청풍부(淸風府)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淸風 石造如來立像)은 높이가 341㎝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邑里)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입상 앞에 있는 둥근돌(소원돌)을 본인의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며 기원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금병헌(錦屛軒)은 청풍부(淸風府)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東軒)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현의 승(僧) 청공(淸恭)이 왕사가 되어 군(郡)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都護府)로 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금병헌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93호 망월산성(望月山城)은 현재 수몰된 옛 청풍소재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망월산(336m)의 정상부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500m이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4m이다. 본래는 남한강이 돌아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청풍호가 감싸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청풍은 삼국시대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며,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사열이산성을 늘려 쌓았다고 하나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황산(城隍山)과 충청도읍지의 태산(台山)이 군의 동쪽 3리에 있다고 하여 이 산성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령(令)자가 쓰여진 오방깃발 중에 북쪽을 가리키는 흑색(黑色) 현무기(玄武旗)만 나부끼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크리스마스 증후군?

영어로 하면 Christmas Syndrome가 맞는 표현인 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마스 증후군이란 게 있다고 하더군.
하여간 뭔가 설레고 들뜬 분위기로 동분서주한 성탄 시즌에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져 상대적 박탈감이나 우울감을 느끼고 의기소침해 하는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상시적인 와이미 증후군(Why me Syndrome)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와 벌~써부터 주구장창 방영되는 맥컬린 컬킨의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상황에 자꾸만 감정이입되어서는 곤란하다.
양지에서 광합성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넘어가기가 어렵겠지. 내일은 여행이라도 가볼까.
노~엘~ 노~엘 노~엘 노엘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미생

좀전에 tvN 금토드라마 미생 최종회를 본방사수했다.
시놉시스 같은 건 훑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바둑에는 문외한인지라… 처음엔 미생의 의미를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등장시킨 양생(梁生)·이생(李生)·홍생(洪生)·박생(朴生)·한생(韓生)과 같이 미씨(麋氏) 성을 가진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한량이 묘령의 여인과 썸타는 얘기로 점철된 미생(麋生)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집이나 대마 등이 살아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완전히 살(완생) 여지를 지니고 있는 상태나 그 돌을 뜻한다고 한다.
‘내가 먼저 산 후 상대를 공격한다’는 의미의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도 생각나지만, 그보다는 역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의 명언과 더 부합하는 듯 하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Seamos todos nosotros realistas,
pero tengamos un sueño imposible en nuestro corazón.

현실을 직시하되 안주하지는 않으며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과 꿈을 향해 도전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은 버둥버둥하는 미생(未生)일 뿐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며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서울도서관 강좌 - 사대문 안과 도심 재개발

서울도서관의 ‘겨울, 이야기로 듣는 서울’ 시리즈 2번째 《사대문 안과 도심 재개발》 강좌에 다녀왔다. 매서운 날씨 때문인지 선착순 30명 모집(공공서비스예약)에 18명만 출석했다.
강연자인 노주석 서울신문 기자는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서울 택리지」(소담출판사)라는 책도 출간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서울은 수많은 역사의 부침을 겪어왔다.
서기전 18년 온조가 위례(慰禮)에 터를 잡은 이래, 고려 문종은 남경(南京)으로 승격(1067)시켰고, 숙종은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1104)하기도 했다.
16세기 무렵엔 양난(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초토화됐고,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일제에 강탈당했으며, 6·25전쟁 공방의 핵심지역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전후복구와 개발논리에 치이면서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형되어 왔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그에 따른 설명으로 이어진 노기자의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1900년대 초엽에 외국인이 박았다는 광화문 육조거리의 사진이다.
광화문(光化門) 뒤편으로 웅장한 산세의 주산(主山) 백악(북악산)이 자리하고 있고, 우편으로 보현봉(普賢峰)과 삼각산(북한산)이 멀리 북방의 백두산까지 이어올라가 백두대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좌편으로는 진흥왕순수비가 서있는 비봉(碑峰)이 보인다. 그야말로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수와 지세이며 조형이다. 이 한장의 사진이 서울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도서관 앞에 18m짜리 대형 성탄트리가 핑크색과 보랏빛의 크리스마스 볼과 은하수 조명으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위례성과 한성(풍납토성·몽촌토성)

위례성(慰禮城)에서 한성(漢城)으로…
서울은 2천년 전부터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첫도읍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이다. 위례성은 나중에 확대·발전하여 한성(漢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 때의 한성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이다. 좁은 의미의 한성은 정궁이 있는 북성(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구성되었다. 성 안에는 각각 궁궐과 관청, 왕족 및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일반민가 등이 있었다. 넓은 의미의 한성은 두 성 바깥의 도시와 왕릉구역인 석촌동고분군 등 인근 지역(일반민가와 농경지, 각종 경제시설)을 모두 포함한다.
백제사람들은 살아서는 풍납토성·몽촌토성·삼성동통성과 그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죽어서는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지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서울 서북쪽 경계 인근 한강변에는 멱절산유적이 있다. 백제 때 한강을 오가는 배들을 굽어보며 감시하던 낮은 야산의 보루 혹은 초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수상교통로로 나뉜다. 백제 한성기의 육상교통로는 고구려 지역과 연결되는 북방교통로와 마한·신라·가야 지역으로 통하는 남방교통로가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였다. 이때 군사들은 주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수상교통로는 강과 작은 하천을 이용하는 내륙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상수로가 있다. 백제의 내륙수로에서는 한강이 가장 중요했으며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한성은 백제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한강 하류의 김포·고양·하남, 상류의 가평·여주·원주 등에는 백제 한성기 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한강 북쪽의 임진강과 한탄강도 백제의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연천 등에서 육계토성·칠중성·강내리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발견되었다.



풍납토성(風納土城)
한국과 중국의 고대 도성은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시대(475BCE~221BCE) 제나라·노나라·조나라 등의 왕성·도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국의 경우에는 평양의 낙랑토성, 고구려 국내성(초기),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 등이 대표적이다.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다.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백제의 첫 왕성(위례성)이자 도성(한성)이다. 풍납토성의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얕은 구릉 너머로 남한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성 안의 면적은 약 878.678㎡이며, 궁궐·도로·우물·창고 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으로 추정되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오래 전에 무너져서 지금은 전체 둘레 3.5㎞ 가운데 2.2㎞만 남아 있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의 성벽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3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증축은 성벽 안쪽만 하고, 바깥쪽은 하지 않았으며, 성벽 쌓는 기술은 지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법(版築法)은 모든 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흙을 쌓는 도중 나뭇가지·나뭇잎 등을 깔아두는 부엽법(敷葉法)은 몇몇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다.

다져넣기 : 판축법(版築法)
판축법은 흙을 시루떡처럼 층층이 다져쌓는 방식을 말한다. 성을 쌓기 전 땅을 고르기 위해 개흙을 대략 50㎝ 두께로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 성분이 많은 진흙을 20㎝ 정도 깔았다. 이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번갈아 두껍게 쌓아가며 사다리꼴의 성벽을 만들었다. 판축법은 하남성의 정주 백가장(白家莊)에서 발견된 상나라(2070BCE~1600BCE) 때의 토성에서 이미 나타난다. 백제는 이 판축법을 왜(일본)로 전하였다.

나뭇잎 깔기 : 부엽법(敷葉法)
나뭇잎 깔기는 성벽이나 제방을 쌓을 때 나뭇잎·나뭇가지·나무껍질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방식이다. 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곳에서 사용하는 기술이며, 지진 등에 잘 견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납토성 일부 구간에서는 개흙을 10㎝ 정도 두께로 쌓은 뒤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을 1㎝ 정도 깔고 다시 개흙을 덮는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한 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안휘성의 안풍당(安豊塘)이라는 한나라 때 저수지 제방에서 발견되었으며, 백제에서는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를 통해 왜(일본)로 전해져 큐슈의 미즈키·키쿠치죠 성벽, 오사카의 카메이·사야마이케 제방 등에 적용되었다.

성벽의 안팎에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작은 강돌을 덮었다. 강돌은 처음 성벽을 쌓을 때와 마지막 성벽을 쌓을 때 덮었다. 처음 성벽을 쌓을 때 성벽의 중간 높이까지 강돌을 덮었는데 바깥쪽 성벽의 가장 위쪽 강돌 사이에는 큰 판석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판석 위쪽은 성벽을 가파르게 쌓아 사람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안쪽 성벽의 마지막 성벽 바닥에는 큰 돌을 다듬어 2~3단의 축대를 정연하게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성 밖이 성 안에 비해 4m 이상 낮았다. 성 안쪽에는 좁고 얕은 도랑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토성의 주요 방어시설로는 성벽 외에도 해자·목책·망루·치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은 성벽 안쪽을 완만하게 쌓고 바깥쪽을 가파르게 쌓아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 바깥쪽에 물이 흐르도록 파놓은 해자(垓子)는 매우 넓고 깊어 다리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다.
목책(木柵)은 성벽 바깥쪽 아래에 끝을 날카롭게 깍은 나무기둥을 울타리처럼 땅에 박아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몽촌토성의 성벽 바깥쪽에서 목책이 확인되었으므로 풍납토성에도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는 성벽이 유독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치(雉)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풍납토성에는 망루(望樓)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부소산성 등의 사례를 참조하면, 성벽과 내부의 높은 곳에 망루를 만들어 성 안팎의 상황이나 적의 침입 등을 감시하였을 것이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고 적혀 있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으로 추정되는데, 산줄기가 넓게 퍼져서 지금의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근초고왕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도성방어체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백제 첫 수도인 위례성 남쪽에 새 거처를 마련해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성과 남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도성이 출현하였는데, 바로 한성이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에 비정된다. 백제의 천도 및 멸망으로 원래 이름이 잊혀졌으며 조선시대 성 안에 곰말(꿈말) 곧 몽촌(夢村)이라는 마을이 생겼으므로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의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성벽 길이는 2,285m이고, 내부 면적은 216,000㎡(67,000평)이다.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 바깥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능선 위에 둘레 약 270m의 외성이 위치한다. 토성 바깥으로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흐른 다음, 다시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한강 본류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가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1~2㎞ 거리에 석촌동·가락동·방이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성벽은 자연구릉 가운데 낮은 지점만 흙을 덧쌓아 연결하고 높은 지점은 깎아내리도록 하였다. 성문은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가 발견되었고, 서북쪽과 동북쪽 성벽, 그리고 외성에는 성벽의 바깥쪽 면에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 몽촌토성 내부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터, 움집터, 저장구덩이, 연못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3세기 중후반 이후의 토기류, 칼·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금동제 허리띠 장식, 동전무늬 도기를 비롯한 중국제 청자 등이 있다. 몽촌토성을 쌓고 사용한 시기는 대략 3세기말~5세기말경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3세기말이라는 추정은 성벽의 퇴적토층에서 동전무늬 도기조각이 수습된 점에 근거한 것이어서 재검토 여지가 있다. 일부 유물이 전세품(傳世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몽촌토성이 실제 성으로서 쓰인 것은 4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한문 학습의 필요성

제64차 평생교육사 목요회(2014.12.4)는 ‘한문학습의 필요성’ 강의로 진행되었다.
현직 고교 한문교사인 후말(後末) 김경진 선생님에 따르면 한자·한문교육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나아가 미래를 답보하는 한가지 방법이 된다. 때문에 학교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한문공부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자전(字典) 찾는 방법을 숙지시키고, 호(號) 짓는 방법도 알려주면 아이들이 재미있게 한문학습에 친숙해진다고 한다.
목요회 강의에서도 호(號)와 그에 관련된 흥미있는 사례가 소개되었다.

号 + 虎(범 호) : 범(虎)의 울음소리처럼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짖으니(号) 이름 호(號), 부르짖을 호.
사람이 본 이름(本名)이나 자(字) 이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인 호(號)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 부르기도 했다. 이규보(李奎報)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호를 짓는 4가지 방법을 언급하였는데… 거하거나 인연 있는 장소로 호를 삼는 소이호(所處以號),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소이호(所志以號), 처한 환경·여건을 호로 삼는 소이호(所遇以號), 좋아하거나 간직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소이호(所蓄以號)가 그것이다.
아호(雅號)는 시·문·서·화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이름이라는 의미이고, 별호(別號)는 본 이름 이외의 이름이라는 뜻으로 보통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용모 또는 특징을 따서 지어 부르는 별명과 같은 것이다.
당호(堂號)는 ‘당우(正堂과 屋宇)의 호’를 말함이나, 이것이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을 일컫게도 된 것이다. 김시습의 매월당, 신인선의 사임당, 정약용의 여유당 등이 있다. 택호(宅號)는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의 가옥 위치를 그 사람의 호로 부르는 것으로 ○○대감댁·김선생님댁 등으로 불렀으며, 출가한 여인에게는 친정의 지명을 붙여 나주댁·하동댁·전주댁·강릉댁 등으로 불렀다.
시호(諡號)란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王)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김정희(金正喜)는 추사(秋史) 등 무려 503개 호가 있었다고 한다.


무작정 따라갈 이유는 없지만 강남구에 소재한 초등학교에서는 강남교육지원청의 지도 아래 이미 2008년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자는 보다 풍부한 한국어를 구사하기 위한 기본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고, 학문언어 영역으로 옮겨가면 90%가 한자어이다. 때문에 한자어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온전한 학습을 이루어 나가기가 힘들다.
한글 어휘를 빼고 한자만 적는 혼용(混用)에는 반대하지만, 교과서의 주요 어휘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倂記)하는 것은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2014년 12월 7일 일요일

허니버터칩 단상

오늘 기말대비 주말보강에 중딩 1학년 한 녀석이 해태제과 허니버터칩(honey butter chip)을 가져와 맛을 봤다.
미국산 감자에 국내산 아카시아꿀, 12시간의 발효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프랑스산 고메버터가 시즈닝된 유탕처리 과자제품으로 60g(345㎉) 짜리 한 봉지가 1,500원이다.
해태제과에서는 원주 문막공장을 풀가동하고 있다는데 물량 부족으로 전국 곳곳에서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공정위도 끼워팔기와 관련하여 인질마케팅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히는 등 연일 뉴스메이커로 오르내리고 있다.


요며칠 감기로 입맛이 없는데… 먹어보니 맛도 괜찮다. 기존의 짭짤하고 자극적인 감자칩이 아닌 달콤하고 고소한 식감이다. 중1 아이들 이번 기말 범위인 경제 단원의 희소성이나 수요·공급법칙 내용에도 부합하여 설명하기도 좋다. 농심이나 오리온, 롯데제과 같은 대기업에서 미투제품 출시를 생각해봄직 하지만 아직은 대응이 없는 거 같다. 몇몇 음모설까지 나도는 듯하나, SNS를 기반으로 한 바이럴마케팅의 성공사례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하얀국물 열풍을 촉발한 팔도 꼬꼬면의 사례를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팍팍한 우리 삶도 허니버터(honey butter)처럼 조금은 달콤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