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례성(慰禮城)에서 한성(漢城)으로…
서울은 2천년 전부터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첫도읍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이다. 위례성은 나중에 확대·발전하여 한성(漢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 때의 한성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이다. 좁은 의미의 한성은 정궁이 있는 북성(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구성되었다. 성 안에는 각각 궁궐과 관청, 왕족 및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일반민가 등이 있었다. 넓은 의미의 한성은 두 성 바깥의 도시와 왕릉구역인 석촌동고분군 등 인근 지역(일반민가와 농경지, 각종 경제시설)을 모두 포함한다.
백제사람들은 살아서는 풍납토성·몽촌토성·삼성동통성과 그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죽어서는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지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서울 서북쪽 경계 인근 한강변에는 멱절산유적이 있다. 백제 때 한강을 오가는 배들을 굽어보며 감시하던 낮은 야산의 보루 혹은 초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수상교통로로 나뉜다. 백제 한성기의 육상교통로는 고구려 지역과 연결되는 북방교통로와 마한·신라·가야 지역으로 통하는 남방교통로가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였다. 이때 군사들은 주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수상교통로는 강과 작은 하천을 이용하는 내륙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상수로가 있다. 백제의 내륙수로에서는 한강이 가장 중요했으며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한성은 백제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한강 하류의 김포·고양·하남, 상류의 가평·여주·원주 등에는 백제 한성기 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한강 북쪽의 임진강과 한탄강도 백제의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연천 등에서 육계토성·칠중성·강내리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발견되었다.
풍납토성(風納土城)
한국과 중국의 고대 도성은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시대(475BCE~221BCE) 제나라·노나라·조나라 등의 왕성·도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국의 경우에는 평양의 낙랑토성, 고구려 국내성(초기),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 등이 대표적이다.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다.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백제의 첫 왕성(위례성)이자 도성(한성)이다. 풍납토성의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얕은 구릉 너머로 남한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성 안의 면적은 약 878.678㎡이며, 궁궐·도로·우물·창고 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으로 추정되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오래 전에 무너져서 지금은 전체 둘레 3.5㎞ 가운데 2.2㎞만 남아 있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의 성벽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3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증축은 성벽 안쪽만 하고, 바깥쪽은 하지 않았으며, 성벽 쌓는 기술은 지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법(版築法)은 모든 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흙을 쌓는 도중 나뭇가지·나뭇잎 등을 깔아두는 부엽법(敷葉法)은 몇몇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다.
성벽의 안팎에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작은 강돌을 덮었다. 강돌은 처음 성벽을 쌓을 때와 마지막 성벽을 쌓을 때 덮었다. 처음 성벽을 쌓을 때 성벽의 중간 높이까지 강돌을 덮었는데 바깥쪽 성벽의 가장 위쪽 강돌 사이에는 큰 판석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판석 위쪽은 성벽을 가파르게 쌓아 사람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안쪽 성벽의 마지막 성벽 바닥에는 큰 돌을 다듬어 2~3단의 축대를 정연하게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성 밖이 성 안에 비해 4m 이상 낮았다. 성 안쪽에는 좁고 얕은 도랑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토성의 주요 방어시설로는 성벽 외에도 해자·목책·망루·치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은 성벽 안쪽을 완만하게 쌓고 바깥쪽을 가파르게 쌓아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 바깥쪽에 물이 흐르도록 파놓은 해자(垓子)는 매우 넓고 깊어 다리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다.
목책(木柵)은 성벽 바깥쪽 아래에 끝을 날카롭게 깍은 나무기둥을 울타리처럼 땅에 박아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몽촌토성의 성벽 바깥쪽에서 목책이 확인되었으므로 풍납토성에도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는 성벽이 유독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치(雉)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풍납토성에는 망루(望樓)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부소산성 등의 사례를 참조하면, 성벽과 내부의 높은 곳에 망루를 만들어 성 안팎의 상황이나 적의 침입 등을 감시하였을 것이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고 적혀 있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으로 추정되는데, 산줄기가 넓게 퍼져서 지금의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근초고왕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도성방어체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백제 첫 수도인 위례성 남쪽에 새 거처를 마련해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성과 남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도성이 출현하였는데, 바로 한성이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에 비정된다. 백제의 천도 및 멸망으로 원래 이름이 잊혀졌으며 조선시대 성 안에 곰말(꿈말) 곧 몽촌(夢村)이라는 마을이 생겼으므로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의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성벽 길이는 2,285m이고, 내부 면적은 216,000㎡(67,000평)이다.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 바깥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능선 위에 둘레 약 270m의 외성이 위치한다. 토성 바깥으로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흐른 다음, 다시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한강 본류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가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1~2㎞ 거리에 석촌동·가락동·방이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성벽은 자연구릉 가운데 낮은 지점만 흙을 덧쌓아 연결하고 높은 지점은 깎아내리도록 하였다. 성문은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가 발견되었고, 서북쪽과 동북쪽 성벽, 그리고 외성에는 성벽의 바깥쪽 면에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 몽촌토성 내부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터, 움집터, 저장구덩이, 연못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3세기 중후반 이후의 토기류, 칼·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금동제 허리띠 장식, 동전무늬 도기를 비롯한 중국제 청자 등이 있다. 몽촌토성을 쌓고 사용한 시기는 대략 3세기말~5세기말경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3세기말이라는 추정은 성벽의 퇴적토층에서 동전무늬 도기조각이 수습된 점에 근거한 것이어서 재검토 여지가 있다. 일부 유물이 전세품(傳世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몽촌토성이 실제 성으로서 쓰인 것은 4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은 2천년 전부터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첫도읍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이다. 위례성은 나중에 확대·발전하여 한성(漢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 때의 한성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이다. 좁은 의미의 한성은 정궁이 있는 북성(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구성되었다. 성 안에는 각각 궁궐과 관청, 왕족 및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일반민가 등이 있었다. 넓은 의미의 한성은 두 성 바깥의 도시와 왕릉구역인 석촌동고분군 등 인근 지역(일반민가와 농경지, 각종 경제시설)을 모두 포함한다.
백제사람들은 살아서는 풍납토성·몽촌토성·삼성동통성과 그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죽어서는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지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서울 서북쪽 경계 인근 한강변에는 멱절산유적이 있다. 백제 때 한강을 오가는 배들을 굽어보며 감시하던 낮은 야산의 보루 혹은 초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수상교통로로 나뉜다. 백제 한성기의 육상교통로는 고구려 지역과 연결되는 북방교통로와 마한·신라·가야 지역으로 통하는 남방교통로가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였다. 이때 군사들은 주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수상교통로는 강과 작은 하천을 이용하는 내륙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상수로가 있다. 백제의 내륙수로에서는 한강이 가장 중요했으며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한성은 백제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한강 하류의 김포·고양·하남, 상류의 가평·여주·원주 등에는 백제 한성기 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한강 북쪽의 임진강과 한탄강도 백제의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연천 등에서 육계토성·칠중성·강내리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발견되었다.
풍납토성(風納土城)
한국과 중국의 고대 도성은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시대(475BCE~221BCE) 제나라·노나라·조나라 등의 왕성·도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국의 경우에는 평양의 낙랑토성, 고구려 국내성(초기),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 등이 대표적이다.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다.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백제의 첫 왕성(위례성)이자 도성(한성)이다. 풍납토성의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얕은 구릉 너머로 남한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성 안의 면적은 약 878.678㎡이며, 궁궐·도로·우물·창고 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으로 추정되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오래 전에 무너져서 지금은 전체 둘레 3.5㎞ 가운데 2.2㎞만 남아 있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의 성벽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3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증축은 성벽 안쪽만 하고, 바깥쪽은 하지 않았으며, 성벽 쌓는 기술은 지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법(版築法)은 모든 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흙을 쌓는 도중 나뭇가지·나뭇잎 등을 깔아두는 부엽법(敷葉法)은 몇몇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다.
다져넣기 : 판축법(版築法) 판축법은 흙을 시루떡처럼 층층이 다져쌓는 방식을 말한다. 성을 쌓기 전 땅을 고르기 위해 개흙을 대략 50㎝ 두께로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 성분이 많은 진흙을 20㎝ 정도 깔았다. 이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번갈아 두껍게 쌓아가며 사다리꼴의 성벽을 만들었다. 판축법은 하남성의 정주 백가장(白家莊)에서 발견된 상나라(2070BCE~1600BCE) 때의 토성에서 이미 나타난다. 백제는 이 판축법을 왜(일본)로 전하였다. 나뭇잎 깔기 : 부엽법(敷葉法) 나뭇잎 깔기는 성벽이나 제방을 쌓을 때 나뭇잎·나뭇가지·나무껍질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방식이다. 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곳에서 사용하는 기술이며, 지진 등에 잘 견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납토성 일부 구간에서는 개흙을 10㎝ 정도 두께로 쌓은 뒤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을 1㎝ 정도 깔고 다시 개흙을 덮는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한 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안휘성의 안풍당(安豊塘)이라는 한나라 때 저수지 제방에서 발견되었으며, 백제에서는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를 통해 왜(일본)로 전해져 큐슈의 미즈키·키쿠치죠 성벽, 오사카의 카메이·사야마이케 제방 등에 적용되었다. |
성벽의 안팎에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작은 강돌을 덮었다. 강돌은 처음 성벽을 쌓을 때와 마지막 성벽을 쌓을 때 덮었다. 처음 성벽을 쌓을 때 성벽의 중간 높이까지 강돌을 덮었는데 바깥쪽 성벽의 가장 위쪽 강돌 사이에는 큰 판석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판석 위쪽은 성벽을 가파르게 쌓아 사람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안쪽 성벽의 마지막 성벽 바닥에는 큰 돌을 다듬어 2~3단의 축대를 정연하게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성 밖이 성 안에 비해 4m 이상 낮았다. 성 안쪽에는 좁고 얕은 도랑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토성의 주요 방어시설로는 성벽 외에도 해자·목책·망루·치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은 성벽 안쪽을 완만하게 쌓고 바깥쪽을 가파르게 쌓아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 바깥쪽에 물이 흐르도록 파놓은 해자(垓子)는 매우 넓고 깊어 다리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다.
목책(木柵)은 성벽 바깥쪽 아래에 끝을 날카롭게 깍은 나무기둥을 울타리처럼 땅에 박아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몽촌토성의 성벽 바깥쪽에서 목책이 확인되었으므로 풍납토성에도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는 성벽이 유독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치(雉)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풍납토성에는 망루(望樓)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부소산성 등의 사례를 참조하면, 성벽과 내부의 높은 곳에 망루를 만들어 성 안팎의 상황이나 적의 침입 등을 감시하였을 것이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고 적혀 있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으로 추정되는데, 산줄기가 넓게 퍼져서 지금의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근초고왕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도성방어체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백제 첫 수도인 위례성 남쪽에 새 거처를 마련해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성과 남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도성이 출현하였는데, 바로 한성이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에 비정된다. 백제의 천도 및 멸망으로 원래 이름이 잊혀졌으며 조선시대 성 안에 곰말(꿈말) 곧 몽촌(夢村)이라는 마을이 생겼으므로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의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성벽 길이는 2,285m이고, 내부 면적은 216,000㎡(67,000평)이다.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 바깥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능선 위에 둘레 약 270m의 외성이 위치한다. 토성 바깥으로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흐른 다음, 다시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한강 본류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가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1~2㎞ 거리에 석촌동·가락동·방이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성벽은 자연구릉 가운데 낮은 지점만 흙을 덧쌓아 연결하고 높은 지점은 깎아내리도록 하였다. 성문은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가 발견되었고, 서북쪽과 동북쪽 성벽, 그리고 외성에는 성벽의 바깥쪽 면에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 몽촌토성 내부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터, 움집터, 저장구덩이, 연못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3세기 중후반 이후의 토기류, 칼·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금동제 허리띠 장식, 동전무늬 도기를 비롯한 중국제 청자 등이 있다. 몽촌토성을 쌓고 사용한 시기는 대략 3세기말~5세기말경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3세기말이라는 추정은 성벽의 퇴적토층에서 동전무늬 도기조각이 수습된 점에 근거한 것이어서 재검토 여지가 있다. 일부 유물이 전세품(傳世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몽촌토성이 실제 성으로서 쓰인 것은 4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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