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8일 목요일

창작극 가온(Gaon) 관람

어제 저녁엔 정동극장에서 「가온 ― 세상의 시작」을 관람했다(화요일 8시 타임). 대략 65분 10막으로 이어진 줄거리는 간단했다.
봉인을 깨고 부활한 흑마왕이 천계에 침범하여 태상노군(또는 옥황상제·백룡)을 소멸시키고 온누리를 암흑으로 몰아넣는다. 패배에 따른 죄책감과 무기력함에 좌절한 주인공 가온이 여주인공과 세 요정(선녀) 등의 도움으로 영웅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난의 통과의례를 겪고 나서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공연이 끝나고 들춰본 브로슈어의 시놉시스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대 북유럽 전설을 바탕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나 판타지 게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선악 대결의 서사 구조이다. 다만, 이런 줄거리를 판소리의 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측면이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겠다. 나무판넬로 제작한 7개의 미장센과 프로젝트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도 돋보였다. 하지만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한국적 초인의 탄생’이라는 홍보 내용에 선뜻 동의하기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한복 입고, 북 치고 징 울린다고 ‘한국적’일까?
다석 유영모 선생이 사용했던 ‘가온찍기’(자리매김)란 개념이 필요할 듯하다.


당현준 이사장님 덕분에 VIP석에서 편안하게 관람했다. 감사드린다.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비밀의 정원… 후원 탐방

7월 23일 토요일 오후 4시… 옥외회의 일정으로 탐방한 창덕궁 후원…
부용지(芙蓉池) 일원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宙合樓)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열십자(十) 형태의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에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큰 문 한 개와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倚斗閤)과 숙종이 조성한 애련정·애련지(愛蓮池) 사이에 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不老門)이 이채롭다.


창덕궁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는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의 경계 담장에 자란다. 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8m이고 나이는 약 400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가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이에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다. 이 나무는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나이가 많다.


존덕정과 폄우사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纜亭),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砭愚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존덕정 안 북쪽 벽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궐도 존덕정 뒤편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둘레 5m, 높이 22.4m이며 나이는 약 250년에 이른다. 정조가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인 ‘행단(杏壇)’의 예에 따라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을 받들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암 바위를 깎아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고,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산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던 옥류천(玉流川).


현재 궁궐 안 유일의 초가지붕 건물인 작은 청의정(淸漪亭) 옆에 벼가 자라고 있어 새롭다. ‘물놀이’를 뜻하는 의(漪) 자는 처음 접해 본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한 곳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분리하였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창덕궁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


2016년 7월 22일 금요일

영남길 제8길 죽주산성길 안내문

7월 23일(토) 내일은 경기옛길 중 영남길 제8길 죽주산성길을 탐방할 예정으로 공고가 뜨자마자 일찍부터 신청하였으나, 뒤늦게 조합 이사회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하여 경기문화재단의 경기옛길 매니저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예비등록자에게 기회를 주도록 연락하였지만, 아쉬운 마음에 산성탐방 관련 안내판 문구를 가능한한 그대로 옮겨 적는다.


영남길 제8길 죽주산성길
용인의 석천리에서 출발하여 아기자기한 마을길을 지나면 봉황이 비상하는 형세의 아름다운 비봉산 숲길로 진입하게 된다. 비봉산 정상에서 과거 궁예의 배후지였던 죽산의 멋진 풍광을 지나면 죽주산성을 마주하게 된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신라 세력이 내성을 쌓고 고려시대에 외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죽주산성을 내려오면 매산리로 접어드는데 매산리는 과거 죽산 지역으로 다양한 고려 문화자원이 남아 있어 고려문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다.

코스(13㎞, 4시간 30분) : 백암면 석천리 황새울마을 - 비봉산(372m) - 죽주산성 - 매산리 석불입상 - 봉업사 당간지주 - 봉업사지 - 죽산면 소재지


신출귀몰한 장군, 신명(神明) 송문주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후 4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유린하였다. 전란으로 인한 경기 지역의 피해는 매우 극심했는데, 안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듯 몽고의 침입은 참혹했지만 고려의 항쟁도 치열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방호별감을 파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도록 독려하였다. 안성의 죽주산성 전투는 고종 23년(1236) 3차 침입 때의 일이다. 죽주는 개경에서 충주를 거쳐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가 있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다. 최씨 무신정권도 죽주의 중요성 때문에 몽고의 1차 침입 때 박서 장군이 이끌었던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송문주 장군을 파견하였다. 그는 몽고군이 죽주 근처에 이르자 백성들을 죽주산성에 들어가게 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몽고 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쫓아 보냈더니, 다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 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또 인유, 소나무 홰, 쑥풀 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에 끝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몽고의 공격방법을 예측하여 방어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휘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그에 응해야 한다”고 미리 공격계획과 방어방법을 알려주었고 적이 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6, 경기도 기념물 제69호
이 성은 고려시대에 죽주성(竹州城)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다. 죽주는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을 지킨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는 일찍이 귀주성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하였기에, 백성들을 그를 ‘귀신’ 또는 ‘신명’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진을 치기도 하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본성, 외성의 중첩된 성벽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원래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훼손이 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벽의 구조를 통하여 축조된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현재 성의 둘레는 1,688m이고, 높이 2.5m 안팎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성벽의 동쪽 끝에는 포루가 있고, 남쪽 성벽의 양 끝에는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이 남아 있으며, 남문 쪽 성 바깥에는 도랑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성안에는 몽고 침입 때 큰 전과를 올린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방호별감(防護別監) : 고려 시대에, 조정에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지방 요새에 파견하던 벼슬


오누이가 힘겨루기로 쌓은 죽주산성
옛날에 일찍이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다. 두 남매는 성장해 가면서 보통 사람에게 찾아볼 수 없는 비범함을 지니게 되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는 그들을 사람들은 장사 남매라고 불렀다. 남동생이 열여섯 되던 해,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전쟁터로 나갔으나 패하고 도망쳐 왔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누나는 자결을 권했다. 동생은 후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행동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을 위하여 칼을 빼어들었다. 누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대신 내기를 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다. 일주일동안 누나는 죽산에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까지 다녀오는 것이었다.
내기를 시작하고 여섯째 되는 날 누나는 벌써 성을 거의 다 쌓고 서남쪽으로 여섯 자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대을 이을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뜨거눈 팥죽을 쑤어 딸에게 먹여 시간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무더운 여름에 뜨거운 팥죽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성을 쌓는 사이에 동생이 돌아왓고, 내기에 진 누나는 약속대로 자결하엿다. 누나가 자결하자마자 몸에서 세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올랐고 후에 남동생은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한다.


상구산ㆍ하구산ㆍ미륵당ㆍ한평 마을이야기
매산리는 한평, 상구산, 하구산, 미륵당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이 마을들은 한배미, 웃지시미, 아랫지시미, 미륵댕이 등으로 불리웠다. 한평(閑坪) 마을은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는 넓은 들판이 많았다하여 ‘한배미(넓은 논배미)’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구산(九山)마을 또한 농토가 기름져 쌀의 질이 좋았는데 이 때문에 예부터 고을 원님에게 진상을 하였다.
이처럼 귀한 분에게 바치는 쌀을 ‘지성미’라고 하였고 지성미가 나는 곳이라 하여 마을을 지성미라고 부르던 것이 즈승미, 지싱미, 지시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구산마을은 이렇듯 수확량이 많아 부잣집이 많았기 때문에 ‘지시미 논 닷마지기면 얼굴도 안보고 딸을 준다.’는 속담이 있었다. 마을 근처에는 죽수산성이 있어 ‘죽주산성 내 포구를 나이수대로 돌면 무병장수한다.’ ‘죽주산성에서 야생동울을 잡으면 죽거나 동티난다.’는 등 죽주산성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한평마을 위쪽 골짜기에는 삼국시대부터 죽주산성에서 전투를 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묻은 고분군이 있다.


밥에는 바위가 들고 국에는 구렁이가 들었던 제삿밥
미륵당 마을에서는 정성을 담아 차려야하는 제사음식에 대한 이야기 하나가 내려온다. 오래전 매산리에 살았던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볼일을 보고 산잔등을 걸어 돌아도는 길에 날이 저물자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잠자리를 찾던 중 2개의 묘를 발견하고는 그 사이에서 자면 바람을 피할 수 있겠다 싶어 그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잠을 자던 중 묘에서 일어난 부부 귀신의 소리를 듣게 되엇다. “여보 일어나. 제삿밥 먹으러 가야지요. 시간이 됐어요”. 그날이 자신들의 제삿날이었던 부부 귀신은 마을로 내려갔다 오더니 “그놈의 새끼들 세상에 그런 음식을 내다니, 밥에는 바위가 들고 국에는 구렁이가 들었어.”라며 크게 화를 내고 묘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노인은 산소 주인을 찾아가 아들이 불에 데었는지를 확인하였다. 주인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묻자 제삿밥에 돌이 들고 국에는 머리카락이 있어 노한 신이 손자를 화로에 던진 것이라고 어제밤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이에 귀신이 묘로 들어가기 전 알려준 치료법을 일러주었고 이후 제사음식을 만드는데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태평미륵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렸다. 안성 전역에 약 16구의 미륵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이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매산리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미륵은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는 중앙관리들의 출장 시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인 태평원(太平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이 미륵을 보호하고 있는 용화전(龍華殿) 지붕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관할하는 원찰에서나 올릴 수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던 청기와가 두 장 올려져 있었는데, 1930년 경 누군가가 훔쳐갔고 최근에 한 장의 청기와가 다시 올려졌다고 한다. 태평미륵의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다. 이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태평미륵을 찾고 있다. 또한, 미륵불의 돌을 갈아 먹거나 돌을 떼어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미륵불 허리 뛰에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어 기자(祈子)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 石佛立像)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높은 보개는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두 귀는 볼에 밀착시키며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고, 굵은 목에는 번뇌ㆍ업(業)ㆍ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法衣)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아래서 내려오면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 모양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은 충남 논산의 개태사지 불입상(보물 제219호)과 비슷하여 고려 초기 석불양식을 잘 보여준다.

보개(寶蓋) : 불상을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머리 위에 설치하는 것.
미륵부처 : 미륵보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이라는 곳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미륵당 오층석탑 : 향토유적 제20호
미륵당내의 매산리 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화강암 재료의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가 각출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 단층기간은 네 귀에 우주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1석으로 조성된 갑석은 아랫면에 반전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불룩한 낮은 각형의3단 괴임대를 각출했다.
옥신과 옥개는 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1층 옥신에는 양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있으며, 2~4층의 옥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은 4층의 것이 결실되었고, 5층은 옥신ㆍ옥개석이 동일석이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 원호경사가 있으며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옥신괴임은 낮은 1단이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퇴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해 주는 2개의 지주대를 말하며 절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당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이고, 간은 당을 거는 장대로 주로 대나무나 철재로 만든다. 예전에는 목재로 당간지주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는 목재 당간지주는 많지 않다.
죽산리 당간지주는 현재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바로 세워 복원한 것이다. 높이 4.7m, 폭 0.76m, 두께 0.5m로 약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쌍이 서 있는데 돌기둥의 표면이 거칠고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다. 윗부분은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직사각형의 홈이 만들어져 있다. 남쪽의 기둥은 윗부분이 4분의 1정도 깨져 나간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보아 당간지주를 세운 시기는 안성 봉업사지 5층석탑(보물 제435호)과 같은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봉업사 -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모시다
봉업사지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봉업사(奉業寺)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다가 1363년(공민왕12) 청주를 거쳐 올라올 때 이 절에 들러 태조의 어진(초상화)에 인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봉업사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업사지는 오랫동안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오다가 1966년 경지정리 작업 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로 밝혀졌다. 이후 경기도박물관의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화차사(華次寺)’가 고려시대의 봉업사로 변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청주호족 능달이 관여하였고 고려 광종 때인 963년과 967년에 중창되어 크게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1530년 문헌에 의하면 이때에 봉업사는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봉업사가 사라진 터에는 그때의 영광을 그려볼 수 있는 보물 제435호 봉업사지 5층석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8호 봉업사지 3층석탑, 제89호 봉업사지 당간지주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또한 봉업사지 인근에는 칠장사, 관음당의 장명사지, 미륵당의 매산리사지 등이 남아있어 죽산지역의 불교문화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이사하는 날

대학로 엘림홀에서 병민이네 가족의 이사를 소재로 하여 3막으로 제작된 1시간짜리 짧은 연극을 관람했다. 「이사하는 날」은 16년의 시간차를 두고 현재-과거-현재의 역순행적 구성을 통해 병민이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사를 보여주는데… 제작진·출연진의 선량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극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는 듯이 보였다. “치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한다는 중앙치매센터의 기획의도는 오히려 비문해 여성노인의 문제라는 전체적인 틀에 끼워 맞춰진 전개였고, 결말도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됐다. 문득 「엄마를 부탁해」의 박소녀 할머니가 떠올랐다.


국평원에서 30명 티오가 나왔고, 세찬 장마빗줄기에도 28인의 한여연 식구들이 대학로까지 출동하여 단체관람… 차시 수업에 적절한 피드백이 진행되면 좋을 것이다.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구가, 저가

왕의 지배를 받는 백성인 신민(臣民)에게는 의무만 있지 권리는 없다.
국가 구성원을 뜻하는 일반적인 말은 국민(國民)이다. 대개 법적·정치적 의미로 쓰인다.
공민(公民)은 정치 참여 자격을 가진 국민으로 공민권은 참정권을 가르킨다.
시민(市民)은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공의 정책 결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이름이다.
대중(大衆)은 다수(多數)라는 뉘앙스이다.
민중(民衆)은 인민(人民)과 유사한 개념으로 김수영 시인의 ‘풀’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너희들이 먹고 싸고 자고 입고 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다 나 같은 사람이 너희들에게 동정심으로 베푼 거라고!”

어제밤에 OCN 금토드라마 「38사기동대」 보는데… 방필규 대사가 참 끝내주더군.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해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엊그제 이 나라 공교육 시스템의 최상층부 인사가 내뱉었던 말과 판박이어서 더욱 놀랐지.
나 씨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민중을 구가(狗加), 저가(豬加)로 대우해 주니 황송해해야 하나, 아니면 근대의 차티스트(Chartist) 운동이라도 재현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