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토요일 오후 4시… 옥외회의 일정으로 탐방한 창덕궁 후원…
부용지(芙蓉池) 일원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宙合樓)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열십자(十) 형태의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에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큰 문 한 개와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倚斗閤)과 숙종이 조성한 애련정·애련지(愛蓮池) 사이에 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不老門)이 이채롭다.
창덕궁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는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의 경계 담장에 자란다. 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8m이고 나이는 약 400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가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이에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다. 이 나무는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나이가 많다.
존덕정과 폄우사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纜亭),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砭愚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존덕정 안 북쪽 벽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궐도 존덕정 뒤편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둘레 5m, 높이 22.4m이며 나이는 약 250년에 이른다. 정조가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인 ‘행단(杏壇)’의 예에 따라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을 받들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암 바위를 깎아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고,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산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던 옥류천(玉流川).
현재 궁궐 안 유일의 초가지붕 건물인 작은 청의정(淸漪亭) 옆에 벼가 자라고 있어 새롭다. ‘물놀이’를 뜻하는 의(漪) 자는 처음 접해 본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한 곳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분리하였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창덕궁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
부용지(芙蓉池) 일원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宙合樓)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열십자(十) 형태의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에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큰 문 한 개와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倚斗閤)과 숙종이 조성한 애련정·애련지(愛蓮池) 사이에 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不老門)이 이채롭다.
창덕궁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는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의 경계 담장에 자란다. 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8m이고 나이는 약 400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가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이에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다. 이 나무는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나이가 많다.
존덕정과 폄우사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纜亭),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砭愚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존덕정 안 북쪽 벽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궐도 존덕정 뒤편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둘레 5m, 높이 22.4m이며 나이는 약 250년에 이른다. 정조가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인 ‘행단(杏壇)’의 예에 따라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을 받들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암 바위를 깎아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고,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산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던 옥류천(玉流川).
현재 궁궐 안 유일의 초가지붕 건물인 작은 청의정(淸漪亭) 옆에 벼가 자라고 있어 새롭다. ‘물놀이’를 뜻하는 의(漪) 자는 처음 접해 본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한 곳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분리하였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창덕궁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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