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9일 금요일

문제가 문제

요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한심함과 비열함을 보여주는 바로 그 문제…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 세계 지리 8번 문제다.
우리 학생들 중에도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A는 EU 유럽연합이고, B는 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이다.
이건 2013년 현재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 과목에도 나오는 내용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1986년부터 진행되었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미국은 자국의 선진기술과 멕시코의 저임금을 결합시켜 국제경쟁력을 회복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무역적자 현상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1988년에 이미 FTA를 체결했던 캐나다까지 끌어들여 1992년 12월 17일 세계적인 단일시장인 NAFTA를 형성하였다.
멕시코는 1983년부터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수출주도형 발전모델에 필요한 외국자본의 투자효과를 기대하며 NAFTA에 합류했으니… ㉠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맞는 문장이다.

EU는 이미 EEC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amic Community) 시절부터 회원국 역내의 관세와 수량제한 등 보호주의 장벽를 철폐하고 역외 공동관세를 추진해왔다. 자유무역협정 FTA는 역내관세는 철폐하지만, 역외 공동관세는 부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 ㉣ 모두 틀린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A와 B 중에서 어느쪽 총생산액이 더 큰가를 따지는 ㉢만 남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몇년 전만 해도 EU 쪽의 생산액 규모가 NAFTA보다 컷었는데, 2010년 이후에는 그것이 역전되었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교과서나 EBS 교재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더더구나 지도의 우측 하단에 2012라고 연도까지 표기해 놓았으니 이는 빼도 박도 못하는 외통수가 되어 평가원의 입장을 뭉개버렸다.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2012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EU의 총생산액은 17조 730억 1천 100만 달러이고, NAFTA는 18조 6천 220억 9천 200만 달러이기 때문에 ㉢은 옳은 문항이 될 수 없다.
종합하면 맞는 항목은 ㉠ 하나 뿐이므로 이 문제는 정답이 없는 것이 된다.

오늘 38명의 수험생들이 이 세계지리 8번 문항은 오류이므로 ‘정답없음’ 처리가 돼야 한다면서 서울행정법원에 집단소송을 냈다고 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과서에 충실한 다수의 상위권 학생들은 ②번 정답을 맞혔다면서 수험생들의 요구를 거부해왔고 이제 그 후폭풍을 얻어맞게 된 것이다. 잘못된 교과서 내용을 답지로 선택하는 것이 우수학생의 개념일까.
이의를 제기한 교사에게는 출제관계자가 게시물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도 보이고 도대체 뭐하자는 것이냐.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빼빼로 감성마케팅

감성경영(Emotional Management)이란 말 그대로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감성리더십에 의한 경영이다. 또한 감성지능(EI; Emotional Intelligence)이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타인과 좋은 관계(Relationship)를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1’자 4개가 겹치는 11월 11일이 중국에서는 독신절(광곤절; 光棍節)이라지.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지는 계절… 감성을 이용한 뻔한 상술이 감성마케팅으로 포장되어도 우리는 속절없이 빼빼로를 주고받는다.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동짓달 씨순길… 창의문 인왕산길

11월 2일 오전 10시. 씨알순례자들은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 집결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가 사대부들의 둥지였던 북촌이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는 역관·의관 등 중인들의 삶터인 서촌이었다고 하는데, 11월 씨순길은 창의문을 지나 윤동주문학관을 거쳐 인왕산 정상까지 걸어보고 하산길에 경교장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3번 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1020번(또는 7022번) 녹색 지선버스를 타고 창의문 고갯마루에서 내렸는데 이곳이 부암동이다. 세검정쪽 길가에 약 2m 높이의 구멍이 숭숭 뚫린 부침바위가 있었다는데,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아기를 낳는다는 전설이 내려왔기에 수많은 아낙네들이 성심으로 돌을 붙여놓고 기원을 드렸다고 해서 붙임 부(付), 바위 암(岩)자를 써서 부암동(付岩洞)이라는 동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 건립되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해 한양 둘레에 성곽을 쌓는 작업에 착수했다.
서울성곽(Fortress wall of Seoul)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쌓는다는 정도전의 계획에 따라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이어 축조한 성곽으로 총 59,500자(약 18.2㎞)에 이르는 방대한 길이를 자랑하며, 태조 5년(1396)에 도성 방어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사대문(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과 사소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의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석성으로 고쳐 완공하였는데, 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고 한다. 중세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당시 한양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성곽이 도성의 방어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으나, 별 성과도 없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고 만다. 청나라와의 삼전도 맹약 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여 있다가 숙종 30년(1704)에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 체제를 다시금 정비하였다.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1899년에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1900년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에 전차 부설을 위해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일제강점기에는 서대문과 동소문(혜화문)이 철거되면서 평지 성곽은 모두 훼손되고 산지 성곽 10.5㎞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사적 제10호로 지정된 서울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2014년을 목표로 현재 복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사대문의 보조 역할을 하던 사소문 4개 중 도성 동북쪽에는 홍화문(→혜화문), 동남에는 광희문, 서남은 소덕문(→소의문), 서북에는 창의문을 두었는데 소의문을 제외하고 모두 남아 사적 10호로 관리되고 있다. 이중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밝을 창(彰)자와 옳을 의(義)자를 쓰는 창의문(彰義門)은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한양의 서쪽 인왕산의 해질녘 자주빛 노을이 번지는 자하골에 있다는 의미에서 자주빛 자(紫), 노을 하(霞)자를 쓰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고, 여기에서 지금의 자하문 터널과 자하문길의 이름이 생겨났다.
태종 13년(1413)에 풍수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문을 열어 놓으면 왕기가 빠져 나간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군사적·토목적 목적으로 간간이 출입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문을 폐쇄하고 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광해군 15년(1623)에 홍제원에 집결한 능양군 이종의 반정군이 창의문을 부수고 궁내로 진격하여 정권을 탈취했는데 현판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들 이름이 남아 있다.
영조 17년(1741) 문루를 축조하고 성문을 개수한 창의문이 현재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도성 성문이다. 연잎 모양으로 맵시있게 조각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돼 있다.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다하여 그 천적인 닭 한쌍을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천장에 그려넣었다.
박목월이 읊은 것처럼 구름 도는 머언 자하산 청운사의 낡은 기와집 느릅나무 아래 맑은 눈의 청노루가 당장이라도 문 옆으로 뛰어나올 듯하다.


창의문을 통과하여 우편의 찻길 건너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있던 청운소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건립한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채, 열린 우물, 닫힌 우물 등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닫힌 우물 전시장에서는 시인에 대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파란 녹이 낀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다가 늙은 교수의 강의나 들으러 다니면서 쉽게 씌어지는 한 줄 시가 부끄러웠던 슬픈 천명(天命)의 시인이 가엾어지고 그리워진다.
밤이면 벽과 천정이 하얀 좁은 방에 돌아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쉬이 올 아침을 기다리며 홀로 침전하는 시인이 무엇인지 그리워 부끄러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을 시인의 언덕 위로 아슬히 멀듯이 살구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치고 쓸쓸한 바람이 일고 가슴 앓는 아가씨가 지나고 는개비가 속살거리고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뚝뚝 떨어지고 벌레가 울고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비속에 젖은 순례자가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참다 고개를 넘어서 숲으로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동경과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병 없는 젊은이의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자랑처럼 봄이 마련되고 꽃이 피리라.


윤동주문학관 위편의 나무계단을 지나 1시간쯤 걸어 오르면 인왕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비 갠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우람한 인왕산의 모습을 표현한 진경화가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눈 앞에 대하는 듯한 풍광을 기대했지만, 갤 제(霽)와 빛 색(色)의 제색(霽色)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린 늦가을비로 인해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이재섭 선생님은 이런 류의 비를 ‘늘어진 안개’라는 의미의 ‘는개’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길쭉하게 늘어지면서 비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중종과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애처롭다.



새 수도가 한양으로 낙점된 이후 주산(主山)을 어디로 할 것인가, 즉 좌향을 결정할 단계에서 왕사 무학과 실세 삼봉 사이에 위치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정동(正東)을 향하는 궁궐을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은 이른바 ‘전조후시 좌묘우사 제왕남면 천자구궤 제후칠궤’의 중국식 도성 조영 원칙을 들어 군주는 남면(南面)하여 정사를 보아야한다면서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아 결국 풍수상 불을 상징하는 관악산을 향하는 궁궐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또한 인왕산을 성벽 경계에 넣자는 무학대사의 제안을 반박하고 인왕산을 성 바깥으로 정리했다. 고깔과 장삼을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인왕산의 선(禪)바위가 도성 안에 있으면 불교가 흥하는 반면 유교는 힘을 못쓰게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결국 왕사의 예언대로 경복궁은 1592년(임진왜란)에 화마를 겪게 된다.


인왕산 정상에서부터 서울시교육청을 경유하여 경교장까지 이어지는 성곽길은 공원화되어 걷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경교장은 1949년 백범 서거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쓰였고, 한국전쟁 때에는 미군특수부대 시설로, 휴전 후에는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현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서 인수하여 40년 넘게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외관을 제외한 내부 벽체나 창호 등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보존의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이러한 국민적 공감을 토대로 결국 2005년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고, 2009년 서울시와 소유주인 삼성생명(강북삼성병원)이 합의하여 건축 당시의 설계도면과 임시정부 사용 당시의 사진자료를 바탕하여 원형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건물이 복원되어 2013년 3월 2일 개관하였다.



김세연이 설계한 금광업자 최창학의 양옥주택(죽첨장)은 광복 후 백범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 및 활동공간으로 사용되면서 근처 개울에 있던 경교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장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연출되어, 1930년대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경교장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수차례 국무회의가 개최되면서 사실상 청사로 사용된 곳이다. 또한 백범 김구가 3년 7개월간(1945.11.23~1949.6.26) 머물면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백범을 향했던 총탄의 자국은 그날의 모습 그대로 2층 침실 창유리에 남아있다. 지하전시실에는 저격을 받아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피묻은 저고리와 바지, 서거 당일 조각가 박승구가 뜬 데드마스크(Death Mask), 백범이 서명하여 매우사 신부에게 건네준 태극기 등 귀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지난 9월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가 공동으로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1차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잘못 서술되거나 심각하게 편파적으로 해석한 대목이 대략 간추린 것만 해도 298건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다룬 5단원 전체 68쪽에서는 무려 11쪽에 걸쳐 이승만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승만의 이름은 42회 등장하고 사진은 5장이나 실려 있다고. 이에 반해 안중근에 대한 설명은 딱 한 줄이고, 김구 사진도 딱 1장에 불과하며 윤봉길의 사진은 아예 없고, 안창호는 본문에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 이후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글과 우리 이름과 우리 종교와 문화는 거의 되찾았지만 유일하게도 역사 분야만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정신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는다.”는 단재 선생의 말씀을 새겨보는 씨순길이었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웃음운동

31차 평생교육사 목요스터디는 웃음운동학 이영남 선생님의 웃음운동 시간으로 채워짐.
‘웃음’이란 안면근육(15개)을 함께 움직여서 일정한 표정을 짓는 반응으로써 즐거울 때, 기쁠 때, 주위환경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소 또는 소리내어 웃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laugh와 smile은 아무래도 좀 차이가 있을 거 같다.
웃음운동이라고 하기에 처음엔 movement나 campaign으로 생각했는데 겪어보니 exercise의 의미로 일종의 웃음훈련법이었다.


웃음운동은 직접 체험하는 실습을 통해 혈액순환이 활발하게 개선되어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함께 웃고 운동하는 신바람 나는 웃음운동레크레이션을 하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과 화합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며, 웃음운동 후 엔돌핀, 다이돌핀 등 유익한 호르몬이 생성되는 잇점이 있다고.
결론은 웃음이 최고의 운동이라는 얘긴데… 웃음에도 정기적인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노랑색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이영남 선생님에 의하면 웃음운동은 ‘개그’가 아니라 ‘교육’이며 ‘유비쿼터스, 당연한 일, 직업, 성형, 행복, 비교, 차별과 무관’한 성격을 갖는다.


“여봐라~~ 가소롭구나~”를 외치며 칼을 뽑아드는 액션을 취하는 장군웃음은 발성이 만만치가 않았다. 사극 출연하는 배우들, 연기 못한다고 욕하지 말아야지.
기마자세로 혀를 길게 내밀고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치는 사자웃음, 한호흡으로 허리를 뒤로 꺽으며 15초 정도를 시행해야 하는 한호흡웃음 등등 작은 웃음 동작보다는 큰 웃음 동작 몇가지가 흥겨웠다.



양 주먹을 위 아래로 한번씩 쳐주고(2박자), 양 엄지와 검지 사이를 교차로 찍어주고(2박자), 박수 2번 치고(2박자), 깍지 낀 손바닥을 파트너와 마주 부딪히는(2박자) 동작을 반복하는 ‘예포이 타이타이’와 자기 손바닥과 옆사람 손바닥을 각기 4박자/2박자/1박자로 쳐주고 어깨를 주물러 주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율동도 즐거웠다.



어떻게 해야 웃음이 많아질 수 있을까나. 어깨를 펴고 크게 웃어본 날이 얼마나 될까.
좋은 일이 있으면 웃게 되는가, 웃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인가.
불안과 불만이 많아질수록 웃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터인데, 요즘 내게는 쓴웃음 내지는 헛웃음만 늘었다.
억지웃음이라도 웃는 게 좋은 걸까. 소중한 90분 강의가 말짱 도루묵이군.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타임벨 PW-9242V 매뉴얼

시보기 PW-9242V : 타종시간 변경방법

DAY
DAWN
UP
MEMOR
/ PLAY
CLEAR
/ EXIT
CHANNE
/ WEEK
MELOD
/ VOICE
DAWN
UP
1
2
4
8
TIME
CH1
CH2
CH3
CH4

① TIME DOWN, UP 버튼을 눌러 시간을 설정한다. (기억시킬 시간를 맞춤)
② MELODY / VOICE 버튼을 눌러 MEL 표시등이 켜진 후 MEL. NO 버튼으로 멜로디 번호을 선택하고  CHANNEL / WEEK 버튼을 누른 후 (이때 MEMORY / PLAY 버튼을  3초 이상 누르면 멜로디 재생) MEMORY / PLAY (짧게 누름) 버튼으로 기억을 시킨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다음 시간을 계속 기억을 시키면 된다.
    완료 후 CLEAR / EXIT 버튼을 3초 이상 누르면 현재시간 표시상태로 돌아온다.
③ 한주간의 시간이 같은면 CHANNEL / WEEK 버튼을 짧게 누른고 MEMORY / PLAY 버튼으로 기억시킨다.
    (주간 기억이 완료되면 시간표시등에 SET 가 표시된다.)

< 기억된 내용 확인하는 방법 >
CHANNEL / WEEK 버튼을 눌러 주간확인 상태을 설정한 후 CHANNEL / WEEK 버튼을 다시 누른다.

< 기억된 내용 삭제하는 방법 >
① 삭제할 요일과 시간을 설정한 후 CLEAR / EXIT 버튼을 누른다.
② 일괄삭제 : CHANNEL / WEEK 버튼을 누르고 CLEAR / EXIT 버튼을 누른다.

< 현재시간 맞추는 방법 >
① TIME DOWN, UP 버튼를 눌러서 현재시간을 맞춘다.
② MEMORY / PLAY 를 짧게(1초) 한번 누르면 된다.

< DATA 손실 방지 >
① 입력방지 상태 : DAY UP / TIME UP 버튼을 동시에 누른다. (Prot on 표시)
② 입력방지 상태해제 : DAY DOWN / TIME DOWN 버튼을 동시에(3초 이상) 누른다. (Prot of 표시)

< 마무리 작업 > (멜로디 기억시간에 따라 동작시키는 방법)
멜로디 기억이 완료되었다면 전면에서 OUTPUT(음성출력) 버튼을 항상 눌러(ON)준다.
- 이는 기억된 시간에 따라 멜로디를 자동으로 송출시키는 방법이다.

 

2013년 11월 1일 금요일

현 시국에서 꼭 봐야할 영화 「All the President’s Men」

1972년 6월 17일 미국의 37대 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재선운동에 나섰을 당시, 그의 추종자들은 닉슨의 확실한 재선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5인조를 동원하여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선거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경찰에게 발각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이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의 시작이다.
닉슨 행정부와 공화당은 자기들과는 무관하다고 발뺌했고, 결국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내부고발자(딥 스로트 Deep Throat)에 의해 사건의 꼬리가 잡히게 되자 닉슨은 아치발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법무장관을 해임해버리고, 장관직무대행이 특별검사를 해임하는 이른바 ‘토요일밤의 학살’을 야기한다.
신변의 위협 속에서도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두 기자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건의 배후에 백악관과 법무장관, CIA, FBI, 검찰 등 정보기관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선거방해와 흑색선전(쥐잡기), 권력남용, 의회모독 등으로 대통령의 핵심참모들을 포함한 43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닉슨 본인도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 탄핵 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닉슨은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고 주장했고, 사임 상황에서도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다.
어떤가. 원세훈의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수사 방해 및 윤석열 수사팀의 해체 시국… All the President’s Men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아닌가. 일대 일로 매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왠지 40년 전 미국의 상황과 데자뷰라는 생각이 든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1976년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는 오랫동안 금기시된 영화였다고 한다. 하기사 최근 정지영 감독의 「천안함 프로젝트」도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았나.(우리 해군 47인의 안타까운 희생과 북한소행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는 밥과 칼 두 기자의 역할은 젊은날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불굴의 사람들 덕분에 진실이 알려진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과 기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ㅋㅋ 이렇듯 소심하게 지껄이는 것도 내 방식의 문체반정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