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동짓달 씨순길… 창의문 인왕산길

11월 2일 오전 10시. 씨알순례자들은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 집결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가 사대부들의 둥지였던 북촌이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는 역관·의관 등 중인들의 삶터인 서촌이었다고 하는데, 11월 씨순길은 창의문을 지나 윤동주문학관을 거쳐 인왕산 정상까지 걸어보고 하산길에 경교장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3번 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1020번(또는 7022번) 녹색 지선버스를 타고 창의문 고갯마루에서 내렸는데 이곳이 부암동이다. 세검정쪽 길가에 약 2m 높이의 구멍이 숭숭 뚫린 부침바위가 있었다는데,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아기를 낳는다는 전설이 내려왔기에 수많은 아낙네들이 성심으로 돌을 붙여놓고 기원을 드렸다고 해서 붙임 부(付), 바위 암(岩)자를 써서 부암동(付岩洞)이라는 동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 건립되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해 한양 둘레에 성곽을 쌓는 작업에 착수했다.
서울성곽(Fortress wall of Seoul)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쌓는다는 정도전의 계획에 따라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이어 축조한 성곽으로 총 59,500자(약 18.2㎞)에 이르는 방대한 길이를 자랑하며, 태조 5년(1396)에 도성 방어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사대문(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과 사소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의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석성으로 고쳐 완공하였는데, 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고 한다. 중세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당시 한양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성곽이 도성의 방어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으나, 별 성과도 없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고 만다. 청나라와의 삼전도 맹약 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여 있다가 숙종 30년(1704)에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 체제를 다시금 정비하였다.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1899년에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1900년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에 전차 부설을 위해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일제강점기에는 서대문과 동소문(혜화문)이 철거되면서 평지 성곽은 모두 훼손되고 산지 성곽 10.5㎞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사적 제10호로 지정된 서울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2014년을 목표로 현재 복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사대문의 보조 역할을 하던 사소문 4개 중 도성 동북쪽에는 홍화문(→혜화문), 동남에는 광희문, 서남은 소덕문(→소의문), 서북에는 창의문을 두었는데 소의문을 제외하고 모두 남아 사적 10호로 관리되고 있다. 이중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밝을 창(彰)자와 옳을 의(義)자를 쓰는 창의문(彰義門)은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한양의 서쪽 인왕산의 해질녘 자주빛 노을이 번지는 자하골에 있다는 의미에서 자주빛 자(紫), 노을 하(霞)자를 쓰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고, 여기에서 지금의 자하문 터널과 자하문길의 이름이 생겨났다.
태종 13년(1413)에 풍수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문을 열어 놓으면 왕기가 빠져 나간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군사적·토목적 목적으로 간간이 출입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문을 폐쇄하고 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광해군 15년(1623)에 홍제원에 집결한 능양군 이종의 반정군이 창의문을 부수고 궁내로 진격하여 정권을 탈취했는데 현판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들 이름이 남아 있다.
영조 17년(1741) 문루를 축조하고 성문을 개수한 창의문이 현재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도성 성문이다. 연잎 모양으로 맵시있게 조각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돼 있다.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다하여 그 천적인 닭 한쌍을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천장에 그려넣었다.
박목월이 읊은 것처럼 구름 도는 머언 자하산 청운사의 낡은 기와집 느릅나무 아래 맑은 눈의 청노루가 당장이라도 문 옆으로 뛰어나올 듯하다.


창의문을 통과하여 우편의 찻길 건너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있던 청운소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건립한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채, 열린 우물, 닫힌 우물 등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닫힌 우물 전시장에서는 시인에 대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파란 녹이 낀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다가 늙은 교수의 강의나 들으러 다니면서 쉽게 씌어지는 한 줄 시가 부끄러웠던 슬픈 천명(天命)의 시인이 가엾어지고 그리워진다.
밤이면 벽과 천정이 하얀 좁은 방에 돌아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쉬이 올 아침을 기다리며 홀로 침전하는 시인이 무엇인지 그리워 부끄러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을 시인의 언덕 위로 아슬히 멀듯이 살구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치고 쓸쓸한 바람이 일고 가슴 앓는 아가씨가 지나고 는개비가 속살거리고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뚝뚝 떨어지고 벌레가 울고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비속에 젖은 순례자가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참다 고개를 넘어서 숲으로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동경과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병 없는 젊은이의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자랑처럼 봄이 마련되고 꽃이 피리라.


윤동주문학관 위편의 나무계단을 지나 1시간쯤 걸어 오르면 인왕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비 갠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우람한 인왕산의 모습을 표현한 진경화가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눈 앞에 대하는 듯한 풍광을 기대했지만, 갤 제(霽)와 빛 색(色)의 제색(霽色)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린 늦가을비로 인해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이재섭 선생님은 이런 류의 비를 ‘늘어진 안개’라는 의미의 ‘는개’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길쭉하게 늘어지면서 비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중종과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애처롭다.



새 수도가 한양으로 낙점된 이후 주산(主山)을 어디로 할 것인가, 즉 좌향을 결정할 단계에서 왕사 무학과 실세 삼봉 사이에 위치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정동(正東)을 향하는 궁궐을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은 이른바 ‘전조후시 좌묘우사 제왕남면 천자구궤 제후칠궤’의 중국식 도성 조영 원칙을 들어 군주는 남면(南面)하여 정사를 보아야한다면서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아 결국 풍수상 불을 상징하는 관악산을 향하는 궁궐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또한 인왕산을 성벽 경계에 넣자는 무학대사의 제안을 반박하고 인왕산을 성 바깥으로 정리했다. 고깔과 장삼을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인왕산의 선(禪)바위가 도성 안에 있으면 불교가 흥하는 반면 유교는 힘을 못쓰게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결국 왕사의 예언대로 경복궁은 1592년(임진왜란)에 화마를 겪게 된다.


인왕산 정상에서부터 서울시교육청을 경유하여 경교장까지 이어지는 성곽길은 공원화되어 걷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경교장은 1949년 백범 서거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쓰였고, 한국전쟁 때에는 미군특수부대 시설로, 휴전 후에는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현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서 인수하여 40년 넘게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외관을 제외한 내부 벽체나 창호 등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보존의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이러한 국민적 공감을 토대로 결국 2005년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고, 2009년 서울시와 소유주인 삼성생명(강북삼성병원)이 합의하여 건축 당시의 설계도면과 임시정부 사용 당시의 사진자료를 바탕하여 원형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건물이 복원되어 2013년 3월 2일 개관하였다.



김세연이 설계한 금광업자 최창학의 양옥주택(죽첨장)은 광복 후 백범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 및 활동공간으로 사용되면서 근처 개울에 있던 경교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장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연출되어, 1930년대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경교장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수차례 국무회의가 개최되면서 사실상 청사로 사용된 곳이다. 또한 백범 김구가 3년 7개월간(1945.11.23~1949.6.26) 머물면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백범을 향했던 총탄의 자국은 그날의 모습 그대로 2층 침실 창유리에 남아있다. 지하전시실에는 저격을 받아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피묻은 저고리와 바지, 서거 당일 조각가 박승구가 뜬 데드마스크(Death Mask), 백범이 서명하여 매우사 신부에게 건네준 태극기 등 귀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지난 9월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가 공동으로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1차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잘못 서술되거나 심각하게 편파적으로 해석한 대목이 대략 간추린 것만 해도 298건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다룬 5단원 전체 68쪽에서는 무려 11쪽에 걸쳐 이승만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승만의 이름은 42회 등장하고 사진은 5장이나 실려 있다고. 이에 반해 안중근에 대한 설명은 딱 한 줄이고, 김구 사진도 딱 1장에 불과하며 윤봉길의 사진은 아예 없고, 안창호는 본문에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 이후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글과 우리 이름과 우리 종교와 문화는 거의 되찾았지만 유일하게도 역사 분야만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정신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는다.”는 단재 선생의 말씀을 새겨보는 씨순길이었다.

댓글 1개:

  1. 인왕산 정상에서의 단체샷은 최명철, 김승주 선생님의 사진입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