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9일 금요일

청포도가 익어가듯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육사 이원록(1904.5.18~1944.1.16)은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의 여섯형제(원기·원록·원일·원조·원창·원홍) 중 둘째로, 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의사는 대구감옥 수인번호 264를 마음에 새겨 일제에 강점당한 비통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의 죽일육 역사사, 육사(戮史)를 필명으로 썼다. 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뜻이 위험하다는 친척 어른의 제안에 따라 뭍육 육사(陸史)로 바꾸었다. 의열단원 석정 윤세주로부터 가입을 권유받고 대일항쟁 최전선인 만주벌을 누비며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 피체된 후 북경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어제는 은빛신문 코디를 마치고, 문화공간이육사 앞 264예술공원으로 향했다. 육사는 1939년 성북구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해 3년간 머물면서 청포도, 횡액, 절정, 교목 등의 시를 썼다. ‘이육사 탄생 119주년 기념문화제’ 펼침막의 “푸른 하늘에 다을드시”는 「교목」의 첫 구절이다. 세월에 불타고, 낡은 거미집을 휘두르고,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도 우뚝 남아 선 교목(喬木)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암담한 시대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화자의 단호한 저항의지를 상징한다.

가랑비가 흩뿌리는 중에도 문화제에는 녹색풍선을 띄우고, 청포도 알사탕과 녹색 종이모자가 구비됐다. 개회 시점(2시30분)에 대략 70명의 참가자가 보였는데, 정·관계 인사와 기념관·공연 관계자가 50명 다수를 점하고, 지역민은 10여 명이다. 1941년,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하숙했던 윤동주에 대해 종로구와 지역주민·관광객이 갖는 진한 애정, 뜨거운 관심과 대조적이어서 서늘한 감정이 든다. 폴리티션 옆자리에 앉은 이옥비(李沃非) 외동따님이 세월처럼 안쓰럽다.

지나가던 중년의 한마디가 들려온다. “어이구, 날을 잡아도 이런 날을 잡아가지고…” 생일날 생일잔치 여는 게 잘못된 일인가? 연관 조직의 지속적인 대중강연과 홍보 미비, 지역민의 역사의식 부재는 여지없다. 조국독립을 위해 한평생 초인(超人)적인 삶을 살다 가신 순국지사에 대한 예우가 이리도 박하다…… 이러매도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 청포선비의 매화향기는 고고하기만 하다. 

[상]이육사 탄생 119주년 기념문화제가 열린 성북구 종암동의 264예술공원.  [하]청포도 시비. 육사는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일본도 곧 끝장난다”고 말했다.

2019년 12월에 개관한 문화공간이육사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지난해와 같이 이번 오월에도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에서 준비한 광주순례에 함께했다. 이 청년조직은 다수의 2030과는 달리 ‘민족’을 얘기한다.
순례단은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금남로와 광산동 옛 전남도청사를 차례로 돌아보면서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들풀의 생명력을 쓰다듬으며 먼저 울고 간 영혼들을 어루만졌다. 무명지 자른 안중근의 수결(手決)이 새겨진 흰 셔츠가 이리도 벅차던가.
「님을 위한 행진곡」에는 내 이름이 있다. 당신 이름도 있다. 산 자…



「택시운전사」의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2016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모발과 손톱 등 유해의 일부는 “광주에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항아리에 담겨 그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5.18 구묘역 입구에 안치됐다.



2023년 5월 17일 수요일

그 푸른 계절에 떠났지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의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원 한 사람이 교육관 옥상에 올랐다. 김제 출신의 서울대생 조성만(요셉)이었다. 전주 해성고 시절 중앙성당에서 문정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영원한 우방인 줄만 알았던 미국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후에 있었다는 견해가 대두하던 무렵, 대학 언더서클에서 만난 김세진의 분신 죽음을 목도한 24살 청년은 조국의 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은 예수승천대축일을 기해 유가협·민가협의 양심수 석방운동과 본당 청년들의 마구달리기 발대식 등으로 떠들썩했다. 오후 3시30분, 조성만은 준비한 자필유서를 뿌리고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자신의 배를 찌른 후 긴 그림자를 남기며 12m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저녁 7시20분경 세상을 떠났다.

일요일엔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참배한 후 어제는 35주기 추모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왔다. 관할 주교나 본당 신부의 재가가 있었기에 미사가 봉헌되는 것이렷다. 하지만 명동성당 역사관에 조성만 요셉 형제의 이름은 없다. 2018년 교황청이 국제순례지로 승인했다는 천주교 서울순례길은 물론이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소문순례길, 중구에서 운영하는 명동역사문화투어에서도 해설사는 조성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명동 일대 답사를 진행하게 되면 내가 얘기해보련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

1988년 조성만(요셉) 형제의 장례미사는 명동성당에서 봉헌되지 못했다. 가톨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 대해 공식적인 추모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죽음은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사람이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