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6일 화요일

망우리 사잇길 걷기

10월 2일(화) 오전에도 나홀로 트레킹… 제46차 트레킹이다.
경의중앙선 양원역 2번출구로 나와 왼편에 중랑캠핑숲을 두고 망우로 87길을 걷다가 동부제일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망우리 공원 축구장 옆에 13도 창의군탑이 있다.


창의문(彰義門)의 창의(彰義)는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뜻이고, 창의군(倡義軍)의 창의(倡義)는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말 그대로 대한제국 13개 도의 의병 1만여 명이 결진한 항일의병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합 의병군이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3도 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곳 망우리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1991년 동아일보가 망우리공원 입구에 13도 창의군탑을 건립하였다.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해발 282m의 망우산(忘憂山) 정상까지 올라가봤다. 망우산은 서울시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다.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서오릉 역사문화트레킹

10월 9일 화요일 한글날 오후, 나홀로 떠나는 47차 역사문화트레킹의 탐방지는 고양시 덕양구의 서오릉이다.
3호선 홍제역 2번출구로 나와 중앙차로 버스정류장(13029)에서 702A 버스를 타고 서오릉입구(35124)에서 하차하면 고려분재연구원 뒤쪽으로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명릉(明陵)은 19대 숙종(肅宗, 1661~1720)과 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능이다. 정자각 뒤편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며, 왼쪽 높은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으로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숙종 27년(1701)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이 능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 능침 오른편 자리를 비우는 허우제도를 시행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놓았고, 숙종 45년(1720)에 숙종이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승하한 후 쌍릉의 형태가 되었다. 영조 33년(1757)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명릉 서쪽 언덕에 모셨다.
명릉의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邊路)를 낮게 깔아 놓아 전체적으로 ‘변로-향로-어로-변로’의 4개 길로 조성된 독특함이 있다.


수경원은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의 원이다. 숙종 27년(1701)에 입궁하여 궁녀생활을 하다가 영조 6년에 영빈(暎嬪)으로 책봉되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1남(사도세자) 6녀를 두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2년 뒤인 영조 40년(1764)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로 조성되었고, 1970년 9월 8일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됐다.
정조 12년(1788)에 묘호를 선희묘(宣禧墓)로 고쳤는데, 대한제국 선포 후인 광무 3년(1899)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황제의 어머니로 높이고, 지금처럼 원호를 수경원(綏慶園)이라 하였다.


익릉(翼陵)은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이다. 인경왕후는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의 형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11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두 공주만 낳고 20세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독특하게도 경사지 지형에 맞춰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丁字閣)은 지붕이 건물 바깥으로 이어진 형태인 익랑(翼廊)이 딸려 옆 전면으로 1칸 늘어난 전면 5칸, 측면 5칸으로 세워져 서오릉 경내의 다른 정자각보다 웅장하게 보인다.


4번째 방문지는 인성대군 초장지(仁城大君 初葬地)이다. 이분(李糞, 1461~1463)은 8대 예종(睿宗)과 정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3살 어린 나이에 풍질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어린 손자에게 효소(孝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하였고, 9대 성종이 다시 인성대군으로 추봉하였다.
처음에는 백부 의경세자의 의묘(懿墓)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西三陵) 경내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묘터에는 조성당시에 만든 문석인(文石人), 상석(床石), 표석(表石)이 남아 있으나, 옮겨간 서삼릉 경내 왕자·왕녀 묘역의 인성대군묘 앞에는 ‘仁城大君之墓’라 새겨진 묘비만 세워져 있다.


창릉(昌陵)은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으로 서오릉 영역 내에서 최초로 조성된 능이다. 세조와 문정왕후 윤씨의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은 12살 위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병환 중인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형처럼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는 한백륜의 딸로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가 왕세자빈 지위에서 요절하고 나중에 예종이 임금이 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자각에서 볼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침이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귀면 형태의 나어두(羅魚頭)가 아니라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다.


홍릉(弘陵)은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인 1704년(숙종30)에 숙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1)에 영인군이 세제로 봉해짐에 따라 정성왕후도 세제빈이 되었고, 1724년에 영인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성왕후는 가장 오랫동안 중전 자리에 있었으나 결국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66세 되는 해인 1757년(영조33)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예를 따라 대행왕비의 능을 조성하면서 훗날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우허제(右虛制)를 시행하여 쌍릉 형태로 만들려 하였다. 그래서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홍릉의 왼쪽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영조는 동구릉 경내의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쌍릉으로 모셔졌다.
참고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대빈묘(大嬪墓)는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 옥산부대빈 장희빈의 묘다. 장옥정(1659~1701)은 19대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16대 인조의 계비)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내명부 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의 품계였던 1688년(숙종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에 올랐다. 왕자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뜻에 서인세력이 반발하여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 등이 유배·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희빈을 3번째 왕비로 책봉하였다.
1694년(숙종20)에 숙빈 최씨 독살사건 등으로 갑술환국이 발생하여 서인이 정권을 되찾으면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희빈 장씨는 1701년(숙종27)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무고의 옥)한 죄로 43세에 죽임을 당해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묻혔다가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1969년 6월 서오릉 경내로 다시 이장되었다.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된 후 1722년(경종2)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었는데, 1723년에 세운 묘표에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희빈 장씨의 라이벌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서포 김만중(1637~1692)이 <남정기(南征記)>를 통해 명나라 땅 금릉 순천부를 배경으로 유연수(숙종), 사정옥(인현왕후), 교채란(장희빈) 등을 등장시켜 풍간(諷諫)소설로 풍자한 바 있다.


서오릉의 경릉(敬陵)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 2년 후 결국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는 장남을  의경세자로 책봉하였다. 의경세자(1438~1457)는  20세에 세자 신분으로 요절하였는데,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7대 세조 다음으로 의경세자의 동생이 8대 임금(예종)이 되었고, 예종 다음에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잘산대군이 당시의 정치적 타협 속에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9대 임금(성종)이 되었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어머니 소혜왕후를 인수대비로 존호를 올렸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서쪽)에 왕, 오른쪽(동쪽)에 왕비를 모시지만,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를 모셨다. 세상을 떠날 당시 덕종은 세자의 신분,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덕종의 무덤은 의묘(懿墓)로 조성되었기에 석물이 간소한데 반하여 소혜황후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두르는 등 능(陵)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참고로 동구릉에도 경릉이 있는데, 동구릉의 경릉(景陵)은 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를 모시고 있다.


순창원(順昌園)은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장남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이부(李暊)와 공희빈 윤씨(恭懷嬪 尹氏, ?~1592)의 합장원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하여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다. 공회빈은 윤옥(尹玉)의 딸로 1562년 왕세자빈이 되었다. 이듬해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고, 선조 25년(1592)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궁궐 후원에 가매장(假埋葬) 되었는데, 이듬해 선조가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여 빈 재궁(梓宮)이 안장되었다. 고종이 1870년에 순회묘(順懷墓)를 순창원(順昌園)으로 추숭(追崇)하였다.

서오릉(西五陵)은 이름은 서5릉이지만 능 5개소, 원 2개소, 묘 1개소, 초장지 1개소 등 모두 9군데를 탐방할 수 있다. 매표를 하고 동입서출의 원칙에 따라 명릉, 수경원, 익릉, 인성대군 초장지, 창릉, 홍릉, 대빈묘, 경릉, 순창원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 특히 19대 숙종 임금과 관련된 곳이 많다. 숙종과 숙종의 왕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희빈장씨(20대 경종 생모), 인원왕후와 숙종의 며느리들인 정성왕후(21대 영조 원비), 영빈이씨(사도세자 생모)의 무덤이 모여있다. 서오릉은 경내가 넓어서 제대로 탐방하려면 최소 3시간은 소요된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일절(一切) vs 일체(一切)

‘일절’과 ‘일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표기는 같지만 발음과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절(一切)은 (부정의 뜻으로) 전혀, 절대로, never의 뜻이다.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부당한 청탁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와 같이 사용한다.
반면 일체(一切)는 모든 것, 전부, all의 의미다. ‘재산 일체를 대학에 기부했다.’, ‘필요한 스펙은 일체 갖추었다.’와 같이 사용한다.

양귀자 작가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는 일절(一切)과 일체(一切)의 용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싱싱 청과물의 주인 사내는 이제 막 이사 와서 동네 형편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무작정 과일전만 벌였으면 혹시 괜찮았을 것을 눈치도 없이 ‘부식 일절 가게 안에 있음’ 이란 종이쪽지를 붙여 놓고 파, 콩나물, 두부, 상추, 양파 따위의 부식 ‘일절’이 아닌 ‘일체’를 팔기 시작하였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의 딱 가운데 지점에서, 그것도 결사적인 고객 확보로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두 가게 앞에 버젓이 ‘부식 일절’ 운운한 쪽지를 매달아 놓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처럼 한자 切은(는) 쓰임에 따라 ‘끊을 절’, 또는 ‘모두 체’로 읽는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www.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2018년 9월 19일 수요일

환율 변동의 요인과 영향 판서

[환율 변동의 요인과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
지역 D중학교 3학년 2학기 사회② 과목, ⅩⅡ단원 ‘국제 거래와 국제 수지’ 중간시험 직전대비 판서…
두 나라 화폐 간의 교환 비율인 환율(exchange rate)이 변동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필수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


환율의 상승은 우리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을 의미한다.
환율이 상승하면…
우리의 원화 가치는 하락하여 해외에서 판매되는 우리 상품의 외화 표시 가격을 하락시킨다. 즉, 달러로 표시되는 우리 제품의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외국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력은 높아진다. 다시 말해 수출품의 외화 표시 가격이 하락하므로 외국인들의 구매가 증가한다.
수출이 증가한다.
수입 부품 및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여 물가가 상승한다.
기업의 외채 상환 부담은 증가한다.
외국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외국여행객 수는 감소하게 된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운동선수(류현진·손흥민·김연경 등)는 연봉이 외화 가치가 상승하여 유리해진다.
수출업계나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에게는 유리하며, 수입업계나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는 불리하다.

환율이 하락하는 것은 외국 화폐에 대한 우리나라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환율이 하락하면…
원화 가치가 상승하여 수출 상품의 외화 표시 가격이 상승하므로 수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수입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여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된다.
원화 가치 상승으로 해외여행 경비가 감소하므로 해외여행이 증가한다.
기업의 외채 상환 부담이 감소한다.
수출업자, 달러로 연봉이나 임금을 받는 자, 달러 표시 자산에 투자하는 대기업, 달러로 기술 이용료를 받는 기업, 달러 외화 예금을 보유한 회사원은 불리하다.
환율이 하락하고 있으면 환전을 미룰수록 불리해진다.
반면에 수입업자, 유학 보낸 학부모, 미국으로 여행하려는 여행객, 달러 표시 채무가 많은 기업은 유리하다.

2018년 9월 14일 금요일

헌법공부모임 모란공원 현장답사

(협)마을대학종로 내에 소모임으로 헌법공부 동아리가 있다.
서울시의 ‘2018년 생활속민주주의 시민학습 프로그램 및 시민 사회참여 모임(동아리) 지원사업’에 선정된 90개 동아리 중 하나로 대한민국 헌법에 대해 공부하는 동아리다.
6월부터 시작하여 4차시까지 정기모임이 진행되면서 윤호창, 조유진 등 쟁쟁한 강사들이 수고해 주셨다.
이번 5차시는 내가 헌법과 민주주의, 인권, 국권과 관련된 현장답사를 제안하였고, 구성원들이 호응하여 지난 토요일(9월 8일) 오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으로 현장답사를 다녀왔다.


인권유린 코스로는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의 계훈제, 김근태, 김귀정, 노회찬, 조영래, 최종길, 전태일, 이소선, 김진균, 문익환, 박용길, 김경숙, 박종철, 박정기, 용산참사 희생자(이상림·양회성·한대성·이성수·윤용헌)의 묘역을 둘러봤다.
철종의 부마도위 박영효(1861~1939)의 무덤 앞에선 착잡한 감정~ 역사 교과서에는 제물포조약(1882)의 후속조치를 위해 수신사(修信使)로 도일하는 메이지마루(明治丸) 호 선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만 나오기에 학생들은 그의 친일 행적 흑역사를 알 수가 없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모란공원묘지는 1966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다. 1969년 권재혁 선생 이후 1970년에 전태일 열사가 안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열사 묘역이 형성되었다.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묘역에 묻혀 있는 민주열사는 160여 명으로 추산된다.


국권 코스로는 국태공원소(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과 배위 순목대원비 민씨의 합장원), 납골당으로 변해버린 흥친왕묘(적장자 이재면) 등을 둘러봤다.


사진들은 김양희, 당현준, 이선희, 정은태 선생님의 셔터 작품이다.


헌법공부 동아리의 서울특별시 생활속민주주의학습지원센터가 지원하는 공식 일정은 9월로 종료되지만, 주교재인 ‘지금 다시, 헌법’을 윤독하는 모임은 12월까지 매주 금요일 오전(11시~12시30분) 계동 롤링핀 북촌점에서 김양희 선생님 주도로 계속된다.

2018년 9월 12일 수요일

홍암 나철 대종사 순명 102주기

홍암(弘巖) 나철(羅喆)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출생으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이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承政院)의 가주서(假注書)를 역임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에는 조세징수의 개혁을 위한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904년에 오기호, 이기, 최전 등 호남 출신의 지사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는 오기호 등과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학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박제순(외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을 처단하기 위해 오적암살단(자신회)을 결성하였다.
1907년 자신회(自新會)의 이홍래·강원상 의사가 사동(寺洞)에서 권중현의 암살에 실패하자 나철 선생이 배후를 자청하여 전라도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1년 후 풀려났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재동(齋洞)에서 예로부터 있어온 단군교(檀君敎)를 중광(重光)하여 초대 교주가 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4월 7일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하고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했다. 이로부터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전통을 근간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대종교의 지난한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폭압 속에서 대종교는 1914년 5월 본사를 간도 화룡현으로 옮겨 항일운동을 지속해나갔다. 대종교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불법화하였다.

53세 되던 1916년 8월 15일(음력)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순명삼조(殉命三條)의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순교, 순국하였다. 이후 대종교는 2대 교주 김교헌, 3대 교주 윤세복으로 법통을 이어가며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무오독립선언을 반포했다.

대종교에서는 나철 선생이 순명 조천(殉命朝天)한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로 정하여 4대 경절 중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6년 고향인 벌교읍 금곡마을에 홍암나철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서일,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김구, 조소앙, 박찬익 등 수많은 애국선열과 독립지사들이 대종교의 토양 위에서 커나갔다.
9월 12일 오늘은 홍암 나철 선생 순명 102주기 되는 날이다. 홍암 대종사의 숭고한 정신과 자주 독립사상의 계승은 후손들의 몫이다.

2018년 9월 11일 화요일

영축총림 통도사 국장생 석표(梁山 通度寺 國長生 石標)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에서 동남쪽 약 4km 지점 양산대로변에 높이 166.5㎝,  폭 61㎝의 ‘통도사 국장생석표’가 있다.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 (통도사손잉천국장생일좌단사)
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소보상서호부을축오월일첩전)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판아여개입영시어위료등이립)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태안원년을축십이월일기)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을 풀이하면 “통도사 손잉천(孫仍川) 국장생(國長生) 1좌(座)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을축년 5월 일자의 통첩(通牒)에서 지난번 판결과 같이 고쳐 세우도록 하였으므로 이를 세웠다. 대안(大安) 원년(선종2, 1085) 을축년 12월일 기록하였다.”가 되어 통첩을 받고 국명(國命)에 의해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사원 경제의 규모와 운영 방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불보종찰, 통도사를 담아내다> 특별전의 국장생석표 탁본(國長生石標拓本)이다.


장생표는 본래 구역표시로 장생은 소도(蘇塗)·입석(立石) 등의 민간신앙과 같이 사찰의 입구에 건립하여 가람수호신, 사찰수호신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원의 일정한 성역을 나타낸다. 그러다 점차 사찰에 소속된 토지의 구역을 확정하는 표석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국장생(國長生)이라 함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 통도사의 영역과 사원과 국가와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보물 제74호)이다.
통도사에는 사방 12곳에 장생표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개만 전하고 있다.

2018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불보종찰, 통도사를 담아내다>는 보물 7건, 경남유형문화재 15건 등 총 107건 161점의 통도사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 위치는 조계사 옆 수송동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1층이다.

경남 양산 영축산(靈鷲山)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 대국통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금강계단을 쌓아 봉안하며 창건한 불보(佛寶) 사찰이자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며, 8대 총림(叢林)이다.
양산 통도사는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와 함께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6월 바레인 마나마(Manama)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우리나라의 13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2018년 8월 31일 금요일

생태관광(生態觀光) 메모

다양한 친환경적(親環境的) 개발

생태관광(eco-tourism) : 자연환경의 피해를 줄이며 자연을 즐기는 것 → 새로운 성장동력 및 고용증대 효과 기대  예) 전남 순천시 순천만 개발
생태관광의 특징 : 소규모 그룹, 전문 안내원 동행, 지역의 전통문화 존중, 관광 이익을 환경 보전 활동 및 지역 주민에게 환원 등
생태관광의 사례 : 1994년 오스트레일리아는 세계 최초로 ‘생태관광국가 전략’ 수립, 우리나라의 ‘한국형 생태관광 모델 사업 대상지역 10곳’ 선정 등

생태하천(eco-river) : 오염된 하천을 친환경적으로 복원. 인공 구조물을 없애고 환경 친화적(eco-friendly)으로 복원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 인류가 지구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생산하거나 폐기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토지의 면적으로 환산한 지수
국제생태발자국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 GFN) : https://www.footprintnetwork.org/

생태도시(eco-city, eco-town, eco-polis) : 생태공간을 조성하고 화석연료 사용을 최소화하여 친환경 에너지 개발과 사용을 실천하는 도시 → 생태공간 조성, 화석연료 사용 최소화, 에너지 소비의식 변화와 실천

슬로시티(slow city) : 자연환경과 전통문화의 조화 추구. 자연생태 보호, 전통문화 보전, 슬로푸드 농법 실천, 지역 특산품 지키기, 지역민 중심의 세계화

슬로푸드(slow food) : 대량생산·규격화·기계화를 통한 맛의 표준화에 반대하여 나라별·지역별 특성에 맞는 전통적이고 다양한 음식 및 식생활 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것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관요(官窯)에서 제작한 조선왕실 태항아리

목요일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왕실 태항아리’ 특강을 청강했다.
물론 민간에서도 태(胎)를 귀히 여겨 봉안하기는 했지만 왕조시대 왕실의 왕자와 왕녀들에 비길 수는 없을 터.
건국대 신병주 교수와 경기도자박물관 김경중 학예연구사 등의 강연 내용은 흥미로웠다.

출산 3일째에 태를 깨끗이 씻어 태옹(胎瓮)이라 칭하는 항아리에 봉안한다. 태를 넣은 이 항아리를 보다 큰 항아리에 넣었는데, 태는 결국 2개의 항아리에 보관되는 셈이다.
태항아리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길지(吉地)에 봉안했는데 이를 안태(安胎) 또는 장태(藏胎)라 한다. 50~100m 사이의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석실을 조성하고 태항아리를 묻었는데, 이 태실(胎室)이 위치한 곳이 태봉(胎峰)이다. 태봉에는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했다.
지금도 경기도 연천군 죽면, 가평군 상면, 강원도 원주시, 경북 울진군 북면, 구미시 옥석면, 성주군 월항면, 경남 창원시 진동면, 양산시 원동면, 하동군 후천면, 부산 북구, 충남 서산시 운봉면, 금산군 추부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전북 익산시 삼기면, 완주군 구이면 등 ‘태봉’과 관련한 지명들이 다수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소용된 태항아리는 세조 13년(1467)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 분원 관요(官窯)가 설치된 후에는 분원에서 전담하여 제작하였다. 태항아리의 제작 연대는 굽 안바닥에 새겨진 명문(銘文)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백은경 학예연구사가 소개한 뚜껑 3개짜리 태항아리가 특히 흥미로웠다. 예종(세조 2남)과 성종(덕종 2남), 인성대군(예종 장남)의 태항리가 그것들이다. 성종의 경우 ‘5961’번으로 관리된 백자 외항아리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별도로 제작된 뚜껑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내항아리와 태지석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별도로 소장하고 있다. 임란 시 왜군에 의해 파헤쳐져 시신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선릉(宣陵)까지… 9대 임금 성종(成宗)의 수난사는 계속된다.

주로 삼남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4월부터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이는 조선왕실과 백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작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태를 묻은 태항아리는 국보급 문화재였기 때문에 상당수가 도굴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문닫는 한국방송통신대학우체국

서울 종로구 동숭동 소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우체국이 문을 닫는다.
서울지방우정청은 7월 20일(금), 광화문우체국 소속의 한국방송통신대학우체국을 오는 7월 31일(화)일 부로 폐국한다고 고시(제2018-9호)했다. 현재 우체국 입구에는 업무종료를 알리는 세움간판이 설치돼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편수지 적자에 대한 구조조정 등의 일환으로 지난 2014년 7월 4일 광화문우체국 관할의 상명대학교우체국, 성균관대학교우체국을 폐국한 바 있다. 두 대학의 우체국은 현재 우편취급국으로 축소, 운영되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 우체국은 방송통신대학 역사기록관과 더불어 구 공업전습소 본관(사적 제279호) 건물에 입주해 있다.
대한제국은 상공업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염직, 직조, 제지, 금은세공, 목공 등의 근대기술을 교육하기 위하여 탁지부 건축소에서 설계하고, 일본인 요시다겐조오(吉田謙造)가 시공을 맡아 1907년에 착공, 1908년에 공업전습소를 준공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가 건물을 헐고 중앙시험소를 지었는데, 이후 중앙시험소 청사를 공업전습소가 사용하게 되었다. 문화재 명칭은 ‘공업전습소’지만 어찌보면 ‘중앙시험소’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H자형의 2층 회백색 건물은 현존하는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칠월 열이렛날의 사연

1948년 미군정의 관리 하에 실시된 남한만의 5·10 총선거(월)를 통해 국회의원 200명이 당선되었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는 같은 달 5월 31일(월) 개원하여 초대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 의원을 선출하였다. 제헌의회는 1948년 7월 1일(목)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하였다.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현민(玄民) 유진오(1906~1987)는 임정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로 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 정신을 더하여 바이마르 헌법 등을 참고해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어냈다.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유진오의 초안은 본회의 이틀 전인 6월 21일(월) 국회의장 이승만의 “이 헌법 하에서는 민간에 남겠다.”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승만의 요구대로 대통령제와 단원제 국회로 수정된 변경안은 7월 12일(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헌법 제정에 착수한 지 약 40여일 만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첫 헌법은 닷새 뒤인 17일(토)에야 공포되는데, 이는 556년 전 이성계의 즉위와 관련됐다는 설이 있다.

1392년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이제·이지란·남재·조영규·조영무 등 대소신료, 한량(閑良)·기로(耆老)와 함께 국새를 들고 막후 통치자 이성계의 사저를 찾아 왕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이성계는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이튿날 마침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恭讓王)으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고려국(高麗國) 35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새로운 나라의 법통을 다지고 싶었던 정치인들이 7월 17일에 주목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1895년 을미개혁 이전의 모든 한국사 기록은 음력이다. 고종은 1895년 을미년 11월 16일을 음력의 마지막날로 하여 다음날인 11월 17일을 1896년 양력 1월 1일 건양 원년으로 선포했다. 결국 실질적으로 조선의 건국일이 되는 1392년 7월 17일은 양력으로 따지면 8월 5일인 것이다.

제헌절은 5대 국경일 중 하나지만, 4대 국경일(삼일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과 달리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헌법을 만든 날인 만큼 태극기는 게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www.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2018년 7월 9일 월요일

부담스러운 쿠션 언어

우리말의 주체 높임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격조사 ‘-이, -가’ 대신 ‘-께서’를 붙이고 용언의 어간에 주체높임 선어말어미 ‘-(으)시-’를 결합해야 한다.

“저희 가게에는 다양한 화장품이 있으십니다.”
“이 화장품은 얼마예요?”
“네, 1만원이세요.”

매장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대화이다. ‘있으십니다’란 높임 표현의 주체는 화장품인데, 무생물인 화장품은 높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법에 맞지 않을뿐더러 듣기에도 거북하다. 각각 ‘(화장품이) 있습니다’, ‘(1만원)입니다’로 고쳐야 한다.
서비스업계 직원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른바 ‘쿠션 언어’는 고객 갑질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형용사 ‘있다’의 주체 높임 표현은 ‘-(으)시-’가 붙은 ‘있으시다’와 특수어휘 ‘계시다’의 2가지가 있다.
화자가 주어를 직접 높일 경우에는 ‘교장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계신다.’와 같이 ‘계시다’를 쓴다. 반면에 주어와 관련된 대상(신체, 소유물, 생각)을 통하여 주어를 간접적으로 높일 때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걱정거리가 있으시다.’와 같이 ‘있으시다’를 쓴다. ‘-(으)시-’가 쓰인 ‘있으시다’가 높이는 것은 안긴문장의 주어인 ‘걱정거리’가 아니라 안은문장의 주어인 ‘교장 선생님’이다.
‘지금부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주체와 관련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높이고 있으므로 주어를 직접 높일 때 사용하는 ‘계시다’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있으시겠습니다’로 고쳐야 한다.
요컨대 간접 높임의 경우에는 서술어에서 ‘계시다, 편찮으시다’와 같은 특수 어휘를 쓰지 않고 ‘-(으)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북침 vs 남침

학원 아이들에게 6·25전쟁에 대해 공부하면서 남침인지 북침인지를 물으면, ‘남침’으로 답하는 비율이 7대 3 정도로 더 많다. 그러나 ‘북침’으로 답한 아이들도 1950년 6월 25일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 인민군이 38도선 전역을 침략해 옴으로써 세계대전에 준하는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침략의 목적어 ‘남한’을 강조한 아이들은 ‘남침’으로, 침략의 주어 ‘북한’을 생각한 아이들은 ‘북침’으로 답했을 뿐이다.

주어가 동작을 제힘으로 하는 것을 ‘능동 표현’이라 하고, 주어가 다른 주체(사람·사물 등)에 의해서 동작을 당하게 되는 것을 ‘피동 표현’이라고 한다.
능동문을 피동문으로 바꾸는 과정은 우선 능동문의 목적어를 피동문의 주어로 바꾸고, 능동문의 주어는 피동문의 부사어로 바꾸는 것이다. 2단계는 능동문의 서술어를 피동문의 서술어로 바꾸는 것이다. 이때 능동을 나타내는 동사의 어간에 피동 접미사 ‘-이-, -히-, -리-, -기-, -되다’를 붙이거나(파생적) ‘-어지다’나 ‘-게 되다’를 결합한다(통사적). 단, ‘먹혀지다’, ‘믿겨지다’, ‘보여지다’, ‘쓰여지다’, ‘풀려지다’와 같이 피동 접미사와 ‘-어지다’를 함께 쓰는 것은 이중으로 피동 표현을 한 것이므로 잘못 사용한 것이다.

능동문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를 피동문으로 바꾸면 ‘남한이 북한에(북한에 의해) 침략되었다(침략당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때 ‘북한’은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무정명사이므로 부사격 조사는 ‘에게’가 아니라 ‘에’를 붙인다.

사동 표현은 주어가 다른 대상(사람·사물 등)에게 동작을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위의 예문을 사동 표현으로 바꾸면 ‘소련이 북한에(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략하게 하였다.’가 된다.
문장에서 목적어의 유무에 따라 목적어가 있으면 사동사, 없으면 피동사로 구별한다.

2018년 6월 10일 일요일

정동심곡바다부채길 걸어보기

정동심곡바다부채길은 천연기념물 제437호인 ‘강릉 정동진 해안단구’를 포함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같다 하여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오랫동안 군의 해안경비를 이유로 일반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다가 2016년 6월 1일부터 유료로 개방되었다.


정동진 썬크루즈 리조트 인근의 정동 시작점에서 심곡항까지 약 2.86㎞의 명품 바다길이 이어진다. 지난 토요일(6월 2일), 명례방협동조합의 여름행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바다부채길을 걸어보았다.


해안단구는 해안을 따라 분포하는 계단 모양의 지형으로, 대체로 표면이 평탄하고 주위가 급사면 또는 절벽으로 끊긴 계단의 형태를 갖는다.
정동진 해안단구의 길이는 약 4㎞, 너비는 1㎞ 정도이며, 높이는 해발고도 75~85m이다. 약 2000~2300만년 전 지반의 융기작용에 따라 해수면이 80m 정도 후퇴하면서 바다 밑에 퇴적되어 있던 해저지형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육지화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정동진 해안단구는 한반도의 지반융기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자연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04년 4월 9일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지정되었다.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은 ‘투구바위’에는 강릉부사 시절의 강감찬과 인명을 해치는 호랑이의 바둑에 대한 전설이 얽혀있다.


꿈에 나타나 도움을 요청한 어여쁜 여인의 화상을 수습하고 서낭당까지 지어 모신 노인의 이야기가 서린 부채바위… 바다부채길은 부채바위 등 기암괴석(奇巖怪石)이라는 상투적인 표현마저 식상하지 않은 절경이 즐비하다.


강릉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4구체 향가 ‘헌화가’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같은 설화에 기인하여 옥계면 금진항에서 강동면 심곡항까지 약 2㎞는 ‘헌화로’로 불리고 있다. 현실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인 수로부인에게 매료돼 꽃을 따 바치는 견우 노옹의 헌신과 흠모의 미의식을 음미해 본다.


등대는 항로표지의 일종으로 특히 야간에 등화하여 선박으로 하여금 항로를 유지하고 위험에 대비케 할 목적으로 설계된 탑 모양의 구조물을 말한다. 2003년 1월 8일에 최초 점등한 심곡항방파제등대는 6.2m 높이에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띤다.
다만, 심곡항은 주차공간이 많이 협소해 보였고, 그밖의 편의시설도 좀더 확충해야 할 듯~


2018년 5월 28일 월요일

운악산 봉선사 편답

어제는 申時(오후3시~5시) 경에 진접 광릉숲 자락의 봉선사에 다녀왔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기슭에 운악사로 창건하였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광릉 원찰로 삼아 초창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이름을 받게 됐다.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던 명종 6년(1551)에 보우대사는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만들었다. 6·25전쟁 중에 삼성각 정도를 제외한 16개동 150간의 가람이 전소되었고, 이후 60년 넘게 복원과 신축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과 갑찰로 불리는만큼 일주문의 다포가 화려하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봉선사를 초창할 때 절 입구에 심은 한 그루 느티나무가 아직 건재하다. 수고 21m, 나무둘레 5m, 수령은 550년에 이른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幢)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봉선사 당간지주는 예종 1년(1469)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1551)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僧科旗)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의 대석을 깎아내어 양쪽 기둥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 드문 형태이다. 기둥높이 148㎝, 기둥너비 34㎝, 기둥사이 40㎝, 전체너비 108㎝, 두께 100㎝로 웅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범종루 2층에는 아침과 저녁 예불 때 치는 4가지 불구(佛具),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걸려 있다. 그런데 진짜 눈여겨봐야 할 것은 1층의 동종이다.


봉선사동종(奉先寺銅鐘)은 예종 원년(1469)에 선왕인 세조대왕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총 높이 229.4㎝, 입지름 156㎝의 대형 청동범종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돼있다.
종의 고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역방향으로 향하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형성하였으며, 중심 정상부에는 용의 발톱으로 여의보주를 소중히 받든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는 상부로부터 연판, 연곽, 보살상, 범자, 하대장식이 배치되었으며, 상대와 당좌는 생략되었다. 천판은 반구형으로 조형되었으며, 주연(周緣)에는 넓은 단엽복판연화문(單葉複瓣蓮花紋)을 돌려 장식하였다. 그 밑에는 2조의 융기된 선각(線刻)을 돌려서 종신(鍾身)과 구분을 이루었다. 종신 중복(中腹)에는 융기된 3조의 횡대를 돌려 몸체를 상하로 구분하였다. 사방의 연곽대에는 섬세한 당초문이 장식되었고, 그 안에는 반구형으로 돌출된 8엽화문이 모두 9개씩 정열된 모습이다. 보살상은 얕은 선각부조로 조형되었는데 상호, 의습, 영락 등의 묘사가 매우 섬려하다. 하대에는 나선형의 거친 파도문이 정려하게 장식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은 15세기 후반에 왕실의 발원으로 관장(官匠)에 의하여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용뉴 조각이나 각부 장식의 조형 상태가 우수하고 종신의 연곽과 보살상, 하대문양 등 부분적으로 한국종의 문양요소가 반영된 조선전기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큰법당’은 1970년 운허(1892~1980) 스님이 옛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데,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이다.
보물 제1792호인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毘盧遮那三身掛佛圖)가 큰법당 안 괘불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괘불도의 아래쪽 화기를 통해 제작연도, 시주자, 화사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영조 11년(1735)에 봉안되었고, 시주자는 상궁 이성애로 정조의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고, 화사는 임응 스님을 팀장으로 학총 등 4명의 도화서 화원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원래는 봉선사를 초창하여 개산(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선사와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당우(堂宇)인 개건당(開建堂)이었다. 1977년 월운 주지가 그 오른편에 새로 개건당을 지어 개산(開山)과 중건(重建)의 공덕주들을 모시고, 원래의 개건당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 등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1926년 월초화상이 독성각(獨聖閣), 북두각(北斗閣), 산령각(山靈閣)으로 건립하였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한다.


광복 후 몰아친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가 이곳 봉선사 요사채(寮舍) 어딘가에서 1년 간 은둔하였다고 한다. 삼성각 왼편은 가장 고즈넉해 보이는 공간이어서 담아봤다. 수많은 작은 돌탑이 기와마다 3층 이상으로 올려져 있다.


봉선사 경내 주차장 연못에 서식하는 붉은귀거북… 원래 미시시피 강변에 살아야 할 외래종 별주부가 상대적으로 싼 가격 때문에 애완용으로 많이 수입되었고, 사찰의 방생(放生)법회 등을 통해 퍼져 나가 고유종 남생이를 밀어내고 우리 생태계에 적응한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불살생계라는 선한 의도가 생태계 교란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다.

2018년 5월 25일 금요일

왕실묘역길 역사문화트레킹

5월 22일 음력 사월초파일, 불기 2562년 맞이 트레킹은 도봉산 둘레길 일부 구간이다. 2년 전부턴가 석탄일(석탄절, 석가탄신일) 대신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용어를 공식 명칭으로 내거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문법상으로는 맞지 않은 표현이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기는 싯타르타의 탄생이 아닌 열반을 기준으로 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 1일 개관한 국립공원산악박물관은 1940년대부터의 산악 관련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산수(山의 전신), 사람과 산, 마운틴 등 국내 3대 산악잡지의 창간호를 비롯한 다양한 산악서적들도 전시하고 있다.

산악박물관 오른편엔 조계종 광륜사(光輪寺)가 있다. 일본 국보 1호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장하고 있다는 교토 소재 광륭사(廣隆寺·고류지)와 사찰명이 얼핏 비슷하여 혼동이 오기도 했다. 조대비 신정왕후(1808~1890)가 도봉산 입구에 만장사(萬丈寺)를 새로 짓고 별장 삼아 만년을 보냈는데, 흥선대원군도 휴식처로 찾았다고 한다. 2002년에 지금처럼 광륜사로 개칭되었다.


1969년 김수영 1주기를 맞아 현대문학사가 주축이 되어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 시인의 무덤 앞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모친이 별세한 후 1991년에 도봉서원 앞쪽으로 시비를 옮기고 시인의 유해를 화장하여 담은 유골함을 시비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수영 시비가 곧 김수영의 무덤인 셈이다. 장방형의 시비에 예서체의 金洙暎 詩碑 글자 아래로 대표작 ‘풀’의 몇 구절이 김수영의 육필로 음각돼 있다.


영국사(寧國寺)는 고려 광종 때 3대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지목될 정도로 큰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15세기 초에 다시 세웠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한때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번성하는 듯했으나 성종대 이후 쇠퇴하면서 16세기 중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발굴 때 일부 탁본으로만 전해져 오던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道峯山寧國寺慧炬國師碑)의 오른쪽 상단 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 길이 62㎝, 폭 52㎝, 두께 20㎝의 비편에 새겨진 281자와 문헌의 기록으로 혜거국사를 전후한 선종구산 사자산문(獅子山門) 초기 5대 선사의 계보(도윤-절중-신정-혜거-영준)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금강령(金剛鈴)과 금강저(金剛杵)는 불교의 의식을 위해 사용된 의식구(儀式具)이다. 금강령은 손으로 흔들어 소리를 내는 요령(鐃鈴)의 일종으로 의식 때에 소리를 내어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금강저는 마음 속 번뇌를 없애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도봉서원터에서 출토된 금강령·금강저 세트는 손잡이 끝부분에 갈고리와 같은 고(鈷)가 각각 5개인 오고령(五鈷鈴)과 오고저(五鈷杵)이다. 금강령의 방울 부분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윗단의 5면에는 오대명왕을, 아랫단의 5면에는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을 나타내었으며, 고 부분에는 사리(舍利)를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 등이 섬세하게 표현된 물고기 모양의 탁설(鐸舌)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리공과 함께 11구의 존상이 모두 표현된 금강령은 우리나라에서 도봉서원터 출토 금강령이 유일하며, 고려시대에서도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을사사화를 무효화하는 을사삭훈으로 정국을 주도한 사림은 선조 6년(1573), 터만 남은 영국사 자리에 조광조를 배향하는 도봉서원을 건립한다. 숙종 연간에는 정치 엘리트인 노론이 기사환국으로 피화된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병향한다. 영조의 서원훼철에도 무난했던 도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원되었다.


세종의 9남인 영해군(1435~1477)의 묘를 만들면서 생긴 무수동(無愁洞)은 수철동(水鐵洞)에서 이름이 바뀐 지역인데, 지금은 무수골이라고 부른다. 무수천변에 조성된 무수골 주말농장은 생태체험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은 쌍분으로 정면 왼편이 정의공주의 묘다. 정의공주(1415~1477)는 문종의 동생이자 세조의 누나로 세종의 차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하였다는 기록이 공주의 시가인 <죽산안씨대동보>에 전하고 있다. ‘양효’는 공주의 남편인 안맹담(1414~1462)의 사후 내려진 시호다.



군왕의 무덤이지만 릉(陵)이라 불리지 못하는 연산군묘(사적 제362호)… 세종이 상왕인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한 의정궁주 조씨(?~1454)의 묘에 객식구 넷이 들어왔다. 중종반정 이후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묻힌 연산군과 배위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위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이 아래쪽에 자리하여 500년 넘게 세를 살고 있다.



연산군묘 남쪽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최대 수령 830년으로 추정되는 방학동 은행나무(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데,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불이 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고. 인근 원당마을에 모여살던 파평윤씨 일가가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원당샘은 ‘피앙우물’이라고도 불리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김수영의 선영과 본가, 집필실이 도봉동에 있었던 인연을 기려 2013년에 건립된 김수영문학관… 방학동 498-31에 자리한 문학관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풀>은 ‘울다’와 ‘웃다’, ‘눕다’와 ‘일어나다’의 대립, 과거시제와 현재시제의 대립을 통해 결점 많고 나약하지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시련을 견뎌 내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