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고양(高陽) 행주산성(幸州山城) 탐방

방금 전 끝난 KBS 사극 「징비록」 제32회에서는 행주대첩이 그려졌는데 급박한 전투상황이 그럭저럭 표현된 듯하다. 특히 권율의 조방장으로 활약한 조경(趙儆)이란 분이 강단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전 시간을 고양 행주산성 답사로 보냈다. 고봉산(高烽山, 203m)의 高자와 덕양산(德陽山, 125m)의 陽자가 합쳐져 고양(高德)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한다. 행주산성의 정문인 대첩문(大捷門)을 들어서면 전면에 도원수 권율상이 묵직하게 서있고, 우편 아래로는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는 충훈정(忠勳亭)이 위치한다.


홍살문을 지나 올라가면 1970년 문화재 재건사업으로 건립한 충장공(忠莊公)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가 나오는데,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제례를 모신다고 한다. 한글 현판은 박정희의 글씨이다.


선조 26년(1593.2.12) 행주산성 전투 당시 사용된 무기류와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는 대첩기념관 내에서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사진을 담을 수가 없었다.


진강정(鎭江亭)과 덕양정(德陽亭)을 지나 정상부로 올라가면 행주대첩의 경과와 권율장군의 공덕을 적어 부하들이 선조 35년(1602)에 세운 대첩비(초건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4호)가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최립(崔笠)이 짓고 비의 명칭은 김상용(金尙容),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썼으며, 끝의 추기는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흑색이 가미된 화강암 재질의 초건비는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마모로 훼손되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거의 없다. 헌종 11년(1845)에 초건비의 내용에 일부 내용을 뒷면에 추가한 중건비를 행주나루 부근의 기공사(紀功祠)에 세워 놓았다. 1970년 행주산성 정상화사업 때 세워진 재건비의 각자도 박정희의 글씨이다.


한강 교량 중 가장 길다는 방화대교의 붉은색 아치트러스(arch truss)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방향에 따라 위치한 전망시설에서 난지공원·가양대교·성상대교·63빌딩·관악산, 삼각산 백운봉과 인수봉, 일산대교·김포대교·심학산·호수공원·고봉산을 조망해볼 수 있다.


3호선 화정역 3번출구로 나와 19392 정류장에서 행주교통 노란색 012 마을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려 행주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배차간격이 긴 편이고,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아 초행자에게는 불편함이 있다.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인창방(仁昌坊) 탐방

조선시대 한성부 5부 52방 행정구역에서 동부의 12개 방(坊) 중 도성 밖의 인창방(仁昌坊)에 속했던 제기동과 청량리 지역을 답사했다. 제기(祭器)는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이고, 제기동이라고 할 때의 제기(祭基)는 ‘제사터’를 의미하며, 이는 조선초에 지어진 선농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제기동(祭基洞)은 ‘제터마을’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1호선 제기동역 1번출구의 선농단이다. 선농단(先農壇)은 조선시대에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북악산의 한 줄기인 개운산(開運山)이 우이령을 거쳐 정릉천을 따라 내려오는 비옥한 땅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거의 일직선상에 놓인 명당으로서 그 범위가 남쪽으로 청풍계천(청계천),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성북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농단 일대는 과거 평촌으로 불렸으며, 왕이 몸소 밭갈이를 시범하는 친경례 장소인 동적전은 선농단과 청계천 사이의 영역을 포함한다.


선농대제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며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농사와 관련해서 24절기 중 1번째 절기인 입춘 후에 지내는 선농제(中農祭)뿐만아니라 7번째 절기인 입하 후에 중농제(先農祭), 13번째 절기인 입추 후에 후농제(後農祭) 이렇게 3번의 제사를 올리는 독특성을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선농대제와 함께 왕이 몸소 쟁기를 잡고 발갈이하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의식을 성종 때 처음으로 시행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땅을 활용하여 적전(籍田)을 설치했다.
친경이 끝난 후 문무백관 및 백성들이 제물로 올렸던 귀한 고기로 국물을 내어 밥을 말아 나누어 먹던 풍습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내린 국밥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고 부르던 것이 발음하기 쉽도록 설롱탕을 거쳐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직접 농기구를 잡고 농사를 짓는 친경의식을 행한 후에 조정 중신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나누어 먹었던 설렁탕이야말로, 백성을 위로하고 기꺼이 고락을 함께 하고자 하는 통치자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친경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4년(1910)까지 계속되었다.


선농단에서는 제신농씨를 1번째로 후직씨를 2번째로 모셨는데, 본래 선농단에는 위패를 모시는 신실을 두지 않았고 제사를 드릴 때, 신실에 봉안하였던 제신농씨와 후직씨의 신위를 모셔왔다. 염제(炎帝)라고도 불리는 제신농(帝神農)씨는 불의 신, 태양의 신, 농업의 신, 의약의 신이자, 차의 시조이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최초로 시장을 개설하여 인류 문명의 원천을 제공한 이로 묘사되고 있다. 제신농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수렵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사회로 진입하였음을 나타내며, 이로 인해 동시에 여러 인류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직(后稷)씨는 농경신으로 오곡의 신을 말한다.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해 낳았다 하며, 3차례나 내다 버렸으나 그때마다 구조되었다고 한다. 후직은 원래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직책의 이름이며 후(后)는 군(君), 직(稷)은 오곡을 뜻한다. 제신농씨의 자리를 단 위의 북쪽에 남쪽 방향으로 설치하고, 후직씨는 단 위의 동쪽에 서쪽 방향으로 설치하였다.
선농단 일대는 1908년 사직단(社稷壇)으로 신위가 옮겨진 후 일제에 의해 공원화(청량공원/전농공원)되었고, 해방 이후 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거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후 선농단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1년에 국가 사적 제436호로 재지정되었다. 1979년부터 지역주민들에 의해 복원이 시도되어 2015년 4월 30일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높이 10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2m 정도인 서울 선농단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40호)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늘푸른큰키나무인 향나무는 대개 자라면서 휘어지는데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위로 곧게 자랐다. 안내판에는 수이선농단원백(首尓先农坛圆柏)이라는 한자 타이틀이 있는데 서울을 수이(首尓)라 표기한 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농단을 둘러본 후 왕산로 횡단보도를 건너 제기동역 3번출구 쪽의 동대문구립 한의약박물관(동의보감타워 B2)으로 내려갔다. 다양한 한의약 관련 유물과 동물계·식물계·광물계의 각종 한약재가 전시되고 있었고, 한방체험장에서는 한방차를 시음하며, 사상체질 감별도 받을 수 있다.
조선초기 왕명으로 설립되어 병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던 의료기관이자,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했던 빈민구제기관이었다는 보제원(普濟院)의 축소모형도 새로웠다.
원집 원(院)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개 국영여각(旅閣)으로 숙박소나 역참(驛站), 구휼기관이 있던 곳인데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이 있다.
특히 동대문에서 3리 정도 떨어진 보제원은 넓게(普) 구제(求濟)한다는 의미처럼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주는 진제장(賑濟場) 및 약방과 의원을 배치하여 오늘날의 보건소 역할을 하였기에 사람이 모여들고 중부권의 농산물과 약초 등이 집중되면서 시장과 약재상가가 형성되었다.


한의약박물관에서 왕산로 건너편으로 제기동역 2번출구 방면에는 서울약령시(藥令市)가 위치한다. 왕명에 의해 각종 약재의 교환·매매를 주관하던 약령시는 효종(1649~1659) 때 약재의 집합이 편리했던 대구·원주·전주의 3개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자금제공 등으로 폐쇄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던 대구약령시의 규모가 가장 컸으나 요사이엔 경동시장과 연결된 서울약령시가 압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약재상들이 문을 닫았고, 평일이라해도 투어 재미는 그닥 없을 듯하다. 20층을 웃도는 고층건물도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반면에 서울약령시와 인접한 경동시장(京東市場)은 정말 볼거리가 풍부하다. 인삼·당귀 등의 한약재, 체리·포도·미나리 같은 청과물, 스팸류 가격이 무지 착하고, 온누리상품권도 막힘없이 통용된다. 1천원에 찐옥수수 2개, 5천원에 돼지 머릿고기 소자를 기분 좋게 사넣었다. 경동시장, 청량리청과물도매시장, 청량리전통시장을 통과하여 청량리역 방면에서 좌회전, 홍릉로를 따라 영휘원으로 고고씽~


사적 제361호인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은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嚴貴妃)와 손자인 이진(李晉)의 묘소이다.


가세가 빈한했던 엄씨(1854.2.2~1911.7.20)는 일찌기 궁녀로 입궐(1859)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31세(1885)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 의해 퇴궐당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피살당한 이후에 재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1896) 때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모셨으며 1897년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출산하고 상궁에서 귀인으로 다시 순빈, 순비로 진봉되었으며 1903년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말년에는 장티푸스로 고생하다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광무9년(1905)에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이듬해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뒤에 숙명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여 근대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 걸려있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진(1907년경)을 촬영해 봤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용모인데,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진(李晉, 1921.8.18~1922.5.11)은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은(李垠, 1897.10.20~1970.5.1)과 흔히 이방자(李方子) 여사로 알려진 일본 왕족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1.4~1989.4.30)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순종황제는 생후 9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특별히 원(園)으로 조영(숭인원)하였고, 결국 그의 할머니인 순헌귀비의 묘(영휘원) 옆에 묻히게 되었다.


높이 9m, 둘레 2.3m, 추정 수령 150년으로 천연기념물 제506호였던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는 2015년 태풍 볼라벤의 강풍피해와 생리적 노쇠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고사하는 바람에 국가지정문화재가 지정해제되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묘역 입구 안쪽의 조선시대 왕계도는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 엉망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료가 5백원이다. 영휘원의 입장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1995)와 같은 1천원인데… 무료나 5백원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으로 처음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강남구 내곡동)에 있었다. 그러나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일어나서 예종 원년(1469)에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했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石物)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현지 주변 땅에 묻혔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남아있는 구 영릉 석물은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난간주석, 혼유석, 세종대왕신도비 등인데 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 왔다. 품목과 수량이 당초와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모른다.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인 석호는 여주 영릉과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1805호인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는 옛 영릉터에서 약 1㎞ 떨어진 순조의 인릉(仁陵)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정분(鄭苯)과 민신(閔伸)의 감독 아래 1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된 비는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다. 조선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수(螭首)의 중앙 아래쪽에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총 4,886자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멸로 판독이 어려우나, 대체적인 내용은 세종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왕후·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을 적은 것이다. 앞면의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은 김조(金銚)가 지었으며, 전액과 글씨는 세종의 3남이자 명필로 이름난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썼다. 총높이 507㎝, 비신 높이 312㎝, 폭 155㎝, 두께 50㎝에 달하는 큰 비석은 현재 보호각 안에 있어 일반인들이 들여다보기도 불편하고 사진 촬영은 더더구나 어려운 모습이다.



수표(水标)는 대개 홍수대비 목적으로 하천의 물 높이를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만든 표지석인데 1441년(세종23)에 나무로 만들어 처음 세웠고 성종 때(1469~1494)에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 수표(보물 제838호)는 조선시대에 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기 위하여 수표교(水標橋) 서쪽에 세웠던 수위측정기(水位測定器)이다. 수표에 있는 ‘계사갱준(癸巳更濬) 기사대준(己巳大濬)’의 글씨는 영조의 경진준천(1760) 이후에 다시 청계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을 트는 준설(浚渫)을 하면서 새긴 것이다. 전체 높이는 3m. 청계천 바닥에 직육면체의 초석(礎石)을 두고 그 위를 기둥 모양으로 깍아 세웠으며 맨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돌기둥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육각 모양으로 만들어 그 표면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다. 한 눈금은 주척(周尺) 1자로 평균 21.5㎝ 간격이다. 3척·6척·9척 선상에는 Ο표를 음각하여 각각 갈수(渴數 가뭄), 평수(評水 평균수위), 대수(大水 홍수)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물이 6척 안팎은 보통수위이며 9척이 넘으면 위험수위로 보고 청계천이 범람할 수도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이 수표는 청계천을 덮는 복개공사 때문에 장충단(奬忠壇)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농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가뭄과 홍수를 예측했던 과학문화재로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기념관 맞은편의 홍릉수목원과 경희대 캠퍼스 투어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자연사박물관이 기대된다.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가학광산동굴 역사문화트레킹

54년 전 쿠데타의 날(1961.5.16)… 광명시에 있는 가학광산동굴로 동굴탐방을 떠났다. 7호선 철산역 2번출구로 나와 횡단보도 건너편 다이소 인근에서 17번 버스를 타면 도착한다. 동굴에 인접해 있는 광명 자원회수시설(Resource Recovery Facility)의 건물 색깔이 진한 분홍색이기에 인근에서는 쉽게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2015년 현재 35만명 인구의 광명시는 과천시와 더불어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위성도시로써 베드타운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서울 영등포권에 밀접하다. 1981년 시 승격 당시에는 원광명(굉메)에서 유래한 광명동이 중심지였기 때문에 광명시(光明市)라는 도시이름을 갖게 됐다. 자연촌락인 원철산(쇠뫼)에서 유래한 철산동(鐵山洞)은 광명시의 중심지역으로 광명시청, 광명경찰서, 관공서, 철산역, 철산상업지구가 밀집해 있다.


동굴 안 수족관의 실버아로와나(silver arowana)… 공룡시대 물고기라고 하기에 한장 찍어봤다. 먹이감을 사냥하기 위해 물 밖으로 펄쩍 뛰어오르는 습성 때문에 ‘원숭이고기’라고도 불리며 수컷이 입속에 알을 넣고 부화시키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조선광업령(1915)이 시행되기 전부터 시흥동광산(始興銅鑛山)이란 명칭으로 출발한 가학광산동굴은 1912년 일제가 금·은·동·아연을 채굴하기 위해 형성한 이후 1972년까지 약 60년 동안 수도권 유일의 금속광산이었다. 이후 방치돼 오다가 2011년 광명시가 매입하여 총 7.8㎞ 중 1㎞ 정도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개발·개방하였다.


멍에 가(駕), 두루미 학(鶴)… 예전엔 학들이 멍에처럼 마을을 둘러싸며 서식하였다 하여 붙여진 가학산(駕鶴山)에 소재하기에 가학광산동굴일 터인데, 광명시가 일종의 랜드마크와 관광지로 활용하기 위해 광명동굴이라고 새로 작명한 것 같다.


동굴 안 이곳저곳 신경도 많이 쓰고 나름 눈요기 거리도 있지만 4천원이라는 입장료에는 한참 미치치 못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일제의 잔혹한 약탈의 현장임을 부각하지 못한 부분이 매우 아쉽다.(안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서울 동북부에 불수도삼(불암산·수락산·도봉산·삼각산)이 있다면 광명시에는 도구가서(도덕산·구름산·가학산·서독산) 4개의 산이 있다. 동굴에서 나와 가학산(220m)에 이어 구름산(240m) 정상을 찍고 하산 후 광명시장 전집에서 막걸리 몇 사발로 트레킹을 마쳤다. 철산동과 가학동에는 지석묘(고인돌) 유적지도 있는데, 이번에는 탐방하지 못했다.
아베 같은 애들만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식민주의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한다.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위한 과거의 정확한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가학광산동굴은 많은 아쉬움을 남겨 준다.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써스티

지난 토요일(5월 9일) 오후 3시… 사회민주주의센터의 장미강좌 ‘협동조합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강했다. (협)한국협동조합창업경영지원센터 김성오 이사장의 훌륭한 강의였다. 환대해 주신 이영희 집행위원장님께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그리고 일요일(5월 10일) 오후엔 미뤄오던 명례방협동조합의 신입조합원 교육도 수료했다. 유영훈 이사와 당현준 이사장 등 많은 임원들이 함께해 주셨다.



협동(協同)은 마음(忄=心)과 세 힘(力)을 하나로(同) 모으는 것이다. 요컨대 협동조합이란 “목마른 사람(hunger)이 판 우물”이라는 김성오 이사장의 언급이 핵심인 듯하다. 생시몽·푸리에 등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폄하되던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의 사회개혁운동은 오늘날 전세계 170만 협동조합과 10억 조합원으로 꽃피우게 됐다. 이로 인한 외부경제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다.


최근 2~3년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관련 강의를 드문드문 꽤 많이 쫓아다녔는데… 요즘 들어서야 새삼스레 감이 좀 잡히는 것 같다. 사회적경제가 선별복지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경계하며, 협동조합에서의 CSR 등 관련 자료들을 다시한번 챙겨봐야겠다.

2015년 5월 6일 수요일

도봉옛길·방학동길 완주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유적탐방을 겸한 산행 고고씽~ 북한산둘레길 18구간(도봉옛길)과 19구간(방학동길) 6㎞ 완주.


우이암으로 향하는 등산로 우측의 능원사(能圓寺)는 일주문에서부터 금당까지 모든 시설물의 처마·기둥·편액까지 황금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용화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아 불도를 이룬 것처럼 미륵불도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해 용화세계를 펼칠 것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용화전(龍華殿)인데, 대개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봉산 능원사의 중심 법당인 용화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형태이며, 지붕 위에는 용두 대신에 금시조(金翅鳥)가 동자승을 태우고 용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을 얹어 놓았다. 여주에 본사가 있다고 하는데, 종파는 모르겠다.

968년(광종 19)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한 특별선원 도봉사(道峰寺)는 수많은 내우외환으로 소실된 것을 1961년에 복원한 사찰이라고 한다. 태국으로부터 옮겨온 석가세존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있다는 뿌리탑이 특이하다. 대웅전에 있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철불좌상은 현재 원서동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한산둘레길 쌍둥이전망대에서 건너다본 도봉산의 산세가 거침없이 시원하다.


방학동길을 내려오면 오른편에 부왕의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와 남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쌍분이 나온다(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楮子島)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쌍분 앞의 묘표를 통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汝意頭紋)과 운문(雲紋)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거북받침돌(龜趺) 위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2마리의 용 조각이 매우 정교해 보인다. 정인지(鄭麟趾)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賓世)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정의공주묘 건너편으로 연산군묘(사적 제362호)가 있다. 조선의 제10대 군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이융(李漋: 1476~1506)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성종의 장남으로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2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1506년 연산군은 왕위를 박탈당하고 대군으로 강등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병이 들어 31세로 일생을 마쳤다. 7년후 강화에 있는 무덤을 옮겨 달라는 군부인 신씨(愼氏)의 애타는 요청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1513).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이 만년에 홀로 외롭게 지내는 태종을 위해 후궁으로 들인 의정궁 조씨의 묘역이었다. 묘역 입구 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具文景)의 무덤이 있고, 가운데에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 그 위쪽에 연산군과 군부인 신씨의 묘가 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齋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인 영(令-종5품)과 참봉(參奉-종9품)이 근무하는 곳이며, 제향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을 준비하는 곳으로 안향청,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본채와 행랑채로 구성된 연산군묘 재실(燕山君墓齋室)에는 1775년(영조51) 연산군의 묘소를 외손으로 하여금 돌아가신 날과 사명일(四名日-설·단오·추석·동지)에 제사를 지내도록 관아에서 제수를 주고 묘를 지키도록 군사를 배치하였다고 기록한 치제현판(致祭懸板)이 발견되었다. 또한, 1903년(광무7)에 제작된 현판인 묘각 중건기(墓閣 重建記)에는 문혜공(이눌안의 시호)의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모셨으며, 홍태윤(洪泰潤)이 지나가다가 묘소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고종 황제께 건의하여 묘의 주변을 정비하고 재실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2010년에 문화재청에서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산군 제향일은 매년 4월 2일(양력)에 행해진다.


연산군묘 앞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추정 수령 877년의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서울시지정보호수 제1호)가 있다. 고려시대인 1100년대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이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원당샘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수백년 동안 이곳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일명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우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배타(排他)

오늘로 중간시험이 일단락 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늘상 어린이날 이후까지 시험기간이 지속됐지만, 올해엔 최대 아흐레 동안이나 이어지는 단기방학의 영향으로 5월 5일 이전에 마무리 된 것인데… 대놓고 놀고 먹으려는 개개 학교의 아전인수격 학사일정에 썩소가 튕겨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연금개혁에는 결사반대하는 수가 뻔한 공교육 영역을 정말이지 신뢰하지 않는다.

동아출판 역사 교과서를 사용하는 우리 지역 M중학교의 역사① 과목에서는 이번 중간고사 출제에서 제외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인류의 출현과 진화, 삼국의 불교문화·도교·유학·고분·대외교류 부분은 전혀 출제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① 인류의 진화과정과 구석기 시대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② 불교의 전래 배경과 불교가 삼국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
③ 삼국 문화의 특징과 주변 나라와의 교류 내용을 말할 수 있다.
고 진술된 학습목표와 도착점 행동은 종내 무용지물이 된다. 헌법 제31조에서 명시하는 교육받을 권리는 어찌 되는가. 해당 역사 선생님은 본인이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위와 같은 내용을 출제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는 것이 아이들의 전언이다.

직립보행의 결과물이 Hands, Language, Brain의 획득이다. 환경에 대한 적응을 통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인간 진화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현대의 원숭이나 유인원과 공통 선조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들로부터 진화하지 않았다. 또한 불교와 유학을 빼놓고는 결코 한국사를 논할 수 없다.

밀칠 배(排), 다를 타(他)… 배타(排他)… 다른 것을 밀치다, 남을 반대하여 물리치다…
어째서 개독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지 개신교인들은 통렬히 성찰해야 한다.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고대 아시리아의 유적을 무차별 파괴하는 IS와 다를 것이 무엔가.

2015년 5월 3일 일요일

북한산둘레길 2구간 애국선열묘역길

지난달 11일 서울시민연대 분들과 북한산둘레길 2구간(순례길) 독립유공자 묘역을 다녀왔는데, 이제서야 몇 자로 정리·요약한다.


몽양 여운형(1886.5.25 ~ 1947.7.19) 묘역은 평소엔 개방을 하지 않기에 전상봉 대표가 사전에 연락을 취하여 참배할 수 있었다.


1911년 매국원흉 이용구(일진회장)를 암살기도했으며, 1932년 솽싱푸(雙星堡)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던 강재 신숙(1885.12.29 ~ 1967.11.22).


합리적인 보수의 전형을 보여준 심산선생 김창숙(1879.7.10 ~ 1962.5.10)은 이승만을 향해 2번이나 물러날 것을 주장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섶다리는 통나무, 소나무가지, 진흙으로 놓여진 임시다리를 말한다. 강을 사이에 둔 마을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매년 물이 줄어든 겨울 초입에 놓았다가 여름철 불어난 물에 의해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된다. 예전에는 강원도 영월과 정선 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대적인 교량이 들어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이색풍물이 되어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섶다리는 매년 추수를 마치고 10월 말경에 사람들이 모여 4~5일에 걸쳐 만들었다가 다음해 5월 중순경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거두어 들이게 되는데, 물에 강한 물푸레나무를 Y자형으로 거꾸로 박고, 그 위에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얹어 다리의 골격을 만든 후 솔가지로 상판을 덮고 그 위에 흙을 덮는다고 한다. 지네발을 닮았다고도 비유되는 섶다리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도끼와 끌로만 기둥과 들보를 만드는 정교한 작업이 요구된다.


1940년대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순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17위의 합동묘소는 너무나 초라하다.


반면에 일성 이준(1859.12.18 ~ 1907.7.14)의 묘역은 수유동 애국선열 묘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홍살문까지 세워져 있다. 이역만리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한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나치게 격상·미화되어 왔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드종 호텔에서의 최후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더하여 쇠기둥에 볼트 너트를 끼우고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이라니… 국가보훈처나 강북구청의 새머리에 어이가 없음이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오월의 씨순길… 유김길

4호선 길음역 3번출구로 나와 08-124 정류장에서 7211번 버스를 타고 구기터널한국고전번역원(01-150)에서 하차하여 북한산 둘레길 6구간 평창마을길과 5구간 명상길 일부구간을 걸었다.


구기동 유영모 자택지(구기현대빌라)에서 정릉동 김교신 자택지(정릉시장)까지의 길이라고 해서 유김길(柳金路)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유영모(1890~1981) 선생이 형제봉 능선 너머 김교신(1901~1945) 선생을 방문하던 길을 걸으며 옛분들의 두터운 정의를 더듬어 보았다.
김교신은 1930년대 양정고보 지리선생으로 재직시 손기정의 가슴에 민족혼을 지핀 스승으로 유명한 분이다.



형제봉 측면을 지나면서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사례로 기록될 그러나 결국은 감춰지게 될 성완종의 데스노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미오리와 9마리의 새끼오리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정릉천길을 내려와, 김교신 선생의 자택지로 추정되는 정릉시장통 인근에 46년 전통의 담백한 백순대가 별미인 기차순대국(☎ 914-9316)에서 주인 할머니의 푸짐한 인심이 더해진 막걸리 몇 순배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