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유적탐방을 겸한 산행 고고씽~ 북한산둘레길 18구간(도봉옛길)과 19구간(방학동길) 6㎞ 완주.
우이암으로 향하는 등산로 우측의 능원사(能圓寺)는 일주문에서부터 금당까지 모든 시설물의 처마·기둥·편액까지 황금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용화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아 불도를 이룬 것처럼 미륵불도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해 용화세계를 펼칠 것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용화전(龍華殿)인데, 대개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봉산 능원사의 중심 법당인 용화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형태이며, 지붕 위에는 용두 대신에 금시조(金翅鳥)가 동자승을 태우고 용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을 얹어 놓았다. 여주에 본사가 있다고 하는데, 종파는 모르겠다.
968년(광종 19)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한 특별선원 도봉사(道峰寺)는 수많은 내우외환으로 소실된 것을 1961년에 복원한 사찰이라고 한다. 태국으로부터 옮겨온 석가세존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있다는 뿌리탑이 특이하다. 대웅전에 있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철불좌상은 현재 원서동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한산둘레길 쌍둥이전망대에서 건너다본 도봉산의 산세가 거침없이 시원하다.
방학동길을 내려오면 오른편에 부왕의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와 남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쌍분이 나온다(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楮子島)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쌍분 앞의 묘표를 통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汝意頭紋)과 운문(雲紋)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거북받침돌(龜趺) 위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2마리의 용 조각이 매우 정교해 보인다. 정인지(鄭麟趾)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賓世)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정의공주묘 건너편으로 연산군묘(사적 제362호)가 있다. 조선의 제10대 군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이융(李漋: 1476~1506)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성종의 장남으로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2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1506년 연산군은 왕위를 박탈당하고 대군으로 강등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병이 들어 31세로 일생을 마쳤다. 7년후 강화에 있는 무덤을 옮겨 달라는 군부인 신씨(愼氏)의 애타는 요청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1513).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이 만년에 홀로 외롭게 지내는 태종을 위해 후궁으로 들인 의정궁 조씨의 묘역이었다. 묘역 입구 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具文景)의 무덤이 있고, 가운데에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 그 위쪽에 연산군과 군부인 신씨의 묘가 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齋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인 영(令-종5품)과 참봉(參奉-종9품)이 근무하는 곳이며, 제향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을 준비하는 곳으로 안향청,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본채와 행랑채로 구성된 연산군묘 재실(燕山君墓齋室)에는 1775년(영조51) 연산군의 묘소를 외손으로 하여금 돌아가신 날과 사명일(四名日-설·단오·추석·동지)에 제사를 지내도록 관아에서 제수를 주고 묘를 지키도록 군사를 배치하였다고 기록한 치제현판(致祭懸板)이 발견되었다. 또한, 1903년(광무7)에 제작된 현판인 묘각 중건기(墓閣 重建記)에는 문혜공(이눌안의 시호)의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모셨으며, 홍태윤(洪泰潤)이 지나가다가 묘소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고종 황제께 건의하여 묘의 주변을 정비하고 재실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2010년에 문화재청에서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산군 제향일은 매년 4월 2일(양력)에 행해진다.
연산군묘 앞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추정 수령 877년의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서울시지정보호수 제1호)가 있다. 고려시대인 1100년대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이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원당샘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수백년 동안 이곳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일명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우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이암으로 향하는 등산로 우측의 능원사(能圓寺)는 일주문에서부터 금당까지 모든 시설물의 처마·기둥·편액까지 황금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용화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아 불도를 이룬 것처럼 미륵불도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해 용화세계를 펼칠 것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용화전(龍華殿)인데, 대개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봉산 능원사의 중심 법당인 용화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형태이며, 지붕 위에는 용두 대신에 금시조(金翅鳥)가 동자승을 태우고 용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을 얹어 놓았다. 여주에 본사가 있다고 하는데, 종파는 모르겠다.
968년(광종 19)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한 특별선원 도봉사(道峰寺)는 수많은 내우외환으로 소실된 것을 1961년에 복원한 사찰이라고 한다. 태국으로부터 옮겨온 석가세존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있다는 뿌리탑이 특이하다. 대웅전에 있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철불좌상은 현재 원서동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한산둘레길 쌍둥이전망대에서 건너다본 도봉산의 산세가 거침없이 시원하다.
방학동길을 내려오면 오른편에 부왕의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와 남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쌍분이 나온다(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楮子島)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쌍분 앞의 묘표를 통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汝意頭紋)과 운문(雲紋)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거북받침돌(龜趺) 위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2마리의 용 조각이 매우 정교해 보인다. 정인지(鄭麟趾)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賓世)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정의공주묘 건너편으로 연산군묘(사적 제362호)가 있다. 조선의 제10대 군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이융(李漋: 1476~1506)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성종의 장남으로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2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1506년 연산군은 왕위를 박탈당하고 대군으로 강등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병이 들어 31세로 일생을 마쳤다. 7년후 강화에 있는 무덤을 옮겨 달라는 군부인 신씨(愼氏)의 애타는 요청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1513).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이 만년에 홀로 외롭게 지내는 태종을 위해 후궁으로 들인 의정궁 조씨의 묘역이었다. 묘역 입구 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具文景)의 무덤이 있고, 가운데에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 그 위쪽에 연산군과 군부인 신씨의 묘가 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齋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인 영(令-종5품)과 참봉(參奉-종9품)이 근무하는 곳이며, 제향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을 준비하는 곳으로 안향청,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본채와 행랑채로 구성된 연산군묘 재실(燕山君墓齋室)에는 1775년(영조51) 연산군의 묘소를 외손으로 하여금 돌아가신 날과 사명일(四名日-설·단오·추석·동지)에 제사를 지내도록 관아에서 제수를 주고 묘를 지키도록 군사를 배치하였다고 기록한 치제현판(致祭懸板)이 발견되었다. 또한, 1903년(광무7)에 제작된 현판인 묘각 중건기(墓閣 重建記)에는 문혜공(이눌안의 시호)의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모셨으며, 홍태윤(洪泰潤)이 지나가다가 묘소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고종 황제께 건의하여 묘의 주변을 정비하고 재실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2010년에 문화재청에서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산군 제향일은 매년 4월 2일(양력)에 행해진다.
연산군묘 앞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추정 수령 877년의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서울시지정보호수 제1호)가 있다. 고려시대인 1100년대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이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원당샘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수백년 동안 이곳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일명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우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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