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성부 5부 52방 행정구역에서 동부의 12개 방(坊) 중 도성 밖의 인창방(仁昌坊)에 속했던 제기동과 청량리 지역을 답사했다. 제기(祭器)는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이고, 제기동이라고 할 때의 제기(祭基)는 ‘제사터’를 의미하며, 이는 조선초에 지어진 선농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제기동(祭基洞)은 ‘제터마을’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1호선 제기동역 1번출구의 선농단이다. 선농단(先農壇)은 조선시대에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북악산의 한 줄기인 개운산(開運山)이 우이령을 거쳐 정릉천을 따라 내려오는 비옥한 땅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거의 일직선상에 놓인 명당으로서 그 범위가 남쪽으로 청풍계천(청계천),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성북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농단 일대는 과거 평촌으로 불렸으며, 왕이 몸소 밭갈이를 시범하는 친경례 장소인 동적전은 선농단과 청계천 사이의 영역을 포함한다.
선농대제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며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농사와 관련해서 24절기 중 1번째 절기인 입춘 후에 지내는 선농제(中農祭)뿐만아니라 7번째 절기인 입하 후에 중농제(先農祭), 13번째 절기인 입추 후에 후농제(後農祭) 이렇게 3번의 제사를 올리는 독특성을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선농대제와 함께 왕이 몸소 쟁기를 잡고 발갈이하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의식을 성종 때 처음으로 시행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땅을 활용하여 적전(籍田)을 설치했다.
친경이 끝난 후 문무백관 및 백성들이 제물로 올렸던 귀한 고기로 국물을 내어 밥을 말아 나누어 먹던 풍습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내린 국밥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고 부르던 것이 발음하기 쉽도록 설롱탕을 거쳐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직접 농기구를 잡고 농사를 짓는 친경의식을 행한 후에 조정 중신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나누어 먹었던 설렁탕이야말로, 백성을 위로하고 기꺼이 고락을 함께 하고자 하는 통치자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친경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4년(1910)까지 계속되었다.
선농단에서는 제신농씨를 1번째로 후직씨를 2번째로 모셨는데, 본래 선농단에는 위패를 모시는 신실을 두지 않았고 제사를 드릴 때, 신실에 봉안하였던 제신농씨와 후직씨의 신위를 모셔왔다. 염제(炎帝)라고도 불리는 제신농(帝神農)씨는 불의 신, 태양의 신, 농업의 신, 의약의 신이자, 차의 시조이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최초로 시장을 개설하여 인류 문명의 원천을 제공한 이로 묘사되고 있다. 제신농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수렵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사회로 진입하였음을 나타내며, 이로 인해 동시에 여러 인류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직(后稷)씨는 농경신으로 오곡의 신을 말한다.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해 낳았다 하며, 3차례나 내다 버렸으나 그때마다 구조되었다고 한다. 후직은 원래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직책의 이름이며 후(后)는 군(君), 직(稷)은 오곡을 뜻한다. 제신농씨의 자리를 단 위의 북쪽에 남쪽 방향으로 설치하고, 후직씨는 단 위의 동쪽에 서쪽 방향으로 설치하였다.
선농단 일대는 1908년 사직단(社稷壇)으로 신위가 옮겨진 후 일제에 의해 공원화(청량공원/전농공원)되었고, 해방 이후 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거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후 선농단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1년에 국가 사적 제436호로 재지정되었다. 1979년부터 지역주민들에 의해 복원이 시도되어 2015년 4월 30일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높이 10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2m 정도인 서울 선농단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40호)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늘푸른큰키나무인 향나무는 대개 자라면서 휘어지는데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위로 곧게 자랐다. 안내판에는 수이선농단원백(首尓先农坛圆柏)이라는 한자 타이틀이 있는데 서울을 수이(首尓)라 표기한 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농단을 둘러본 후 왕산로 횡단보도를 건너 제기동역 3번출구 쪽의 동대문구립 한의약박물관(동의보감타워 B2)으로 내려갔다. 다양한 한의약 관련 유물과 동물계·식물계·광물계의 각종 한약재가 전시되고 있었고, 한방체험장에서는 한방차를 시음하며, 사상체질 감별도 받을 수 있다.
조선초기 왕명으로 설립되어 병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던 의료기관이자,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했던 빈민구제기관이었다는 보제원(普濟院)의 축소모형도 새로웠다.
원집 원(院)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개 국영여각(旅閣)으로 숙박소나 역참(驛站), 구휼기관이 있던 곳인데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이 있다.
특히 동대문에서 3리 정도 떨어진 보제원은 넓게(普) 구제(求濟)한다는 의미처럼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주는 진제장(賑濟場) 및 약방과 의원을 배치하여 오늘날의 보건소 역할을 하였기에 사람이 모여들고 중부권의 농산물과 약초 등이 집중되면서 시장과 약재상가가 형성되었다.
한의약박물관에서 왕산로 건너편으로 제기동역 2번출구 방면에는 서울약령시(藥令市)가 위치한다. 왕명에 의해 각종 약재의 교환·매매를 주관하던 약령시는 효종(1649~1659) 때 약재의 집합이 편리했던 대구·원주·전주의 3개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자금제공 등으로 폐쇄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던 대구약령시의 규모가 가장 컸으나 요사이엔 경동시장과 연결된 서울약령시가 압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약재상들이 문을 닫았고, 평일이라해도 투어 재미는 그닥 없을 듯하다. 20층을 웃도는 고층건물도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반면에 서울약령시와 인접한 경동시장(京東市場)은 정말 볼거리가 풍부하다. 인삼·당귀 등의 한약재, 체리·포도·미나리 같은 청과물, 스팸류 가격이 무지 착하고, 온누리상품권도 막힘없이 통용된다. 1천원에 찐옥수수 2개, 5천원에 돼지 머릿고기 소자를 기분 좋게 사넣었다. 경동시장, 청량리청과물도매시장, 청량리전통시장을 통과하여 청량리역 방면에서 좌회전, 홍릉로를 따라 영휘원으로 고고씽~
사적 제361호인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은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嚴貴妃)와 손자인 이진(李晉)의 묘소이다.
가세가 빈한했던 엄씨(1854.2.2~1911.7.20)는 일찌기 궁녀로 입궐(1859)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31세(1885)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 의해 퇴궐당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피살당한 이후에 재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1896) 때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모셨으며 1897년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출산하고 상궁에서 귀인으로 다시 순빈, 순비로 진봉되었으며 1903년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말년에는 장티푸스로 고생하다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광무9년(1905)에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이듬해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뒤에 숙명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여 근대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 걸려있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진(1907년경)을 촬영해 봤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용모인데,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진(李晉, 1921.8.18~1922.5.11)은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은(李垠, 1897.10.20~1970.5.1)과 흔히 이방자(李方子) 여사로 알려진 일본 왕족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1.4~1989.4.30)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순종황제는 생후 9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특별히 원(園)으로 조영(숭인원)하였고, 결국 그의 할머니인 순헌귀비의 묘(영휘원) 옆에 묻히게 되었다.
높이 9m, 둘레 2.3m, 추정 수령 150년으로 천연기념물 제506호였던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는 2015년 태풍 볼라벤의 강풍피해와 생리적 노쇠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고사하는 바람에 국가지정문화재가 지정해제되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묘역 입구 안쪽의 조선시대 왕계도는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 엉망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료가 5백원이다. 영휘원의 입장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1995)와 같은 1천원인데… 무료나 5백원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으로 처음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강남구 내곡동)에 있었다. 그러나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일어나서 예종 원년(1469)에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했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石物)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현지 주변 땅에 묻혔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남아있는 구 영릉 석물은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난간주석, 혼유석, 세종대왕신도비 등인데 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 왔다. 품목과 수량이 당초와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모른다.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인 석호는 여주 영릉과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1805호인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는 옛 영릉터에서 약 1㎞ 떨어진 순조의 인릉(仁陵)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정분(鄭苯)과 민신(閔伸)의 감독 아래 1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된 비는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다. 조선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수(螭首)의 중앙 아래쪽에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총 4,886자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멸로 판독이 어려우나, 대체적인 내용은 세종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왕후·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을 적은 것이다. 앞면의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은 김조(金銚)가 지었으며, 전액과 글씨는 세종의 3남이자 명필로 이름난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썼다. 총높이 507㎝, 비신 높이 312㎝, 폭 155㎝, 두께 50㎝에 달하는 큰 비석은 현재 보호각 안에 있어 일반인들이 들여다보기도 불편하고 사진 촬영은 더더구나 어려운 모습이다.
수표(水标)는 대개 홍수대비 목적으로 하천의 물 높이를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만든 표지석인데 1441년(세종23)에 나무로 만들어 처음 세웠고 성종 때(1469~1494)에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 수표(보물 제838호)는 조선시대에 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기 위하여 수표교(水標橋) 서쪽에 세웠던 수위측정기(水位測定器)이다. 수표에 있는 ‘계사갱준(癸巳更濬) 기사대준(己巳大濬)’의 글씨는 영조의 경진준천(1760) 이후에 다시 청계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을 트는 준설(浚渫)을 하면서 새긴 것이다. 전체 높이는 3m. 청계천 바닥에 직육면체의 초석(礎石)을 두고 그 위를 기둥 모양으로 깍아 세웠으며 맨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돌기둥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육각 모양으로 만들어 그 표면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다. 한 눈금은 주척(周尺) 1자로 평균 21.5㎝ 간격이다. 3척·6척·9척 선상에는 Ο표를 음각하여 각각 갈수(渴數 가뭄), 평수(評水 평균수위), 대수(大水 홍수)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물이 6척 안팎은 보통수위이며 9척이 넘으면 위험수위로 보고 청계천이 범람할 수도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이 수표는 청계천을 덮는 복개공사 때문에 장충단(奬忠壇)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농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가뭄과 홍수를 예측했던 과학문화재로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기념관 맞은편의 홍릉수목원과 경희대 캠퍼스 투어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기대된다.
때문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1호선 제기동역 1번출구의 선농단이다. 선농단(先農壇)은 조선시대에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북악산의 한 줄기인 개운산(開運山)이 우이령을 거쳐 정릉천을 따라 내려오는 비옥한 땅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거의 일직선상에 놓인 명당으로서 그 범위가 남쪽으로 청풍계천(청계천),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성북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농단 일대는 과거 평촌으로 불렸으며, 왕이 몸소 밭갈이를 시범하는 친경례 장소인 동적전은 선농단과 청계천 사이의 영역을 포함한다.
선농대제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며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농사와 관련해서 24절기 중 1번째 절기인 입춘 후에 지내는 선농제(中農祭)뿐만아니라 7번째 절기인 입하 후에 중농제(先農祭), 13번째 절기인 입추 후에 후농제(後農祭) 이렇게 3번의 제사를 올리는 독특성을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선농대제와 함께 왕이 몸소 쟁기를 잡고 발갈이하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의식을 성종 때 처음으로 시행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땅을 활용하여 적전(籍田)을 설치했다.
친경이 끝난 후 문무백관 및 백성들이 제물로 올렸던 귀한 고기로 국물을 내어 밥을 말아 나누어 먹던 풍습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내린 국밥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고 부르던 것이 발음하기 쉽도록 설롱탕을 거쳐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직접 농기구를 잡고 농사를 짓는 친경의식을 행한 후에 조정 중신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나누어 먹었던 설렁탕이야말로, 백성을 위로하고 기꺼이 고락을 함께 하고자 하는 통치자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친경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4년(1910)까지 계속되었다.
선농단에서는 제신농씨를 1번째로 후직씨를 2번째로 모셨는데, 본래 선농단에는 위패를 모시는 신실을 두지 않았고 제사를 드릴 때, 신실에 봉안하였던 제신농씨와 후직씨의 신위를 모셔왔다. 염제(炎帝)라고도 불리는 제신농(帝神農)씨는 불의 신, 태양의 신, 농업의 신, 의약의 신이자, 차의 시조이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최초로 시장을 개설하여 인류 문명의 원천을 제공한 이로 묘사되고 있다. 제신농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수렵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사회로 진입하였음을 나타내며, 이로 인해 동시에 여러 인류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직(后稷)씨는 농경신으로 오곡의 신을 말한다.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해 낳았다 하며, 3차례나 내다 버렸으나 그때마다 구조되었다고 한다. 후직은 원래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직책의 이름이며 후(后)는 군(君), 직(稷)은 오곡을 뜻한다. 제신농씨의 자리를 단 위의 북쪽에 남쪽 방향으로 설치하고, 후직씨는 단 위의 동쪽에 서쪽 방향으로 설치하였다.
선농단 일대는 1908년 사직단(社稷壇)으로 신위가 옮겨진 후 일제에 의해 공원화(청량공원/전농공원)되었고, 해방 이후 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거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후 선농단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1년에 국가 사적 제436호로 재지정되었다. 1979년부터 지역주민들에 의해 복원이 시도되어 2015년 4월 30일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높이 10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2m 정도인 서울 선농단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40호)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늘푸른큰키나무인 향나무는 대개 자라면서 휘어지는데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위로 곧게 자랐다. 안내판에는 수이선농단원백(首尓先农坛圆柏)이라는 한자 타이틀이 있는데 서울을 수이(首尓)라 표기한 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농단을 둘러본 후 왕산로 횡단보도를 건너 제기동역 3번출구 쪽의 동대문구립 한의약박물관(동의보감타워 B2)으로 내려갔다. 다양한 한의약 관련 유물과 동물계·식물계·광물계의 각종 한약재가 전시되고 있었고, 한방체험장에서는 한방차를 시음하며, 사상체질 감별도 받을 수 있다.
조선초기 왕명으로 설립되어 병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던 의료기관이자,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했던 빈민구제기관이었다는 보제원(普濟院)의 축소모형도 새로웠다.
원집 원(院)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개 국영여각(旅閣)으로 숙박소나 역참(驛站), 구휼기관이 있던 곳인데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이 있다.
특히 동대문에서 3리 정도 떨어진 보제원은 넓게(普) 구제(求濟)한다는 의미처럼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주는 진제장(賑濟場) 및 약방과 의원을 배치하여 오늘날의 보건소 역할을 하였기에 사람이 모여들고 중부권의 농산물과 약초 등이 집중되면서 시장과 약재상가가 형성되었다.
한의약박물관에서 왕산로 건너편으로 제기동역 2번출구 방면에는 서울약령시(藥令市)가 위치한다. 왕명에 의해 각종 약재의 교환·매매를 주관하던 약령시는 효종(1649~1659) 때 약재의 집합이 편리했던 대구·원주·전주의 3개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자금제공 등으로 폐쇄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던 대구약령시의 규모가 가장 컸으나 요사이엔 경동시장과 연결된 서울약령시가 압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약재상들이 문을 닫았고, 평일이라해도 투어 재미는 그닥 없을 듯하다. 20층을 웃도는 고층건물도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반면에 서울약령시와 인접한 경동시장(京東市場)은 정말 볼거리가 풍부하다. 인삼·당귀 등의 한약재, 체리·포도·미나리 같은 청과물, 스팸류 가격이 무지 착하고, 온누리상품권도 막힘없이 통용된다. 1천원에 찐옥수수 2개, 5천원에 돼지 머릿고기 소자를 기분 좋게 사넣었다. 경동시장, 청량리청과물도매시장, 청량리전통시장을 통과하여 청량리역 방면에서 좌회전, 홍릉로를 따라 영휘원으로 고고씽~
사적 제361호인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은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嚴貴妃)와 손자인 이진(李晉)의 묘소이다.
가세가 빈한했던 엄씨(1854.2.2~1911.7.20)는 일찌기 궁녀로 입궐(1859)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31세(1885)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 의해 퇴궐당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피살당한 이후에 재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1896) 때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모셨으며 1897년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출산하고 상궁에서 귀인으로 다시 순빈, 순비로 진봉되었으며 1903년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말년에는 장티푸스로 고생하다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광무9년(1905)에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이듬해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뒤에 숙명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여 근대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 걸려있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진(1907년경)을 촬영해 봤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용모인데,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진(李晉, 1921.8.18~1922.5.11)은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은(李垠, 1897.10.20~1970.5.1)과 흔히 이방자(李方子) 여사로 알려진 일본 왕족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1.4~1989.4.30)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순종황제는 생후 9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특별히 원(園)으로 조영(숭인원)하였고, 결국 그의 할머니인 순헌귀비의 묘(영휘원) 옆에 묻히게 되었다.
높이 9m, 둘레 2.3m, 추정 수령 150년으로 천연기념물 제506호였던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는 2015년 태풍 볼라벤의 강풍피해와 생리적 노쇠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고사하는 바람에 국가지정문화재가 지정해제되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묘역 입구 안쪽의 조선시대 왕계도는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 엉망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료가 5백원이다. 영휘원의 입장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1995)와 같은 1천원인데… 무료나 5백원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으로 처음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강남구 내곡동)에 있었다. 그러나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일어나서 예종 원년(1469)에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했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石物)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현지 주변 땅에 묻혔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남아있는 구 영릉 석물은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난간주석, 혼유석, 세종대왕신도비 등인데 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 왔다. 품목과 수량이 당초와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모른다.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인 석호는 여주 영릉과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1805호인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는 옛 영릉터에서 약 1㎞ 떨어진 순조의 인릉(仁陵)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정분(鄭苯)과 민신(閔伸)의 감독 아래 1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된 비는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다. 조선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수(螭首)의 중앙 아래쪽에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총 4,886자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멸로 판독이 어려우나, 대체적인 내용은 세종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왕후·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을 적은 것이다. 앞면의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은 김조(金銚)가 지었으며, 전액과 글씨는 세종의 3남이자 명필로 이름난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썼다. 총높이 507㎝, 비신 높이 312㎝, 폭 155㎝, 두께 50㎝에 달하는 큰 비석은 현재 보호각 안에 있어 일반인들이 들여다보기도 불편하고 사진 촬영은 더더구나 어려운 모습이다.
수표(水标)는 대개 홍수대비 목적으로 하천의 물 높이를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만든 표지석인데 1441년(세종23)에 나무로 만들어 처음 세웠고 성종 때(1469~1494)에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 수표(보물 제838호)는 조선시대에 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기 위하여 수표교(水標橋) 서쪽에 세웠던 수위측정기(水位測定器)이다. 수표에 있는 ‘계사갱준(癸巳更濬) 기사대준(己巳大濬)’의 글씨는 영조의 경진준천(1760) 이후에 다시 청계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을 트는 준설(浚渫)을 하면서 새긴 것이다. 전체 높이는 3m. 청계천 바닥에 직육면체의 초석(礎石)을 두고 그 위를 기둥 모양으로 깍아 세웠으며 맨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돌기둥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육각 모양으로 만들어 그 표면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다. 한 눈금은 주척(周尺) 1자로 평균 21.5㎝ 간격이다. 3척·6척·9척 선상에는 Ο표를 음각하여 각각 갈수(渴數 가뭄), 평수(評水 평균수위), 대수(大水 홍수)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물이 6척 안팎은 보통수위이며 9척이 넘으면 위험수위로 보고 청계천이 범람할 수도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이 수표는 청계천을 덮는 복개공사 때문에 장충단(奬忠壇)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농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가뭄과 홍수를 예측했던 과학문화재로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기념관 맞은편의 홍릉수목원과 경희대 캠퍼스 투어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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