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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恩光衍世(은광연세)… 은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다

우리 역사 속 이름을 남긴 여성들 ②김만덕

양인에서 기녀로, 존경받는 만덕할망으로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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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문해 중학과정 사회 3학년 교과서는 ‘Ⅳ-3. 역사 속 여성들의 생활’ 단원에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4人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단원은 역사를 빛낸 여성들의 삶이 우리와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두번째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영조 때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의 2남1녀 중 막내딸로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양가집 출생이었지만, 12세가 되던 1750년(영조26)에 전국을 휩쓴 기근과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제주목 기녀의 수양딸로 맡겨졌다. 교방에서 노래와 춤, 거문고를 배우고 18세 때 기적에 올라 나중에는 기녀의 우두머리인 행수기녀가 되었다.

이후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김만덕은 22세 무렵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달라”고 탄원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제주목사 신광익과 제주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거듭 호소하여 24세(영조38)에 기어코 양인 신분을 회복하였다.

결혼하지 않고 제주목 동문 밖에 객주를 차린 김만덕은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 등 제주의 특산물을 육지에 내다 팔고 육지에서는 제주도의 수요품을 사들여 되파는 뛰어난 상술로 50대에 들어서 육지의 대부호 못지않은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김만덕이 50대 초·중반이던 1790년(정조14)부터 1794년(정조18)까지 수년간 계속된 흉년으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만덕은 제주 관덕정에 큰 솥을 걸고 손수 죽을 쑤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1795년, 조정에서 구호미를 보냈지만, 바다를 건너 오는 도중 수송선이 침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덕은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천금을 털어 육지에서 쌀과 곡식 500여 석을 사들였다. 이중 십분의 일은 자신의 친족을 살리고, 450여 석은 제주목 관아에 진휼미로 기부하였다. 관아에 쌀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굶주린 사람들이 김만덕을 칭송하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채제공은 「만덕전」에서 “정조 20년 6월 6일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육지에서 사들였다. 모든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면 만덕은 그중 십분의 일을 취하여 그의 가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실어 날랐다.”고 기록했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일성록」에도 “노기 만덕은 스스로 원하여 쌀 3백 석을 바쳤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제주목사의 보고로 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는 기특하게 여겨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전하였다. 이에 김만덕은 한양에 올라가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아뢰었다. 당시에는 출륙금지령으로 제주 사람은 섬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또한 평민 신분의 만덕이 임금을 알현할 수 없었기에 벼슬을 받아야 했다. 만덕은 내명부나 외명부 어디에도 속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정조는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명예직을 제수하고 예궐을 허락하였다. 1796년 58세의 만덕은 한양으로 올라가 정조에게 직접 벼슬을 받고, 효의왕후에게 상을 받은 뒤 정조의 배려를 받아 이듬해 봄 금강산에 들어가 1만2천봉의 장관을 돌아보았다.

김만덕은 이 과정에서 반년가량 한양에 머물면서 채제공,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 등 많은 문인을 만나 교류하였는데, 만덕을 송별하며 지은 시문이 한 권의 첩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금강산 관광 후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갔다. 김만덕은 평생 독신으로 자선사업을 계속하여 온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만덕할망”이라 불리다가 1812년(순조12) 7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만덕은 고으니모루(현 국립제주박물관 정문 앞 부근)에 묻혔다가, 일주도로 확장에 따라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 소재 모충사 경내의 묘탑 아래에 이묘되었다.

1840년(헌종6) 제주에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큰 감명을 받아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라는 편액을 써서 칭송하였다. 제주도는 1980년부터 매년 김만덕의 기일(10월 22일)에 가까운 일요일, 건입동 사라봉 모충사에서 ‘만덕제’를 봉행하고 ‘김만덕상’을 시상해 오고 있다. 또한,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5년 5월, 김만덕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김만덕은 2007년 5만원 위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0년 KBS 1TV의 특별기획 드라마 「거상 김만덕」에서 배우 이미연(아역 심은경)이 시대의 한계를 극복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열연했다.


2024년 11월 5일 화요일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

우리 역사 속 이름을 남긴 여성들 ①신사임당

여성 인물을 화폐에, 그러나 현모양처 이미지에는 거부감 보이기도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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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문해 중학과정 사회 3학년 교과서는 ‘Ⅳ-3. 역사 속 여성들의 생활’ 단원에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4人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단원은 역사를 빛낸 여성들의 삶이 우리와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첫번째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이라고 알려진 사임당 신씨(1504~1551)는 평산신씨 신명화와 용인이씨의 둘째딸로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본받고자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삼았다.

18세(1522)에 덕수이씨와 혼인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살다가 시댁이 있는 한양과 시댁의 본거지인 파주 율곡리로 이주하고 남편을 따라 평창군 봉평에 거주하기도 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율곡 이이(1536~1584)가 셋째 아들이다. 넷째 아들 이우(1542~1609)는 금서시화(琴書詩畵)에 능통하여 ‘사절(四絶)’이라 칭송받았다.

맏딸 이매창(1529~1592) 역시 “이 어머니에 이 딸이 있다”고 기록될 만큼 금서시화에 뛰어났다. 선조 때의 부안(扶安) 기생 이매창(李梅窓·계랑, 1573?~1610?)과 동명이인이어서 혼동하기 쉽다.

<>신사임당의 그림 「훤원석죽」(원추리꽃과 패랭이꽃), 지본채색, 25.7×41.0㎝, 간송미술관 소장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시와 글씨, 그림에 재능을 보여 「초충도」 「양귀비꽃과 호랑나비」 등 다수의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을 남겼으나, 일부 연구자는 진작(眞作)이 희소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들 이율곡이 서인의 종주로 추대되면서 신사임당은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2009년 5만원 신권이 발행되기 이전인 2007년부터 여성 위인을 화폐의 모델로 삼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여성계 일각에서는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21세기의 상징 인물로는 다소 무리가 있다”면서 김만덕, 유관순, 허난설헌, 이태영, 윤희순, 임윤지당, 이빙허각 등을 추천하기도 했다.

2017년 신씨의 생애를 재해석한 SBS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배우 이영애가 사임당 역으로 출연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충주 탄금대전투의 지휘관 신립(1546~1592) 장군이 신사임당의 친정 조카가 된다. 1956년 이승만에 맞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돌연사한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1892~1956)도 신사임당의 가문이다.

2024년 3월 8일 금요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Women Who Read Are Dangerous)

표지의 그림은 스페인 화가 라몬 카사스(Ramon Casas i Carbo, 1866~1932)의 「Jove decadent (Despres del ball)」(무도회가 끝난 뒤l)이다. 무도회가 끝나고 난 뒤 지친 몸을 그대로 초록 소파에 던져 놓은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오른손에 든 노란색 책을 응시하고 있다.

[상] Stefan Bollmann, 「Women Who Read Are Dangerous」
[하] Ramon Casas i Carbo(1866~1932), 「Jove decadent (despres del ball)」, 1899. Oil on canvas, 46.5×56㎝. Donation from J. Sala Ardiz. Museum of Montserrat.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저자 슈테판 볼만(Stefan Bollmann)은 “책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게 된 순간부터 여자들은 가정에 대한 순종을 벗어 던지고 독립적 자존심을 얻게 되었으며, 현실과 꿈을 오가는 그녀들의 시선은 예술가를 유혹하는 은밀한 위험이 되었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독립적으로 되며, 독립적인 사람은 대열을 벗어나 적(敵)이 된다”고도 했다.
엘케 하이덴라이히(Elke Heidenreich)는 추천사에서 “통제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가진 사람(신, 남편, 행정부, 교회!)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신은 어쩌면 독서에 대해서만큼은 한 눈을 감고 못 본 체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요컨대 책을 통해 자기 세계를 갖는 것, 그래서 의견이 생기고 자기주장을 하는 여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 싸움을 걸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내 주변엔 이른바 위험한 여자들이 많다. 빵과 장미와 책이 늘 그대들과 함께하길…

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王을 낳은 後宮들

청와대 옆 궁정동에는 칠궁(七宮)이 있다. 무슨 궁궐 이름이 아니라 후궁 7人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수많은 후궁 중 王을 낳았기 때문에 특별히 모셔놓았다. 원래는 독립된 7개의 사당이 각기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다 융희 2년(1908)에 제사제도를 정비하면서 육상궁에 다른 5개의 사친묘를 합사하여 육궁(六宮)이라 하였는데, 1929년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지금처럼 칠궁(七宮)이 되었다.

칠궁은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의 대빈궁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의 육상궁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의 선희궁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의 경우궁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의 덕안궁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이씨의 연호궁 △선조의 후궁이면서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김씨의 저경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들을 낳은 내명부 여성은 권력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순조의 모친인 수빈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들이 王이 되기 전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조선후기에는 후궁이 낳은 王이 늘어남에 따라 그 모친의 추존논쟁이 빈번해졌다.

최선경의 「왕을 낳은 후궁들」(2007·김영사)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모친인 폐비윤씨와 공빈김씨도 소개하고 있다. 아들의 성공을 통해서만 그 존재의미가 부여됐던 여성들의 삶을 시기 모함의 궁중암투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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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2023 칠궁제」 봉행
매년 10월3째주 화요일에 2개 영역에서 동시 제향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10

「2023 칠궁제(七宮祭)」가 17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봉행되었다.

칠궁(사적 제149호)은 역대 왕이나 추존된 왕의 모후로서, 종묘에 부묘되지 못한 일곱 후궁(後宮)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숙빈묘(淑嬪廟)에서 비롯했다. 육상묘(毓祥廟),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숙빈최씨의 사우(祠宇)에 1908년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등 5개의 묘당을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다. 1929년에는 덕안궁이 옮겨와서 지금처럼 칠궁(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궁은 영역 좌측부터 ①저경궁(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 ②대빈궁(경종의 생모 희빈장씨) ③선희궁(장조의 생모 영빈이씨) ④경우궁(순조의 생모 수빈박씨) ⑤덕안궁(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엄씨) ⑥육상궁(영조의 생모 숙빈최씨) ⑦연호궁(추존왕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 순으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과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날 제례는 제관들이 봉무할 자리로 나아가는 취위(就位)를 시작으로 △신관례(晨祼禮) △진조례(進俎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籩豆) △송신례(送神禮) 후 축문 불사르는 것을 확인하는 망료(望僚) 순으로 진행됐다.

칠궁은 공간 특성상 한 곳에서 제사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저경궁 영역의 5개 궁(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덕안궁)과 육상궁 영역의 2개 궁(육상궁·연호궁)으로 나누어 동시에 제사를 거행한다. 제향일은 매년 10월 3째주 화요일이다.

「2023 칠궁제」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직지대모 박병선

오늘 중학2단계 사회시간에는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공부했다. 늘 그렇듯 문해교과서의 내용을 보충하는 심화 인쇄물을 준비했다. 어머니들은 고려청자의 이름 붙이는 방법을 재미있어하신다. ①맨 앞에 ‘청자’를 나타냄 ②기법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상감·양각·음각·투각 등 ③그릇에 표현된 무늬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운학무늬(구름+학), 포도동자무늬(포도+아이) 등 ④그릇의 용도를 씀 → 매병, 정병, 접시, 주전자, 향로, 항아리, 연적 등… 이렇게 하면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주전자 △청자 양각 죽절문 병 △청자 음각 연화당초문 매병 △청자 투각 칠보문뚜껑 향로 같은 이름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분청사기나 백자의 작명에도 적용된다.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4자의 긴 이름이다. 공민왕 때인 1377년 서원부(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은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 앞선다. 현재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이곳 사서로 근무하며 「직지심체요절」(1967)과 외규장각 「의궤」(1975)를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한 서지학자 故 박병선 박사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청사까지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2011년 5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보고 그해 11월22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올바른 신념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굳은 열정은 외딴 곳에 홀로 서서 눈을 맞는 갈매나무다. 오늘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 일생을 헌신한 ‘직지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의 기일(한국시간 11.23)이다. 언젠가 동작동 현충원으로 체험학습을 나가게 되면 함께 충혼당(108실 075호)을 찾아 뵙기로 약조했다.

세계기록유산 증서. 유네스코는 2001년 9월4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2004년 4월28일 ‘직지상’을 제정하였다. 한편, 우왕 때인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은 상·하권 1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돼 있다.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7월27일,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전쟁반대, 평화선언 대회에 선보인 극단 ‘경험과상상’의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 교차 편집으로 리얼리티를 더했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난다. 소녀들은 트럭에 배에 다시 트럭에 배에 실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동한다. 혼인을 앞둔 막둥이가 잠순이 언니도 못가본 시집을 자기가 간다고 미안하다고 혼자 펑펑 서럽게 울더라는 (꿈속) 엄니의 말…

지옥 같은 더딘 시간이 흐른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한다. 셋은 홋카이도에 있는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왔노라고 미리 말을 맞췄다. 소녀들은 밥을 얻어먹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온다. 잠순이는 집에 오는 길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엄니의 신신당부를 기억하여 도정면 산새리 구장님 땅콩밭 지나서 첫번째 집 앞까지 온다. 기쁨도 잠시, 잠순이는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바라만 보다가 더럽혀진 몸으로 차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멀리 가서 맘 편히 살자. 일본 남자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미국 남자 만나서 멀리 떠났다고 하자. 조선은 지긋지긋하다고, 엄니 아부지 보고 싶지도 않다고…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 낯선 말, 낯선 눈빛에 둘러싸여 서로 의지하며 웅크리고 살아간다. 경희가 죽고 언니도 따라 죽고, 혼자 남은 잠순이 할머니는 인자 부엌에서 도마질하는 엄니 뒷모습, 마당 한켠에서 작두질하던 아부지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흩어지고 사라진 세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할머니의 소원이다. 타이틀곡 「갈 수 없는 고향」(한돌 사·곡)의 제목과 노랫말에 공명하며 진도아리랑 한 구절을 읊조린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19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광화문서 「7.27 평화선언대회」 개최
경험과상상,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 공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이하 민족위)는 정전협정 69주기인 7월27일(수) 오후 6시, 광화문 미대사관 우편 인도(5호선 광화문역 2번출구)에서 1, 2부로 나누어 「7.27 평화선언 대회」를 개최했다.

먼저 1부 순서에는 극단 ‘경험과상상’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기법으로 구성됐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세 소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맞닥뜨린다. 세월은 흘러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소녀들은 그리운 고향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잠순이는 더럽혀진 몸으로 도저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지켜만 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먼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숨죽여 살아간다. 경희와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잠순이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소원이다.

잠순이 할머니는 “전쟁은 절대로 안 돼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평화를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전쟁할라고 지랄하는 놈들(미국·일본·윤석열)하고 싸워야지. 또 통일을 해야 외세가 간섭을 못하고 전쟁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자주를 해야 평화가 오고 통일을 해야 평화가 옵니다.”라면서 “독립운동했던 선조들이 만들고 싶었던 나라, 우리가 만들어야지요. 이제 다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제의식이 집약된 할머니의 대사에 관객들은 큰 호응의 목소리와 박수로 화답했다. 뮤지컬은 9명의 배우가 함께 부르는 ‘아리랑’ ‘뱃놀이’ ‘진도아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27일 저녁, 광화문역 2번출구 인도에서 극단 ‘경험과상상’ 배우들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열연하고 있다. (사진=민족위 구산하)

2부는 사회자(민족위 김성일)의 안내에 따라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를 지키자!”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발언에 나선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는 “현재 전쟁 가능성이 큰 이유는 미국과 일본과 윤석열 때문이다. 남북이 합의한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고 통일도 할 수 있다”며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라고 강조했다.

윤미향 국회의원은 일본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는 것으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12월 28일의 굴욕적인 한일위안부합의를 소환했다. 윤 의원은 “국가책임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아닌 2015합의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왜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나”라면서 “전세계 1억인 평화선언으로 한반도에 정전, 휴전이 아닌 평화와 통일이 온다는 확신을 갖고 포기하지 말고 동행해 나가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소원 학생(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이제는 이 긴 전쟁을 끝내야 한다. 전쟁의 끝맺음은 무력을 통한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맞춰가는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한다”라고 전제한 후 “전임자들이 북과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면서 선제타격을 외치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화하는 전쟁광 윤석열을 퇴진시켜야 한다. 저희 대학생들도 앞장서서 우리의 평화, 미래를 위해 행동할테니 여러분들도 함께해 달라”라고 역설하여 함께한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펼쳐진 이날 「7.27 평화선언 대회」는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 김은진 교수(원광대로스쿨), 류성 대표(극단 경험과상상)가 ‘전쟁반대 평화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성료했다.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한 7.27 평화선언 운동에 이날까지 48개 단체와 852명이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민족위는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끝날 때까지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 전쟁반대 평화선언」 운동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후원: 우리 1005-604-265463)

류성(좌), 김은진(중), 백자(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공동대표가 「7.27 평화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2022년 7월 24일 일요일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

유토피아(utopia)의 u가 ‘없다’인 것처럼 아나키(anarchy)의 a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각각 ‘장소가 없다’, ‘지배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왜곡된 번역 ‘무정부주의’가 아닌 ‘무권력주의’ ‘무강권주의’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일찌기 아나키를 민중이 직접 세우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질서(Anarchy is Order=Ⓐ)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블랙 컬러를 선호하여 흑도회(黑濤會), 흑풍회(黑風會), 흑우연맹(黑友聯盟), 흑전사(黑戰社),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 같은 조직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제는 문경에서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과 워크숍에 함께했다. 지역 분위기는 지역신문의 취재조차 없을 정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1923년과 1926년 사이 대역사건과 괴사진사건으로 내각이 교체될 만큼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21살, 20살짜리 아나키스트에 주목할 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은 두텁지 않다. 가네코의 추도식임에도 불구하고 워크숍 발제 중 가네코 지사에 대한 온전한 논의는 전무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 문제를 꺼내고 싶었는데, 김미령 대표(자립지지공동체)님이 가네코 후미코의 제삿날에 남편(박열) 얘기만 해서 되겠느냐는 뼈 때리는 발언을 해주셔서 속이 시원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님 애쓰셨다. 무엇보다 60명 추모단을 이끌어주신 바우 손병주 회장님, 묵묵히 뒷받침해주신 이은영 사모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15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 봉행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 개최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1903~1926) 지사 96주기 추도식 및 워크숍이 7월23일(土) 오전과 오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공원 내 묘역과 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도식은 지역 내 정관계인사와 지역주민, (사)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회(네이버밴드) 멤버들이 함께한 가운데 약력보고, 추도사, 헌화와 분향 순으로 1시간가량 진행됐다. 특히 추도사에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氏가 전해온 연대의 인사말이 대독돼 의미를 더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지사 96주기 추도식이 7월23일(토) 10시30분, 박열의사기념공원 안에 모신 지사의 묘소 앞에서 봉행됐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당시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여서 소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다. 이후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고모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부강심상소학교에 적을 두고 약 7년 동안 학대받으며 부엌데기를 했다. 가네코는 1919년 부강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라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관계자와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2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문경 출신의 박열을 만나 동거를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대한 투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발생 이틀 후, 일제의 한인 단속에 부부는 불령사(不逞社)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이 알려지자 일제는 이를 천황 암살을 도모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는데, 10일 만에 이례적으로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지역의 형무소로 이감됐다. 3개월 후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아이를 밴 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동지들의 사인규명과 시신인도 요구가 묵살되어 타살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박열의 형 박정식이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제는 문제가 있는 유골이라 잘못돼서는 안 된다면서 유골을 소포로 상주경찰서로 보냈다. 가네코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8㎞ 북쪽의 팔영리 산중턱에 묻혀 방치돼 오다가 2003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사후 92년이 지난 2018년 가네코 후미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2004년 애족장)에 이어 2번째 서훈이다. 남편 박열 의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유일한 한일 부부 서훈자이기도 하다.

박열의사기념관 1, 2층에 전시된 초등학생들의 기록화. 박열-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의 옷을 입고 일제 검사·판사를 상대로 법정 투쟁하는 모습을 어린 학생들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은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50분까지 박열의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1,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워크숍의 첫 순서는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16개월 동안 발간한 3가지 제호에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에 대한 발제로 시작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잡지 ‘黑濤’의 제호는 아나키즘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에스페란토어 ‘LA NIGRA OND’가 병기되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절대자유를 강조한 아나키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흑도 폐간 후 발행한 ‘후토이 센징’(담대한 선인)은 검열 당국이 ‘후테이 센징’(不逞鮮人, 못된 조선놈)의 사용을 불허하여 엇비슷한 발음의 월간 잡지로 발간한 것이다. ‘흑도’와 달리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을 담았고, 박열의 아나키즘 예술론도 엿볼 수 있다. ‘후토이 센징’마저 과격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자 제호를 바꿔 3, 4호를 발간한 ‘現社會’는 당시 일제가 안고 있던 각종 모순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발간한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기사 투고자나 광고 참여자에는 1920년대 초 일본의 거의 모든 아나키즘 운동, 마르크시즘 운동 계열의 인물 및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

7월23일(토) 오후, 한국아니키즘학회장을 지낸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두 번째 발제에서 성주현 교수(1923제노사이드연구소)는 「해방 후 박열과 재일한인사회」를 고찰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22년 2개월이라는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1945년 10월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를 출소했다. 이후 신조선건설동맹(건동) 초대위원장,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거류민단)과 후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재일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도쿄를 방문,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고, 박열은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이는 이강훈, 원심창 등 단독정부 수립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그룹의 배제와 이탈을 가져왔다.
또한, 군국주의의 복멸과 천황제 타도를 주장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김천해와 달리 박열은 천황제 인정과 일본 내정 불간섭을 천명하여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의 위상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해방 후부터 1949년 영구 귀국까지 5년간 박열의 재일한인사회 활동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 세 번째 발제는 신진희 학예연구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가 「박열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주 내용은 1920년대 초반 일본과 조선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메이커 박열의 생애사, 사상사, 독립운동사 연구를 더듬어 정리한 것이다. 발제문에 아나키즘과 독립운동 분야를 나누어 서술하였지만 둘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발제 제목과 달리 연구 전망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있었다.

전반부의 3개 발제에 따른 후반부 지정토론 시간은 김명섭 교수(단국대)가 좌장 사회를 맡았다. 조동범 교수(중앙대), 김인덕 교수(청암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지정토론에 나섰고, 이어 질의응답 시간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한편, 이날 추모식·워크샵은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가 실무를 맡고, 역사나그네 손병주 회장(성남역사문화답사회)이 60명 규모의 추모단을 이끌면서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전경  [아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묘역

2021년 7월 20일 화요일

제1500차 수요시위 공동주관인 참여

7월14일 수요일… 사전에 인터넷으로 지원한 11개국 1500명 공동주관인의 일인으로 제1500차 수요시위에 유튜브 라이브로 참여했다. 1992년 1월8일부터 2021년 7월14일까지 1500차, 10500일, 29년 동안 매주 수요일을 맞았지만 여전히 무도한 일본정부는 1500번의 외침을 무시하고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지속적으로 외면·왜곡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채널(https://www.youtube.com/c/thekoreancouncil)을 보니 종로구 수송동 현장이 꽤 소란스러워 보였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수꼴들이 몰려와 악다구니를 써댔단다. 본국의 지침이 있었던 게지.

수요시위 유튜브 중계화면에서 나비모양 현수막에 인쇄된 1552명의 공동주관자 중 자기 이름을 찾아 캡처한 후 지정된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인증하면 추첨을 통해 나비뱃지를 증정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미 뱃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뱃지를 받으려고 참여한 건 아니니 상관은 없다.

올 8월14일이면 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30년, 기림일을 맞게 된다.

정의기억연대의 표현처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이자 가장 슬픈 시위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시위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연대의 힘은 바위처럼 강하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

#수요시위 #수요시위를지키는사람들 #강제동원사죄하라 #바위처럼 #1500차수요시위 #1500thWednesdayDemonstration #1500回水曜デモ


우리는 일본정부에 △전쟁범죄 인정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진상 규명 △피해자 법적 배상 △범죄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및 교육 △추모관 및 사료관 건립을 촉구한다.


1500차 수요시위에서는 국내외 청소년 및 성인을 대상으로 한 「나와 수요시위」 에세이 공모전 수장작 15편 중 3편이 낭독됐다.


1500차 수요시위에 함께한 11개국(대한민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아랍에미리트) 1552 공동주관인 명단


제1500차 수요시위 이튿날(7.15) 남산 국치길을 탐방했다. 기억의 터 ‘대지의 눈’에 새겨진 그림은 故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이다.


2021년 3월 8일 월요일

밥과 장미 Bap and Roses

1908년 3월 8일, 129명의 여성노동자가 미국 뉴욕의 한 섬유의류 공장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사건을 추모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파업이 이어졌다.

파업에서 나온 주된 내용은 △근무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하고 △동일한 노동에 대해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며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생존권과 참정권 요구였다.

영화 「빵과 장미」(Bread and Roses)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움 말입니다. (We want bread but roses too 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저기 플래카드 보이죠? 1912년 메사추세츠에서 처음 쓰였죠. 1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열악한 급여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길고도 험한 싸움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승리했죠. 누구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습니다. 절대로! 어떻게 하면 ‘장미’를 얻을 수 있을까요? 비굴함을 떨쳐버리고 함께 뭉쳐야 해요.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우리의 권리를 위해서 일어섭시다!

그들이 외쳤던 구호 “We want bread, but roses, too”에서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권(인간 존엄성)을 상징한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여성의 손에 사탕이나 쥐여주는 화이트데이가 아닐 터이다.

‘인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시작한 초창기의 여성인권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엔 과연 얼마만큼의 진전을 이루어내었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인류의 절반을 점유하며 역사 발전에 공헌해왔지만, 여전히 절반의 지분은 나눠 갖지 못하고 있는 이갈리아의 딸들(Egalia's Daughters)을 위하여 빨간 장미를…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세 명의 마리아 -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의 선택

가톨릭교회는 세례자에게 성덕(聖德)이 뛰어난 성인(聖人)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장려하여 13세기 이래로 교회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인 마리아는 일반 성인에 대한 공경(恭敬)보다 한 차원 높은 상경(上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 예비신자들이 ‘마리아’ 세례명을 택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마리아(瑪利亞)를 세례명이나 이름으로 삼은 여성들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성녀(趙姓女) 마리아(1862~1927)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조마리아는 1897년 남편 안태훈의 인도로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에게 사촌동생 안명근을 통해 전했다는 조마리아의 당부인데, 참으로 담대하고 강직한 언사다.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흰색 명주수의를 입고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31세로 순국했다.
안 의사의 순국 후 조마리아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내면서 독립지사들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다. 조마리아는 장남인 안 의사의 동생 성녀, 정근, 공근 3남매도 독립운동가로 키워내면서 ‘안중근의 모친’으로 손색없는 삶을 살다가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66세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묘소를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정부는 2008년 8월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두 번째 마리아는 김진상(金眞常) 마리아(1892~1944)다.
김마리아는 삼촌과 고모들이 모두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한 애국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이기도 한 그의 이름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계열 연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고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 도일하여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하던 김마리아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 일경에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후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하고자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베껴 숨기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던 광주 지역에 배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했다가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몸을 상해 평생을 건강문제로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다시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활약했으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의 불화에 실망하여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1932년 오직 신학만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머물면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조국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고문으로 얻은 병이 도져 53세로 순국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김마리아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돼 대동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유관순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 김마리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의 말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

세 번째 마리아는 박마리아(1906~1960)다.
강릉 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의 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박마리아는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던 인연으로 정춘수 목사의 소개를 받아 개성의 감리교 계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32년 귀국하여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4년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기붕과 결혼하고 조선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지침에 따라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되는데 일조하였다. 태평양전쟁 즈음에는 김활란, 모윤순,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친일강연에 적극 참여하면서 징병제 등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와 대한부인회 부회장으로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때까지 별 볼일 없던 남편이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임명되는데 조력했다. 남편 이기붕이 정치 라이벌 이범석을 제치고 1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하던 무렵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치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였다. 1960년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야(下野)하였다. 1960년 4월 28일 경무대(景武臺)로 피신해 있던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일가는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의 권총을 맞아 죽고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참혹한 종말에 이르고 만다. 그들이 살았던 종로구 평동 166번지 서대문 집터는 1964년부터 사설도서관이 들어서 지금은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 마리아 이름을 가진 세 여성 모두 3·1운동 전후의 굴곡진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국광복의 길로 한 사람은 친일과 반민주의 길로 들어섰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사료에 따르면 약 300만 명이 일제강점 당시 시대정신의 중심축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00만 명 중 일부는 일제에 부역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각자의 선택과 삶의 흔적은 기억이 되고 역사로 남았다. 그 선택의 발자국이 복지국가의 건설, 경제민주화의 실현, 분단조국의 통일과 같은 2019년의 시대정신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피고 고민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된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덧붙이는 글 | 한국여성연합신문 크와뉴스(Kwanews)에도 보냈습니다.

2017년 2월 22일 수요일

읽고 보고 듣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오후에 잠깐 짬을 내어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에 다녀왔다. 공공서비스 예약시스템을 통해 사전등록을 마쳤기에 관련 자료집도 받을 수 있었다.


1941년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데이신타이(정신대, 挺身隊)로 끌려갔던 올해 92세의 김복동 할머니는 말씀 도중 복받치는 설움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셨다.


국제사회에서 쓰이는 공식명칭은 정신대도 종군위안부도 아닌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 by Japan)이지만, 피해자 분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 for the Japanese army)라 통칭하고 단어의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작은따옴표에 넣는다.
강제로 끌려간 후 버려졌다가 다시 우리 앞에 선 할머니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은 가문의 치욕, 화냥년, 민족의 수치였다. 심지어 당시 광복회장이란 양반은 2008년에 서울시가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의 건축 허가를 내준 것에 대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까지 성토하며 관련 사업을 저지하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들의 간절한 바램에 성심껏 응답하는 마음가짐과 액션이 확산돼야 한다. 아울러 털끝만큼도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일본정부와 야합하지 않는 정의로운 정부를 갖고 싶다.
오는 수요일은 98주기를 맞이하는 삼일절이다. 1272번째 수요시위에 함께 해야겠다. 중학동으로 고고고~

2017년 1월 3일 화요일

아토포스 신공

순실여대 융합콘텐츠학과 인화교수 류철균이 2016년 1학기에 강의한 3학점짜리 ‘영화스토리텔링의 이해’ 과목의 기말고사 답안지가 장안의 화제다.
유라선자가 독일에 체류하면서도 동시간 한국의 오프라인 시험에 응시하는 무소부재의 신공을 시전했기 때문인데, 과연 비선실세 순실진인의 독문절기를 8성까지 연성한 전인다운 면모다.

“정신적 귀족주의는 자기와 타인 모두에 대한 가차없는 관찰의 시선을 던지는 오만과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기를 거부하고 금지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기에 예측하고 규정할 수가 없는 (        )의 성격을 갖는다”는 12번 괄호넣기 문제에 유라선자는 ‘아포토스’라는 답안을 기재했다. 아포리아(Aporia) 정도밖에 모르는 무지한 나로써는 처음 들어보는 난해한 용어인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토포스’를 잘못 기재한 것이란다. 아토포스(Atopos)는 ① 어느 곳에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② 몇 개의 모티프들이 자주 반복되면서 이루어내는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를 지칭한다고 한다. 요컨대 ‘장소가 없는’, ‘무소적인’을 뜻하는 말이니 독일과 한국의 8시간 시차를 뛰어넘은 극상승의 이형환위(移形換位) 수법이랄 수 있겠다.

그리고 11번 ‘보들레르’도 맞췄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악마주의적 사조로 배웠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으로 기억하는데… 이처럼 난도 높은 문제를 일필휘지로 적중시키다니... 유라선자는 타고난 오성에 문무를 겸비한 희대의 재원임이 분명하다. 다만 엄청난 내공이 실린 아토포스 신공을 격출하여 공력이 소진되고 내상까지 심하니 구치산에 올라 칩거하며 한동안 운기조식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이제 고마 우리 집에 가자

2월 24일 수요일… 기다리던 영화 ‘귀향’이 드디어 개봉했다. 요 몇년 사이에 이른바 1000만 영화라고 하는 대작(?)들을 극장에서 본 적이 없다. 가장 존경하는 이충무공의 ‘명량’ 조차 명절 때 TV에서 편성한 것으로 시청했을 뿐인데… 鬼鄕(Spirits’ Homecoming) 만큼은 꼭 개봉 당일 현장에서 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메가박스가 있어 7시 15분 상영분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2관 129석이 모두 만석이었다.

플롯은 바깥이야기와 안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되는 변형된 액자소설 구조로 보면 될 거 같다.
127분의 러닝타임… 먹먹하고 답답하고 분노했다가 다시 허무에 빠지고 또다시 눈물 짓다가 반성하고 다짐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1943년 즈음 20만명이 끌려갔다는데, 1991년 정신대 피해자로 등록되었던 분들은 238명, 이마저도 이제 44분만 생존(2016년 2월 24일 기준)해 계신다.


조정래 감독의 제작 동기와 무려 14년이 소요된 제작 기간, 歸鄕이 아닌 鬼鄕이라는 타이틀의 의미, 히트 조짐이 보이는 괴불노리개, 재능기부로 출연한 고마운 배우들, 엔딩 후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75,270명의 크라우드 펀딩 후원자 명단… 참으로 많은 걸 생각케 하는 묵직한 울림의 영화다.
노란 나비귀신이 되어 집으로 훨훨 날아 돌아오는 소녀들의 상처와 아픔이 영화의 씻김굿처럼 치유되기를 바래 본다.

2015년 3월 14일 토요일

명강사? 명강의?

가끔씩 서울시 평생학습포털(sll.seoul.go.kr)에서 제공하는 사이버 강의와, 경기도여성능력개발센터의 평생학습 e-배움터 홈런(homelearn.go.kr) 및 온라인경력개발센터 꿈날개(dream.go.kr),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창조학교(k-changeo.org) 등의 학습 웹사이트를 검색하여 무료강의를 고맙게 듣곤 한다. 역사 관련 공부를 좋아하는 터라 요며칠 사이에도 ‘역사’ 키워드로 강의 검색을 했더니 마땅한 것이 없고, 홈런 쪽에 그런대로 너댓 개가 올라와 있기에 수강신청을 했다. 우선 김○○ 이란 분이 강의한 《역사 속의 불세출 여인들》 시리즈로 동양편 5강과 서양편 5강을 들어봤는데… 이건 뭐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듯하여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양 역사 속의 불세출 여인들》 4강  〈중국 최초의 여왕 측천무후〉 편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측천무후를 측전무후로 잘못 표기해 놓았다. 측(則)자는 ‘곧 즉’, ‘법 측’, ‘본받을 측’이니 측천(則天)의 의미를 “곧 하늘이다”, “하늘 같은 법칙”, “하늘을 본받겠다”로 풀이하면 공통적으로 하늘 ‘천(天)’자가 들어가는데 이러한 맥락을 모르면 엉뚱하게도 측전이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5강 〈중국의 국모로 칭송받는 송경령〉 편에서는 손문이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를 창시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 공화국 수립(1898)이 시기상 앞서기 때문에 ‘아시아 최초’라는 표현은 엉터리가 된다. 손문의 중화민국 수립(1912)은 아시아가 아니라 중국 최초의 공화제 국가 탄생을 의미한다. 하기야 신문 칼럼 같은 곳에서도 중국을 최초로 하여 글을 써대는 얼치기들이 지금도 널려 있기는 하다.

《서양 역사 속의 빛나는 여성 리더십》 1강 〈로마를 긴장시킨 세기의 미녀 클레오파트라〉에서 강사는 주인공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11세를 처음부터 내내 프롤레마이오스로 호칭한다. 톨(tol)과 롤(rol)… 시각적인 착시가 역사적 지식으로 굳어진 것일까. 또한 옥타비아누스를 자꾸 옥타비우스로 발음하여 듣기에 거북하다.
2강 〈무적함대를 이긴 절대권력가 엘리자베스 1세〉 편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태어났던 1533년에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이 지배하고 있었던 때”라 얘기하는데 이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조선 4대왕 세종(이도)과 11대왕 중종(이역)의 재위기간은 각각 1418~1450년과 1506~1544년이니 말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를 ‘영국 최초의 여왕’으로 소개하는데, 이복언니 메리 1세(재위 1553~1558)가 영국 최초의 여왕이다. 또 가톨릭을 카톨릭으로 잘못 표기하기도 한다.
5강 〈노벨문학사에 빛나는 인권운동가 펄 벅〉 편 앞부분에서는 펄벅이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스웨덴의 문인 셀마 라겔뢰프(Selma Lagerlof)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펄벅은 비유럽권 여성 작가 중에서 최초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뒷부분의 교안에서는 ‘미국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이라 기입되기는 했다.

강의 전반부와 중반부에 나오는 강사 소개를 보면 주로 금융권 근무 경력이 많고, ‘2012년 국민성공시대 명강사 33인 선정’이란 문구도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공공기관 및 대기업의 출장강의를 다니고 다수의 자기계발 서적도 출간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분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선별적 복지에 대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면서 서양편 4강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편을 가장 자신감있게 강의한 것 같다. 현장강의는 직접 들어보지 못해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인강만 놓고 보자면 전방에 설치된 스크립트를 보고 말하는 것일텐데도… 문장의 응집성이나 통일성이 없고 전후관계가 불분명하며 접속어·지시어·대명사의 사용이 부적절하다. 요컨대 가리키는 바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가청성이 떨어진다. 화면으로 보여지는 요점정리도 맞춤법이 안 맞고 문장 짜임새가 기대치를 밑돈다. 강사 자신의 소개 멘트는 “불멸의 여인 리더십을 인문학으로 찾아보는 김○○입니다.”이다. 인문학? 글쎄… 리더십이나 조직관리, 재테크 분야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실로서의 역사’ 지식만큼은 세밀함이 떨어진다.
경기 홈런 측 인강 제작팀에게도 문제가 많다. 사전에 원고를 검토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담당PD나 제작팀의 역할일 터인데 무료 인강이기 때문에 콘텐츠의 질이 낮아도 상관없다는 얘기인지… 귀차니즘으로 수정없이 대충 넘어갔다면 직무유기이며, 강사로부터 건네진 원고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또한 인문학적 기초지식이 희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이래저래 외통수가 되겠다. 서울시나 경기도 차원에서 제공되는 콘텐츠라면 개인 블로그글이 아니므로 콘티와 멘트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 않겠나. 땅바닥이 움푹 패어서 다니다가 빠지기 쉬운 곳을 ‘허당’이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명강의고 누가 명강사란 말인가?????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우리가 모르는 성희롱(性戱弄)

제59차 평생교육사 목요회는 정선옥 선생님의 ‘우리가 모르는 성희롱’ 강의로 진행됨.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접대의 도구로 취급하는 문화는 윤창준 전 청와대 대변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 송유진 17사단장 등과 같은 사회지도층에서 콜센터에 1만번이나 전화걸어 상담원을 성희롱했다는 개저씨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강의에서는 먼저 성폭행·성추행·성희롱을 개념 구분하고, 구체적인 성희롱 사례를 통해 현황을 제시한 후 예방과 대처방법을 알아보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성희롱의 성립 요건은 업무와 관련한 것인지, 근로조건에 불이익이 있었는지, 유무형의 압력을 받았는지,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성희롱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배려와 관련된 문제로써 피해자 중심주의로 이해되어야 하며, 노골적인 성희롱 발언은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부장제, 이중적 성의식, 차별적 성의식, 성희롱 사각지대의 비정규직 여성, 양성평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주제였는데,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신 정선옥 선생님… 애쓰셨습니다.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한여연 개원 36주년 기념 떡케이크 커팅

저녁 7시… 한국여성생활연구원 개원 36주년 기념 떡케이크 커팅이 진행됐다.
떡케이크는 (주)방주민속식품 성달현 대표이사님이 정성들여 만들어오셨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은 “급변하는 현 시대에 가정뿐 아니라 사회에서 여성들의 다양화된 역할을 바르고 확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세와 그에 따른 여성 교양 및 지적 능력을 함양시켜며, 회원들간의 친목도모로 바람직한 생활정보를 교환하여 여성들의 힘이 필요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윤택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8년 8월 27일 설립되었다.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성나라당 성어록


7월 25일까지 야후에서 진행중인 정치 분야 [뉴스 폴]이다.
성나라당 소속 정치인들의 어처구니 없는 성 관련 어록들인데...
이런 개사이코들...
정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군.
여성분들, 내년 총선과 대선 때 누구에게 표를 주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 좀 해보시라.



News Poll

역대 정치인 최고의 망언?

  14,233명 참가중  [~2011-07-25]

김문수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는 것"
강용석  "아나운서, 다 줘야"
이명박  "외국 마사지걸, 얼굴 별로인 여자 골라라"
최연희  "술취해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해 실수"
안상수 인천시장  "여기자와 친해지려 어깨에 팔…"
이재웅  "성매매금지법으로 거기도 못가고"
안상수  "룸살롱에서 자연산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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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원한다면 아래 링크로 들어가 보시라.
재미있는 설문이 많다.

http://kr.news.yahoo.com/nuriwl/poll_v2/cate_main.html?list_id=3&cid=100010

2010년 8월 23일 월요일

전세계 여자들 가방 속 공개


전세계 여자들 가방 속엔 뭐가 들었나?
그렇다고 몰래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뭇 남성들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기꺼이 공개해 주신 세계 곳곳의 여성 핸드백 물건들.. 두둥~
역시 남자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가짓수도 많네.
화장품, 뷰러, 향수, 거울, 가위, 파우치, 핸드크림, 립스틱, 악세사리, 선글라스, 장갑, 핸드폰, MP3, 디카, 지갑, 책, 약통, 담배, 노트, 필기구, 초콜렛, 물통, 패션소품, 인형, 우산.... 조금은 아니무스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여성도 보이고.... 그리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물건들 몇가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여간 그녀가 평소 뭘 갖고 다니는지, 좋아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데이트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