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세례자에게 성덕(聖德)이 뛰어난 성인(聖人)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장려하여 13세기 이래로 교회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인 마리아는 일반 성인에 대한 공경(恭敬)보다 한 차원 높은 상경(上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 예비신자들이 ‘마리아’ 세례명을 택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마리아(瑪利亞)를 세례명이나 이름으로 삼은 여성들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성녀(趙姓女) 마리아(1862~1927)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조마리아는 1897년 남편 안태훈의 인도로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에게 사촌동생 안명근을 통해 전했다는 조마리아의 당부인데, 참으로 담대하고 강직한 언사다.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흰색 명주수의를 입고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31세로 순국했다.
안 의사의 순국 후 조마리아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내면서 독립지사들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다. 조마리아는 장남인 안 의사의 동생 성녀, 정근, 공근 3남매도 독립운동가로 키워내면서 ‘안중근의 모친’으로 손색없는 삶을 살다가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66세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묘소를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정부는 2008년 8월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두 번째 마리아는 김진상(金眞常) 마리아(1892~1944)다.
김마리아는 삼촌과 고모들이 모두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한 애국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이기도 한 그의 이름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계열 연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고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 도일하여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하던 김마리아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 일경에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후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하고자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베껴 숨기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던 광주 지역에 배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했다가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몸을 상해 평생을 건강문제로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다시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활약했으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의 불화에 실망하여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1932년 오직 신학만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머물면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조국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고문으로 얻은 병이 도져 53세로 순국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김마리아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돼 대동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유관순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 김마리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의 말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
세 번째 마리아는 박마리아(1906~1960)다.
강릉 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의 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박마리아는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던 인연으로 정춘수 목사의 소개를 받아 개성의 감리교 계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32년 귀국하여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4년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기붕과 결혼하고 조선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지침에 따라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되는데 일조하였다. 태평양전쟁 즈음에는 김활란, 모윤순,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친일강연에 적극 참여하면서 징병제 등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와 대한부인회 부회장으로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때까지 별 볼일 없던 남편이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임명되는데 조력했다. 남편 이기붕이 정치 라이벌 이범석을 제치고 1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하던 무렵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치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였다. 1960년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야(下野)하였다. 1960년 4월 28일 경무대(景武臺)로 피신해 있던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일가는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의 권총을 맞아 죽고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참혹한 종말에 이르고 만다. 그들이 살았던 종로구 평동 166번지 서대문 집터는 1964년부터 사설도서관이 들어서 지금은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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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 마리아 이름을 가진 세 여성 모두 3·1운동 전후의 굴곡진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국광복의 길로 한 사람은 친일과 반민주의 길로 들어섰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사료에 따르면 약 300만 명이 일제강점 당시 시대정신의 중심축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00만 명 중 일부는 일제에 부역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각자의 선택과 삶의 흔적은 기억이 되고 역사로 남았다. 그 선택의 발자국이 복지국가의 건설, 경제민주화의 실현, 분단조국의 통일과 같은 2019년의 시대정신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피고 고민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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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덧붙이는 글 | 한국여성연합신문 크와뉴스(Kwanews)에도 보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마리아(瑪利亞)를 세례명이나 이름으로 삼은 여성들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성녀(趙姓女) 마리아(1862~1927)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조마리아는 1897년 남편 안태훈의 인도로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에게 사촌동생 안명근을 통해 전했다는 조마리아의 당부인데, 참으로 담대하고 강직한 언사다.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흰색 명주수의를 입고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31세로 순국했다.
안 의사의 순국 후 조마리아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내면서 독립지사들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다. 조마리아는 장남인 안 의사의 동생 성녀, 정근, 공근 3남매도 독립운동가로 키워내면서 ‘안중근의 모친’으로 손색없는 삶을 살다가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66세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묘소를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정부는 2008년 8월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두 번째 마리아는 김진상(金眞常) 마리아(1892~1944)다.
김마리아는 삼촌과 고모들이 모두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한 애국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이기도 한 그의 이름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계열 연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고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 도일하여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하던 김마리아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 일경에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후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하고자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베껴 숨기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던 광주 지역에 배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했다가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몸을 상해 평생을 건강문제로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다시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활약했으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의 불화에 실망하여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1932년 오직 신학만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머물면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조국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고문으로 얻은 병이 도져 53세로 순국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김마리아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돼 대동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유관순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 김마리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의 말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
세 번째 마리아는 박마리아(1906~1960)다.
강릉 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의 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박마리아는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던 인연으로 정춘수 목사의 소개를 받아 개성의 감리교 계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32년 귀국하여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4년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기붕과 결혼하고 조선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지침에 따라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되는데 일조하였다. 태평양전쟁 즈음에는 김활란, 모윤순,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친일강연에 적극 참여하면서 징병제 등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와 대한부인회 부회장으로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때까지 별 볼일 없던 남편이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임명되는데 조력했다. 남편 이기붕이 정치 라이벌 이범석을 제치고 1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하던 무렵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치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였다. 1960년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야(下野)하였다. 1960년 4월 28일 경무대(景武臺)로 피신해 있던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일가는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의 권총을 맞아 죽고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참혹한 종말에 이르고 만다. 그들이 살았던 종로구 평동 166번지 서대문 집터는 1964년부터 사설도서관이 들어서 지금은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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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 마리아 이름을 가진 세 여성 모두 3·1운동 전후의 굴곡진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국광복의 길로 한 사람은 친일과 반민주의 길로 들어섰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사료에 따르면 약 300만 명이 일제강점 당시 시대정신의 중심축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00만 명 중 일부는 일제에 부역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각자의 선택과 삶의 흔적은 기억이 되고 역사로 남았다. 그 선택의 발자국이 복지국가의 건설, 경제민주화의 실현, 분단조국의 통일과 같은 2019년의 시대정신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피고 고민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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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덧붙이는 글 | 한국여성연합신문 크와뉴스(Kwanews)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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