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0일 월요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어떤 분이 톡방에 등재한 춤비평가 이만주(1949~ ) 님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2022)를 공유한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를 뒤집어놓은 현실 직시의 제목을 아프게 기록하고 냉철히 기억한다. 역시나 깨끗하고도 변치 않는 것은 水 石 松 竹 月 뿐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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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투사라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지도자들이 조국이 독립한 후 집권자가 되어서는 과거 종주국의 총독이나 관리들보다도 더 강권정치를 한다.
민주화의 투사라는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했다는 리더들이 민주화가 된 후 집권해서는 과거 독재자나 수하들보다 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웠다는 사람들이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던 이들이 사회주의 정권의 집권자나 관리가 되면 인민과 평등은 아랑곳없이 제 배, 제 곳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 모두가 과거의 명분은 구호였을 뿐 집권자가 되면 임금으로 착각하고, 행세하며 전제왕정의 군주들보다 더 권력에 취한다.
그들 모두가 권력을 잡으면 지저분해져 물불 안 가리는 축재를 한다. 특히, 사회주의 리더와 관리들의 축재와 부정부패에는 넌덜머리가 난다.
독립, 민주화, 사회주의 다 구호였을 뿐이다. 지나고 보니 그들 모두가 집권욕, 권력욕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마약쟁이들이었을 뿐이다.

젊어서부터 탄압받고 29년간, 옥에 갇혔던 이력으로 조금만 술수를 썼더라면 종신집권 할 수 있었는데도 한 번만 집권하고 사랑을 찾아 나선 만델라가 한없이 우러러진다.

―이만주(2022). 「괴물의 초상」. 현대시학.

2023년 2월 16일 목요일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윤동주 문학사상 선양회… 종로구 운니동을 지나다 발견한 간판이다. 선양회는 윤동주 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이 모여 2000년도에 출범했다는데, 의아하게도 과학기기나 과학실험키트를 취급하는 ‘경성과학’이 들어서 있다.
1941년 11월20일(목) 「서시」를 노래한 東柱는 1945년 2월16일(금) 천상계로 돌아갔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훼절한 양심,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는 시간…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 중3 국어시간에는 하근찬의 전후 단편 「수난이대」를 공부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왼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6·25전쟁 중 수류탄 쪼가리에 맞아 한쪽 다리가 절단된 아들 박진수 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나간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두 사람이 건너가야만 하는 외나무다리는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 외팔이 아버지 만도가 외다리 삼대독자 진수를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은 자신들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극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진수: (독백)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만도: (독백)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진수: 아부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노니 첫째 걸어 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만도: 야야,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걸어 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아버지와 아들의 2대에 걸친 전쟁을 수난으로 연결시키며 개인적 차원의 고난 극복이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연물(용머리재)의 시선이 탁월하게 묘사돼 있다. 우리에게 당면한 ‘외나무다리 건너기’는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남북적대를 극복하는 것이다. 문득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 「파친코(Pachinko)」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놨지만(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