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8일 수요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 중3 국어시간에는 하근찬의 전후 단편 「수난이대」를 공부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왼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6·25전쟁 중 수류탄 쪼가리에 맞아 한쪽 다리가 절단된 아들 박진수 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나간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두 사람이 건너가야만 하는 외나무다리는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 외팔이 아버지 만도가 외다리 삼대독자 진수를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은 자신들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극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진수: (독백)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만도: (독백)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진수: 아부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노니 첫째 걸어 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만도: 야야,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걸어 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아버지와 아들의 2대에 걸친 전쟁을 수난으로 연결시키며 개인적 차원의 고난 극복이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연물(용머리재)의 시선이 탁월하게 묘사돼 있다. 우리에게 당면한 ‘외나무다리 건너기’는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남북적대를 극복하는 것이다. 문득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 「파친코(Pachinko)」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놨지만(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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