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5일 금요일

왕실묘역길 역사문화트레킹

5월 22일 음력 사월초파일, 불기 2562년 맞이 트레킹은 도봉산 둘레길 일부 구간이다. 2년 전부턴가 석탄일(석탄절, 석가탄신일) 대신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용어를 공식 명칭으로 내거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문법상으로는 맞지 않은 표현이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기는 싯타르타의 탄생이 아닌 열반을 기준으로 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 1일 개관한 국립공원산악박물관은 1940년대부터의 산악 관련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산수(山의 전신), 사람과 산, 마운틴 등 국내 3대 산악잡지의 창간호를 비롯한 다양한 산악서적들도 전시하고 있다.

산악박물관 오른편엔 조계종 광륜사(光輪寺)가 있다. 일본 국보 1호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장하고 있다는 교토 소재 광륭사(廣隆寺·고류지)와 사찰명이 얼핏 비슷하여 혼동이 오기도 했다. 조대비 신정왕후(1808~1890)가 도봉산 입구에 만장사(萬丈寺)를 새로 짓고 별장 삼아 만년을 보냈는데, 흥선대원군도 휴식처로 찾았다고 한다. 2002년에 지금처럼 광륜사로 개칭되었다.


1969년 김수영 1주기를 맞아 현대문학사가 주축이 되어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 시인의 무덤 앞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모친이 별세한 후 1991년에 도봉서원 앞쪽으로 시비를 옮기고 시인의 유해를 화장하여 담은 유골함을 시비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수영 시비가 곧 김수영의 무덤인 셈이다. 장방형의 시비에 예서체의 金洙暎 詩碑 글자 아래로 대표작 ‘풀’의 몇 구절이 김수영의 육필로 음각돼 있다.


영국사(寧國寺)는 고려 광종 때 3대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지목될 정도로 큰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15세기 초에 다시 세웠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한때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번성하는 듯했으나 성종대 이후 쇠퇴하면서 16세기 중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발굴 때 일부 탁본으로만 전해져 오던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道峯山寧國寺慧炬國師碑)의 오른쪽 상단 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 길이 62㎝, 폭 52㎝, 두께 20㎝의 비편에 새겨진 281자와 문헌의 기록으로 혜거국사를 전후한 선종구산 사자산문(獅子山門) 초기 5대 선사의 계보(도윤-절중-신정-혜거-영준)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금강령(金剛鈴)과 금강저(金剛杵)는 불교의 의식을 위해 사용된 의식구(儀式具)이다. 금강령은 손으로 흔들어 소리를 내는 요령(鐃鈴)의 일종으로 의식 때에 소리를 내어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금강저는 마음 속 번뇌를 없애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도봉서원터에서 출토된 금강령·금강저 세트는 손잡이 끝부분에 갈고리와 같은 고(鈷)가 각각 5개인 오고령(五鈷鈴)과 오고저(五鈷杵)이다. 금강령의 방울 부분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윗단의 5면에는 오대명왕을, 아랫단의 5면에는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을 나타내었으며, 고 부분에는 사리(舍利)를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 등이 섬세하게 표현된 물고기 모양의 탁설(鐸舌)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리공과 함께 11구의 존상이 모두 표현된 금강령은 우리나라에서 도봉서원터 출토 금강령이 유일하며, 고려시대에서도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을사사화를 무효화하는 을사삭훈으로 정국을 주도한 사림은 선조 6년(1573), 터만 남은 영국사 자리에 조광조를 배향하는 도봉서원을 건립한다. 숙종 연간에는 정치 엘리트인 노론이 기사환국으로 피화된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병향한다. 영조의 서원훼철에도 무난했던 도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원되었다.


세종의 9남인 영해군(1435~1477)의 묘를 만들면서 생긴 무수동(無愁洞)은 수철동(水鐵洞)에서 이름이 바뀐 지역인데, 지금은 무수골이라고 부른다. 무수천변에 조성된 무수골 주말농장은 생태체험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은 쌍분으로 정면 왼편이 정의공주의 묘다. 정의공주(1415~1477)는 문종의 동생이자 세조의 누나로 세종의 차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하였다는 기록이 공주의 시가인 <죽산안씨대동보>에 전하고 있다. ‘양효’는 공주의 남편인 안맹담(1414~1462)의 사후 내려진 시호다.



군왕의 무덤이지만 릉(陵)이라 불리지 못하는 연산군묘(사적 제362호)… 세종이 상왕인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한 의정궁주 조씨(?~1454)의 묘에 객식구 넷이 들어왔다. 중종반정 이후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묻힌 연산군과 배위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위쪽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이 아래쪽에 자리하여 500년 넘게 세를 살고 있다.



연산군묘 남쪽에는 높이 25m, 둘레 10.7m, 최대 수령 830년으로 추정되는 방학동 은행나무(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데,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불이 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고. 인근 원당마을에 모여살던 파평윤씨 일가가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원당샘은 ‘피앙우물’이라고도 불리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김수영의 선영과 본가, 집필실이 도봉동에 있었던 인연을 기려 2013년에 건립된 김수영문학관… 방학동 498-31에 자리한 문학관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풀>은 ‘울다’와 ‘웃다’, ‘눕다’와 ‘일어나다’의 대립, 과거시제와 현재시제의 대립을 통해 결점 많고 나약하지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시련을 견뎌 내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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