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유람

크리스마스에 훌쩍 떠나본 제천여행…


충북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와 물태리를 연결하는 청풍대교(淸風大橋)는 전국 최초의 내륙지방 호수에 건설된 442m의 교량이다. 청풍호수와 조화를 이루는 멋진 풍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청풍대교를 건너서는… 총면적 5만 4,486㎡로 조성된 청풍문화재단지를 유람했다.
1978년 6월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충주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제천시의 청풍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 61개 부락과 충주시 일부가 수몰되자, 이곳에 있던 각종 문화재들을 청풍호 연안 망월산성 기슭에 모아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관광지로 활용하는 곳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팔영루(八詠樓)는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들던 관문으로 조선 숙종 28년(1702) 부사 이기홍이 창건하고 남덕문(覽德門)이라 한 것을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는데 이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의 8경을 시제로 지은 팔영시(八詠詩)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고 있다. 건물구조는 높이 2.2m의 석축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었으며 기단 위에 누각을 세웠다. 팔영루의 현판은 민치상의 글씨이고 출입문 천장의 호랑이 그림은 구전에 의하면 청풍의 재난(수해)를 막기 위하여 그려졌다고 한다.


제천 지곡리(池谷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는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주택이다.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으로 경계를 두었고, 중문으로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一자형의 초가로 되어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과 방앗간이 있고, 상부에 다락을 꾸미고 있다.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천 도화리(桃花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는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조선말기의 목조기와집으로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85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건물은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단의 낮은 냇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부엌·광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 2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가구는 3량 가구이며, 벽은 부엌과 웃방 뒷벽을 제외하고 모두 심벽(心壁: 기둥의 중심부에 흙벽을 쳐서 벽면보다 내보이게 된 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집은 본래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를 두었고 뒤뜰과 옆 마당은 밭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건물만 이전하여 예전의 자연환경은 찾을 수 없다.


제천 황석리(黃石里)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는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조선말기의 목조기와집이다. 충주다목적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안채는 4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오른쪽 앞면에 툇간을 두었다. 정남향의 一자형 구조인데 왼쪽부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마루를 놓았다. 조선시대의 시골의 양반가옥으로서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구조 형식과 건축공법이 특이한 건축물이다.


김중명(金重明, 1614~1685)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이회(而晦)였다. 아버지 김전(金㙉)은 병자호란 당시 빙고(氷庫)의 별제 벼슬을 지내던 사람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문안하려고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힘껏 싸우다 전사했으며 호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지냈다.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놈을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종이 중명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부르자, 중명은 모래흙 세 포대를 가져다 양쪽 겨드랑이에 한 포씩 끼고 나머지 한포는 등에다 지고는 대궐 밖에서부터 전각에까지 걸어오니 임금이 장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날로 총애가 깊어져 병마절도사 벼슬까지 받게 되었다. 기해년 효종이 승하하자 중명은 팔뚝을 어루만지며 “내 일은 이제 끝났구나!” 하고 크게 울부짓더니 결국 청풍고을의 백치에 물러나 살다가 생을 마쳤다. 묘소는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 있다.

수몰이전 옛 청풍·수산·덕산·한수지역에 산재 되어온 고대 사회의 장의(葬儀)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그리고 도호부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공덕비·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역대 관찰사·현감·군수의 치적·공적비 10점 등 총 42점의 비지정문화재가 배치되어 있는 석물군(石物群)을 통해 고대에서 근대까지 남한강변의 거석문화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의 공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금남루(錦南樓)는 청풍부(淸風府)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淸風 石造如來立像)은 높이가 341㎝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邑里)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입상 앞에 있는 둥근돌(소원돌)을 본인의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며 기원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금병헌(錦屛軒)은 청풍부(淸風府)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東軒)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현의 승(僧) 청공(淸恭)이 왕사가 되어 군(郡)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都護府)로 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금병헌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93호 망월산성(望月山城)은 현재 수몰된 옛 청풍소재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망월산(336m)의 정상부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500m이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4m이다. 본래는 남한강이 돌아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청풍호가 감싸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청풍은 삼국시대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며,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사열이산성을 늘려 쌓았다고 하나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황산(城隍山)과 충청도읍지의 태산(台山)이 군의 동쪽 3리에 있다고 하여 이 산성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령(令)자가 쓰여진 오방깃발 중에 북쪽을 가리키는 흑색(黑色) 현무기(玄武旗)만 나부끼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