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출석부

출석부에 또 하나/ 붉을 줄을 긋는다.

수업료를 안 가져 온다고 꾸중당한 아이./ 교무실에 불려와 울던 아이.

한 달 전부터 소식이 없더니/ 오늘 아침엔 편지가 왔다.

“서울에는 피를 빼어가며/ 고학하는 학생이 많다는데,/ 피를 사줄 사람도 없으니……” 하고,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출석부에 또 하나 붉은 줄을 긋는다.

7번/ 9번/ 12번/ 26번…

달마다 늘어가는 붉은 줄/ 어쩌자고 붉은 줄은 늘어만 가는 것이냐?/ 갈수록 삶은 고달픈 것이냐?

지난 체육 대회 날/ 거리에서 나를 만나 얼굴 돌리고/ 땅을 보며 걸어가던 아이

함께 다니던 동무들을 피해/ 뒷골목을 들어가던 아이/ 그 아이는 9번이었다.

수업료를 장만하기 위해 자주 결석하고,/ 일요일이면 수리공사장에 나가/ 짐을 진다던 아이는 32번이었다.

찬바람 불어오는 어느 아침/ 흙덩이를 져 나르다가 엎어져 가슴을 다치고/ 병원에 갔다 하더니/ 기어코 퇴학하고 말았다.

명년 가을에는 군대에 간 형님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형편이 풀릴 것이니/ 한 해만 휴학해 달라던 아이는/ 그 한 해가 다 가도 다시 오지 않고

이제 먼 산에 바람이 얼어붙고/ 들마다 마을마다 눈이 내려 쌓이는데,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는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지게를 지고 산을 넘고 있을까?

오늘 아침엔 따스한 죽이라도 배불리 먹었을까?

붉은 줄이 자꾸 늘어가는 출석부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우런 얼굴, 때 묻은 손발, 힘없는 걸음걸이…/ 똑같은 모습들이

둘이요, 셋이요, 넷, 열, 스물, 백, 천, 만…

아아, 수없이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이제 시업(첫 수업시간)종이 치는데, 종소리가 울려오는데,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가면/ 나는 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1955.11.23. 경북 군북중학교 국어교사)


―故 이오덕(1925~2003) 선생의 「출석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