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8일 일요일

흥인지문 탐방

동대문의 본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다. 현재 편액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되어 있다. 산줄기 모양의 갈 ‘지(之)’자를 하나 더 넣어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흥인문은 타락산이 끝나는 지점, 청계천과 가까운 지점에 있다. 그 부근의 지반이 약하여 조선 태조대 이후 여러 차례 보강 수리 공사를 하였다.


흥인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밖을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의 겹성벽인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은 겹지붕의 문루와 함께 흥인문의 특징이 되고 있다.
흥인문은 동쪽으로 나가는 대로의 출발점이며 성안으로는 운종가(雲從街)가 이어져 도성 가로망의 동서 중심축을 이룬다. 1899년 전차 개통시 전차 선로가 문을 통과하게 되었으며, 흥인문 안 바로 남쪽에 전기 발전소와 전차 차고가 있어 서양 문물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오늘날에는 인근에 시장이 발달하여 흥리(興利)의 현장이 되었다. 좌우 성벽이 모두 잘려나간채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지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흥인문은 보물 1호의 값을 다하고 있다.


옹성은 흥인지문 외부를 반달모양으로 감싸고 있으며, 북쪽 한쪽만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대문의 옹성은 1397년(태조6)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성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옹성을 쌓아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도 북방 호적이 의주 부윤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백두산을 넘어 동으로 쫓아 동대문을 깨치고 들어와 한양을 습격할 것이라는 충렬부인 박씨의 예언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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