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틀어진 광화문

‘이순신에서 왕실 어보까지’라는 부제의 시민청 강좌 ‘빼앗긴 문화에도 봄은 오는가’ 첫시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광화문은 왕실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현재 광화문 앞 주작대로는 맞은편 남산을 향해 경복궁의 축과 15˚ 틀어져 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에 청사를 지으면서 원래 직선으로 뻗어있던 광화문 앞길을 일부러 틀어서 건설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당한 광화문은 1968년, 석축은 그대로 두고 사라진 목조 부분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면서 위치도 원래 광화문이 서 있던 곳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으며, 각도 역시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 틀어진 채였다. 현판도 과거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탓에 박정희가 쓴 한글 친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광화문은 1990년부터 20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부로써 2006년부터 철거되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에 1865년 고종 중건 당시의 자리에 화강석과 금강송으로 원모습을 되찾았다. 光化門이라 쓰인 현판 역시 1916년께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 중건 당시 훈련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가 드러난 유리원판이 나타나면서 원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같은 대역사 끝에 광화문을 제자리로 옮기고 나니 세종로와 틀어진 모습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조선왕조의 축과 근대라는 이름의 총독부의 축이 비틀어져 교차하는 현장이 바로 광화문이다. 혜문스님은 아무리 돈이 많이 든다 해도 틀어진 대한민국의 얼굴은 바로 잡아야 함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권력인 청와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 관저로 사용되던 곳이어서인지 일본식 조경의 흔적이 남아있다. 남산의 조선총독부 정문(구 조선통감부 자리)과 청와대의 정문은 놀라울만큼 닮아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신사에서나 볼 수 있는 석등이 기둥 위에 올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석등은 사찰이나 능묘에서만 나타날 뿐, 일반적인 주거지나 궁궐에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본 신사 혹은 일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일 경우로 한정된다. 현재 청와대를 제외한 다른 공공기관에서 이런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식 석등을 청와대에 설치한 것일까?
청와대 정문에 설치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석등과 동일 모형의 석등을 철거해 달라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청와대나 사법부의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건설 당시 중앙청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주관하에 김수근 교수 등의 디자인 자문을 거쳐 삼성종합건설(주)가 1985년에 시공하였다. 문제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1기만이 설치되는 한국식이 아니라, 다수의 석등이 1열로 배치되는 일본 신사의 전통을 따랐다는 것이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의 법궁 경복궁 앞에 불교식 석등을 세우고, 그것도 일본 신사의 진입로(도쿄 도쇼궁)처럼 배치한 것은 분명 넌센스다. 서울메트로는 ‘문화재제자리찾기’의 지적을 수용하여 2012년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석등 조형물 6개를 철거하였다.


국보 20호 다보탑의 기단 네 모서리에 배치됐던 돌사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4개 중 3개를 약탈하던 과정이나 해방 이후 다보탑 보수 중에 나머지 1개가 기단 중앙부로 옮겨지거나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0원짜리 동전에 부조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십년간 엉뚱한 자리에 있던 돌사자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의 요청으로 원위치로 이동됐다.
1개의 돌사자가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얼굴에 난 상처 덕분이다. 없어진 돌사자 3개 중 1개는 영국으로 팔려갔고, 2개는 일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돌사자가 가운데 쪽에 있는 10원짜리 주화는 조금씩 새로 찍으면서 시간을 두고 교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가 보관하고 있는 힌젠도(肥前刀).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의 주도하에 저질러진 명성황후 살해사건 당시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가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이다. 전체 120㎝(칼날 부분 90㎝) 길이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 있다. 국모를 살해한 뒤 국부검사를 자행(에이조 보고서)하고 장례식의 기록마저 약탈해 간 일제의 만행을 확인한 후 혜문스님은 빼앗긴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에 더 큰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음악 교과서에 민물에도 살고 바다에도 사는 숭어(Gray Mullet)로 잘못 번역돼 알려진 슈베르트의 송어(trout) 얘기 등은 무척 재미있고 교훈적이었다. 혜문스님 표현처럼 배트맨과 베토벤은 같을 수 없다. 틀어진 역사를 바로 맞추고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일이다. 남은 회차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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