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7일 토요일

영원히 전달되지 못한 비단 편지… 황사영 백서

1785년 천주교의 신앙활동이 조정에 보고되어 김범우(토마스) 등은 유배되었고 많은 서적이 불살라졌으나 정조는 비교적 천주교 탄압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한 노론계열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충효사상에 반하고 군신의 도를 해치며 사회의 기강을 문란케 한다 하여 1791년(정조15)의 신해사옥(신해박해·진산사건), 1801년(순조1) 신유사옥(신유박해)을 일으켰다.

신유사옥은 천주교 전래 후 최대의 박해로서 이때 이승훈·이가환·권철신·정약종과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 3백여명이 순교하였고, 이후 천주교인 색출을 위하여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시행되었다.

신유년의 천주교 대박해를 피하여 충청도 점말(배론,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숨어 들어온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는 신도들과 함께 옹기를 구워가며 연명하면서,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편지(帛書)를 완성한 지 7일째 되던 날, 먼저 체포된 황심의 발고로 1801년 11월 5일에 체포·압송되어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뒤 12월 10일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백서(帛書)란 당시 비밀정보를 명주천에 글로 쓰고 옷 속에 꿰매 넣어서 보내는 편지의 일종으로, 여기에 백반을 칠하면 글씨가 보이지 않으며 물에 담그면 글씨가 되살아난다고 한다.


가로 62㎝, 세로 38㎝의 하얀 비단에 가는 붓으로 행당 110여자씩 122행을 깨알같이 써서 전체 글자 수가 무려 1만3311자에 달하는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에는 박해받는 천주교를 지키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방안에 대한 평신도의 고민이 담겨 있다. 조정에서는 이 백서를 860여 자로 고쳐서 청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영원히 전달될 수 없었던 백서에는 신앙활동과 순교, 선교를 위한 자금지원, 서양인 신부의 파견, 배 수백척과 강한 병사 5~6만의 파병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과 임금에게 불손한 언사까지 들어 있어 ‘고금에 없던 대흉사’라 하여 당대의 조야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결국 백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박 청원 사건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이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세력의 앞잡이이자 반역의 무리로 간주되었고, 이는 제사 폐지와 함께 박해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그 뒤 1894년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소각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1925년 7월5일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됐을 때 그 기념으로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다. 현재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황사영(알렉시오)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사위로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했던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 대상에서는 빠졌지만 제2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거론되고 있다.

황사영 백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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