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1일 일요일

서궐 경희궁

경희궁지(慶熙宮地 : 사적 제271호)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慶熙宮)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용복전과 회상전이라는 2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당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는 숭의문, 남쪽에는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광해군은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인왕산 자락에 경덕궁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리한 공사였다. 광해군은 공사 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문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1988년 이곳으로 옮겼지만, 이곳이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수천 칸에 달했던 경희궁의 전각 구성은 182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서궐도안(西闕圖案  : 보물 제1534호)을 통해 그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918년(광해군 10)경에 건립된 숭정전(崇政殿)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하거나 궁중연회, 사신 접대 등 국가적인 공식의례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의 으뜸가는 건물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이곳에 있던 숭정전 건물을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에 팔았다. 원래의 숭정전은 법당건물로 개조되어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숭정전은 발굴과 문헌조사를 통하여 복원된 건물이다.


자정전(資政殿)은 경희궁 숭정전 뒤쪽에 있는 편전(便殿)으로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되었다.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에서는 자정전 이외에 흥정당(興政堂)도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정전은 편전으로 지어졌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御眞)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자정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을 통해 확인된 위치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서암(瑞巖: 상서로운 바위)은 윈래 왕암(王巖: 임금님 바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에 이름을 고치고, 숙종이 직접 사방석(四方石)에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령전(泰寧殿)은 영조의 어진을 모셔두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다시 수리하여 어진을 모셨다. 선원전(璿源殿)의 경우 선대 국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것에 비해서 태령전은 영조 재위 당시에 현왕인 영조 자신의 어진을 모셨다는 점이 특징이다.
태령전은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고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하하여 만들었다.


드므는 방화수(防火水)를 담는 용기로써 화마(火魔)가 불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경희궁 장식기와(decorative tiles)
조선시대에는 주요 건물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와 여러가지 동물 모양을 한 잡상(雜像)을 올려놓았다. 이는 화재를 막고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무 건물이나 쓸 수 없었으며, 잡상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물의 등급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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