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盧)는 7세기 때의 백제향로이다.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높이는 61.8㎝, 무게는 11.8㎏이고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첩첩산중으로 이루는 풍경이 새겨졌다. 여기에 16인의 인물상,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나무·바위·산길·시냇물·폭포·호수 등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서있는 봉황이 따로 붙어 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의 향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핀 연꽃모양이며, 연잎의 표면에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물고 고개를 쳐들고 떠받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표현되었다.
이 향로는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백제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귀중한 작품이다.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보낸 길이 74.9㎝의 철제 칼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 병오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奇)가 성스러운 말씀을 내었으므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남긴 높이 109㎝, 너비 38㎝, 두께 29㎝의 비석이다. 1948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한 변 7.6㎝의 정방형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약 4.5㎝ 크기의 글자를 한자씩 음각하였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동그라미 안에 봉황을 새겨 붉은 칠을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비분의 내용은 갑인년(654, 의자왕 14)에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사택지적은 백제 후기 대성8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으로 의자왕 2년(64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 대좌평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문의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한 사륙병려체(四六騈儢體)로 유려하며 글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백제의 최고급 귀족이 남긴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은 일본의 국보로 전체 높이 123.5㎝, 보살상 앉은 키 83.3㎝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兒率天) 용화수(龍華樹: 꽃가지가 용의 머리 같아 붙여진 이름)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백제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百濟舫) 또는 백제선(百濟船)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사진: 쌍범 당도리선, 단범 당도리선)
복원된 백제선은 길이 12.6m로 4~5세기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사신선이다. 고대선박 전문가가 총동원되어 복원한 작품으로 바로 한강에 띄워도 될 만큼 견고하다. 한성백제박물관의 외관은 백제의 배를 형상화하여 건축되었다.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첩첩산중으로 이루는 풍경이 새겨졌다. 여기에 16인의 인물상,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나무·바위·산길·시냇물·폭포·호수 등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서있는 봉황이 따로 붙어 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의 향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핀 연꽃모양이며, 연잎의 표면에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물고 고개를 쳐들고 떠받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표현되었다.
이 향로는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백제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귀중한 작품이다.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보낸 길이 74.9㎝의 철제 칼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 병오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奇)가 성스러운 말씀을 내었으므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남긴 높이 109㎝, 너비 38㎝, 두께 29㎝의 비석이다. 1948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한 변 7.6㎝의 정방형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약 4.5㎝ 크기의 글자를 한자씩 음각하였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동그라미 안에 봉황을 새겨 붉은 칠을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비분의 내용은 갑인년(654, 의자왕 14)에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사택지적은 백제 후기 대성8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으로 의자왕 2년(64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 대좌평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문의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한 사륙병려체(四六騈儢體)로 유려하며 글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백제의 최고급 귀족이 남긴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은 일본의 국보로 전체 높이 123.5㎝, 보살상 앉은 키 83.3㎝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兒率天) 용화수(龍華樹: 꽃가지가 용의 머리 같아 붙여진 이름)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백제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百濟舫) 또는 백제선(百濟船)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사진: 쌍범 당도리선, 단범 당도리선)
복원된 백제선은 길이 12.6m로 4~5세기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사신선이다. 고대선박 전문가가 총동원되어 복원한 작품으로 바로 한강에 띄워도 될 만큼 견고하다. 한성백제박물관의 외관은 백제의 배를 형상화하여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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