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서인 「남사」와 「북사」에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다’란 기록이 있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두루마기를 입었다. 저고리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에 허리띠를 둘러 여미고, 깃·섶·끝동 등에는 선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소매가 넓으며, 중국식 두루마기도 입었다.
백제 왕은 자주색의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에 흰색의 가죽띠를 두르고, 푸른색의 비단바지를 입었다.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색 비단관을 쓰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옷의 색과 재질이 달랐다.
「직공도」는 중국에 조공하러 온 외국 사신의 형상·복식·풍속 등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전해지는 직공도 중 가장 오랜된 「양직공도」(梁職貢圖 25×198㎝)는 6세기 중국 양(梁)나라를 찾은 백제·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재위 552~554) 소역이 왕자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원본에는 25개국의 사신이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12개국 사신 모습만 남아 있다.
‘백제국사(百濟國使)’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망울, 붉고 단아한 작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제도·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현존하는 회화자료 가운데 백제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자료이다.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된 「당염립본왕회도」(중국 당 7세기)도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부터 당태종, 예예국, 파사국(이란), 백제국, 호밀단(아프가니스탄), 백제국(白題國), 말국(위구르), 중천국(인도), 사자국(스리랑카), 북천축, 양반타, 무흥국, 국자국, 왜국(일본), 고려,국 자알국, 신라국, 탕창국, 낭아국(말레이시아), 등지국, 주고가(우즈베키스탄), 아발국(카자흐스탄), 건평연(태국), 여단국 사신 순이다.
도다이지 쇼소인(東大寺 正倉院)에는 백제에서 일본 천황에게 선물했다고 전하는 바둑판(목화자단기국)이 소장되어 있다. 이 바둑판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는데 자줏빛의 자단목에 선과 문양을 상아와 각종 안료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바둑판의 선은 19선이며 화정이 17개인데, 이는 한국의 순장(順丈)바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흥미롭다.
바둑판을 담는 함(금은귀갑기국감)은 바둑판보다 조금 크다. 역시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바둑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다. 바깥면에 거북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그 무늬 안에 금박과 은박ㄷ을 하고 다시 검은 선으로 당화문(唐花文)을 그려 넣은 뒤에 투명한 각질의 판자를 끼워 놓았다.
바둑돌은 화려한 바둑판과 함께 걸맞도록 상아의 표면을 염색하여 문양을 새기고 채색하였다. 양면에 화식조(花植鳥) 무늬를 새겼으며 붉은색과 감색의 상아에 각각 다른 새 모양을 새겨넣었다. 이 붉은색과 감색 바둑알은 한 벌로 보인다. 흰 바둑돌인 백기자는 석영, 검은 바둑돌인 흑기자는 사문암으로 만들었는데 양면의 꼭대가가 평평하게 되어 있다.
바둑돌을 담아 두었던 용기(은평탈합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뚜껑 윗면에 꽃나무 아래에서 꽃가지를 물고있는 꼬리 긴 새를 장식하고 옆면에는 염주무늬와 4장의 꽃잎무늬를 늘어놓았다. 또하나는 뚜껑 윗면의 은판 무늬에서 중앙에 코끼리를 장식하고 아래쪽 암석에 꽃가지가 둥글게 자란 모양을 표현하였다.
백제의 생활 유적에는 기와가 많이 출토된다. 기와는 집의 지붕을 덮는 건축자재로, 직접 지붕을 덮는 암키와, 암키와를 서로 연결해주는 수키와, 처마 장식으로도 쓰이는 막새 등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다.
백제 사람들은 4세기 무렵 주로 궁궐·관청·사원 등의 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 서울에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된 유적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이다. 백제기와는 대체로 회색을 띠며 두께는 1㎝ 안팎으로 얇다. 제작방법과 관련해서는 점토 띠를 쌓아 만든 것과 와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뉜다. 이밖에 풍납토성 안에서는 기둥장식, 토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모두 고급건문과 주요 국가시설에 쓰인 것이며 백제 도성으로서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준다.
수막새(Roof-end Tile)는 기와지붕의 처마 끝에 거는 기와로서 수키와에 드림새를 붙여 마감을 깔끔하게 만든 기와이다. 백제사람들은 수막새에 짐승·엽전·꽃 등의 문양을 많이 장식해 복을 기원하였다.
올릭픽공원 내에 설치된 「기와를 입은 대지」에 대한 조각가 이승택의 변…
“흑(黑)기와는 동양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서양이 동경하는 기와의 신비는 오랜 우리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다. 지붕 위에서만 있던 기와가 땅으로 내려와 광활한 대지와 자연의 품 안에서 인간을 감싸고 있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두루마기를 입었다. 저고리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에 허리띠를 둘러 여미고, 깃·섶·끝동 등에는 선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소매가 넓으며, 중국식 두루마기도 입었다.
백제 왕은 자주색의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에 흰색의 가죽띠를 두르고, 푸른색의 비단바지를 입었다.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색 비단관을 쓰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옷의 색과 재질이 달랐다.
「직공도」는 중국에 조공하러 온 외국 사신의 형상·복식·풍속 등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전해지는 직공도 중 가장 오랜된 「양직공도」(梁職貢圖 25×198㎝)는 6세기 중국 양(梁)나라를 찾은 백제·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재위 552~554) 소역이 왕자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원본에는 25개국의 사신이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12개국 사신 모습만 남아 있다.
‘백제국사(百濟國使)’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망울, 붉고 단아한 작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제도·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현존하는 회화자료 가운데 백제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자료이다.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된 「당염립본왕회도」(중국 당 7세기)도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부터 당태종, 예예국, 파사국(이란), 백제국, 호밀단(아프가니스탄), 백제국(白題國), 말국(위구르), 중천국(인도), 사자국(스리랑카), 북천축, 양반타, 무흥국, 국자국, 왜국(일본), 고려,국 자알국, 신라국, 탕창국, 낭아국(말레이시아), 등지국, 주고가(우즈베키스탄), 아발국(카자흐스탄), 건평연(태국), 여단국 사신 순이다.
도다이지 쇼소인(東大寺 正倉院)에는 백제에서 일본 천황에게 선물했다고 전하는 바둑판(목화자단기국)이 소장되어 있다. 이 바둑판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는데 자줏빛의 자단목에 선과 문양을 상아와 각종 안료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바둑판의 선은 19선이며 화정이 17개인데, 이는 한국의 순장(順丈)바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흥미롭다.
바둑판을 담는 함(금은귀갑기국감)은 바둑판보다 조금 크다. 역시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바둑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다. 바깥면에 거북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그 무늬 안에 금박과 은박ㄷ을 하고 다시 검은 선으로 당화문(唐花文)을 그려 넣은 뒤에 투명한 각질의 판자를 끼워 놓았다.
바둑돌은 화려한 바둑판과 함께 걸맞도록 상아의 표면을 염색하여 문양을 새기고 채색하였다. 양면에 화식조(花植鳥) 무늬를 새겼으며 붉은색과 감색의 상아에 각각 다른 새 모양을 새겨넣었다. 이 붉은색과 감색 바둑알은 한 벌로 보인다. 흰 바둑돌인 백기자는 석영, 검은 바둑돌인 흑기자는 사문암으로 만들었는데 양면의 꼭대가가 평평하게 되어 있다.
바둑돌을 담아 두었던 용기(은평탈합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뚜껑 윗면에 꽃나무 아래에서 꽃가지를 물고있는 꼬리 긴 새를 장식하고 옆면에는 염주무늬와 4장의 꽃잎무늬를 늘어놓았다. 또하나는 뚜껑 윗면의 은판 무늬에서 중앙에 코끼리를 장식하고 아래쪽 암석에 꽃가지가 둥글게 자란 모양을 표현하였다.
백제의 생활 유적에는 기와가 많이 출토된다. 기와는 집의 지붕을 덮는 건축자재로, 직접 지붕을 덮는 암키와, 암키와를 서로 연결해주는 수키와, 처마 장식으로도 쓰이는 막새 등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다.
백제 사람들은 4세기 무렵 주로 궁궐·관청·사원 등의 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 서울에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된 유적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이다. 백제기와는 대체로 회색을 띠며 두께는 1㎝ 안팎으로 얇다. 제작방법과 관련해서는 점토 띠를 쌓아 만든 것과 와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뉜다. 이밖에 풍납토성 안에서는 기둥장식, 토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모두 고급건문과 주요 국가시설에 쓰인 것이며 백제 도성으로서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준다.
수막새(Roof-end Tile)는 기와지붕의 처마 끝에 거는 기와로서 수키와에 드림새를 붙여 마감을 깔끔하게 만든 기와이다. 백제사람들은 수막새에 짐승·엽전·꽃 등의 문양을 많이 장식해 복을 기원하였다.
올릭픽공원 내에 설치된 「기와를 입은 대지」에 대한 조각가 이승택의 변…
“흑(黑)기와는 동양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서양이 동경하는 기와의 신비는 오랜 우리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다. 지붕 위에서만 있던 기와가 땅으로 내려와 광활한 대지와 자연의 품 안에서 인간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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