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토요일 오전 10시, 1호선 수원역 1번출구 집결…
팔달문(八達門)에서 시작한 씨알순례는 화성행궁(華城行宮)과 화성성곽길을 걷는 코스였다.
화성행궁의 느티나무(zelkova)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인데 높이는 30m, 둘레는 6m에 이른다. 영목(靈木), 신목(神木), 귀목(貴木)이라고 불려왔으며 예부터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였다. 또한 소원지(所願紙)에 소원을 적어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1982년 경기도 보호수 5-3으로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正堂)인 봉수당(奉壽堂)은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동쪽의 건물)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의 집무처이자 임금 행차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곳이다.
을묘원행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789(정조13) 9월 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1795년(정조19) 윤 2월 13일 화성행궁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서울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궁중 연회가 이때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행되었다. 헌선도·몽금척·하황은·포구락·무고·아박·향발·학무·연화대·수연장·처용무·첨수무·검무·선유락 등의 궁중 연희 종목들이 회갑잔치의 화려함을 장식하였다. 사진은 이때 연행된 궁중 연희 중에서 무고와 선유락 연행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선유락(船遊樂)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채색을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여러 기녀들이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며 추는 춤이다. 봉수당 앞 오른쪽에 정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앞뜰엔 혜경궁의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이 앉아있다. 봉수당의 섬돌에 놓인 헌선도(獻仙桃)를 비롯해 앞뜰에 놓인 화려한 소품들이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과 품격을 한껏 나타낸다.
장락당(長樂堂)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정조18)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은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 복원되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1790년(정조14)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1794년에 증축되었다.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복내당에 딸린 부엌 살림을 통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남아있지 않으며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1790년(정조14)에 건립된 은약헌(隱若軒)을 1796년(정조20) 증축하면서 유여택(維與宅)으로 이름을 바꿨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1795년(정조19) 행차 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낙남헌(洛南軒)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1794년(정조18)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 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위해 배를 여러 척 띄어 놓고 그 위에 나무판을 가로질러 연결한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하였다.
장대(將臺)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노대(弩臺)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雉城)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포루(鋪樓)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적대(敵臺)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北西敵臺)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었고, 쌓은 담장마다 총안(총구멍)을 내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1964.9.3)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거중기(움직도르래)와 녹로(고정도르래)가 공기를 단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의미의 공심돈은 내부가 비어 있어 군사들이 그 안에서 계단으로 올라 다니면서 적을 향해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의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北岩門)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20) 3월 27일 완공하였다.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다른 4개의 횃불구멍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올리지 않았다.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 체계이다. 총 5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적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1997년 유네스코는 ‘화성은 뛰어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건축물의 모범이며, 성곽의 여러 건축들이 각각 예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하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팔달문(八達門)에서 시작한 씨알순례는 화성행궁(華城行宮)과 화성성곽길을 걷는 코스였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正堂)인 봉수당(奉壽堂)은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동쪽의 건물)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의 집무처이자 임금 행차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곳이다.
을묘원행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789(정조13) 9월 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1795년(정조19) 윤 2월 13일 화성행궁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서울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궁중 연회가 이때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행되었다. 헌선도·몽금척·하황은·포구락·무고·아박·향발·학무·연화대·수연장·처용무·첨수무·검무·선유락 등의 궁중 연희 종목들이 회갑잔치의 화려함을 장식하였다. 사진은 이때 연행된 궁중 연희 중에서 무고와 선유락 연행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선유락(船遊樂)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채색을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여러 기녀들이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며 추는 춤이다. 봉수당 앞 오른쪽에 정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앞뜰엔 혜경궁의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이 앉아있다. 봉수당의 섬돌에 놓인 헌선도(獻仙桃)를 비롯해 앞뜰에 놓인 화려한 소품들이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과 품격을 한껏 나타낸다.
장락당(長樂堂)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정조18)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은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 복원되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1790년(정조14)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1794년에 증축되었다.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복내당에 딸린 부엌 살림을 통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남아있지 않으며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1790년(정조14)에 건립된 은약헌(隱若軒)을 1796년(정조20) 증축하면서 유여택(維與宅)으로 이름을 바꿨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1795년(정조19) 행차 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낙남헌(洛南軒)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1794년(정조18)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 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위해 배를 여러 척 띄어 놓고 그 위에 나무판을 가로질러 연결한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하였다.
장대(將臺)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노대(弩臺)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雉城)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포루(鋪樓)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적대(敵臺)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北西敵臺)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었고, 쌓은 담장마다 총안(총구멍)을 내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1964.9.3)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거중기(움직도르래)와 녹로(고정도르래)가 공기를 단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의미의 공심돈은 내부가 비어 있어 군사들이 그 안에서 계단으로 올라 다니면서 적을 향해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의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北岩門)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20) 3월 27일 완공하였다.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다른 4개의 횃불구멍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올리지 않았다.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 체계이다. 총 5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적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1997년 유네스코는 ‘화성은 뛰어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건축물의 모범이며, 성곽의 여러 건축들이 각각 예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하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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