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는 신라시대의 대표 사찰이다. 24대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의 늪지를 메우고 새로 왕궁을 짓는 도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궁전 대신 왕즉불(王卽佛) 사상에 따라 용보다 초월적인 존재인 부처님을 모시는 방대한 절로 바꿔 세운 것이 황룡사(皇龍寺)다. 1탑 3금당 가람의 중심인 정면 9칸 측면 4칸의 (중앙)금당은 화가 솔거가 그린 진짜 같은 소나무 벽화에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경내에 역대급 높이(60~80m)를 자랑하는 9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27대 선덕여왕이 “여왕이 통치하므로 위엄이 없어서 타국이 침략한다.”라는 자장율사가 전하는 신인의 말에 따라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해 완공한 황룡사 9층 목탑은 황룡사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진평왕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의 삼보(三寶)로 꼽힌다. 장대한 목조건축물이었기에 낙뢰와 강풍의 피해가 발생했고 그때마다 중수를 반복했다. 몽골군의 고려 3차 침략(1235~1239) 시기인 23대 고종 25년(1238)에 전소되었다. 절터만 남은 황룡사지는 1963년에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익산 미륵사는 백제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다. 30대 무왕이 용화산(龍華山) 아래에 거둥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출현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미륵삼회전(會殿), 탑(塔), 낭무(회랑)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彌勒寺)라 이름했다(639). 서(西)탑에서 나온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설화의 왕비는 진평왕의 3녀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氏다.
미륵삼상은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7천만 년 뒤 사바세계에 현신한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에서 3번 설법하여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입각한 것이다. 절의 배치는 1탑 1금당의 형태이면서 서-중-동으로 배치하여 ‘3탑 3금당의 3원 병렬식 가람’의 구조다. 조선 중기인 17세기경 승려가 없는 절이 된 후로 서탑(국보 제11호)과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등 일부의 석물만 절터(사적 제150호)에 남았다. 현존 최고, 최대(14.24m)인 서탑은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막는다고 콘크리트를 발랐는데, 2001년부터 시작한 보수공사 끝에 6층 형태(9층 추정)로 2019년 복원되었다.
절은 없고 절터만 남았기에 황룡사址, 미륵사址와 같이 址(터 지)자를 쓴다. 절은 황룡사가 앞서지만, 목탑은 미륵사가 먼저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찰스인수위가 문화재청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황룡사와 미륵사의 복원 공약을 검토했다는 소식이다. 60m 이상으로 추정되는 황룡사 목탑, 미륵사 (중앙)목탑은 공히 낙뢰 등에 의한 화재와 강풍, 지진 대비 설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찰 전역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기본이다.
아울러 문화재 복원에 특정인의 이해(利害)를 위한 유사종교 행위나 방법(謗法), 기문둔갑이 개입하는 걸 배척한다. 모두를 위한 대역사(大役事)가 생소 가죽 벗겨내기나 마른 대구포 퍼포먼스의 매크로 버전으로 흑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후보 시절부터 장왕신통(掌王, 손바닥왕)이나 백호신공(白毫, 흰털)을 시전한 바 있기에 하는 말이다. 설마 굥본부장 일가가 1천1백년 전 태봉국의 궁왕(弓王)마냥 스스로를 용족이나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기는 건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