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우에 올라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중략)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붕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 7)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이 고공 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을 ‘체공녀’라고 하면서 을밀대 농성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1920년경부터 평양 일대에는 고무신 공업이 발달하는데 조선인끼리의 출혈경쟁으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고무신을 싸게 파는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깎아 손해를 메우려는 식의 계산법으로 인해 12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노동, 남자 감독관의 욕설과 구타, 성희롱을 참아 넘기면서도 남성노동자들 반에 못 미치는 임금이 고작 여성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대가였다. 근대 산업사회의 요구로 직업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 여성들의 노동은 무시당하고 착취당했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당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죽을 때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 을밀대가 붙어 다녔다. 강주룡은 을밀대 위에서 9시간 동안을 목청 높여 소리치다가 결국 끌려내려와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단식으로 농성 방법을 전환하였다. ‘여류투사 강여사’, ‘평양의 히로인’식의 호응과 함께 평원고무공장 파업은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일반 대중의 응원과 함께 투쟁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강주룡도 76시간 단식 뒤에 풀려나 동무들의 시위에 동참했고, 극적으로 임금인하를 막아낸다. 하지만 강주룡과 강경파 스무명은 해고를 당했고, 그는 유치장에서 다시 57시간 단식을 벌이면서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이라는 후유증을 얻는다.
‘여성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노동사에서도 최초로 기록될 강주룡의 고공농성은, 결국 그의 목숨을 대가로 끝을 맺는다. 다음해 8월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우리가 강주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까닭은 을밀대 고공농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31년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잠시 무장독립단체에도 참여했으며,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노동조합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장하였다. 강주룡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당당한 여성이자 노동자로 깨어났으며,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서는 당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우에 올라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중략)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붕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 7)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이 고공 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을 ‘체공녀’라고 하면서 을밀대 농성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1920년경부터 평양 일대에는 고무신 공업이 발달하는데 조선인끼리의 출혈경쟁으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고무신을 싸게 파는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깎아 손해를 메우려는 식의 계산법으로 인해 12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노동, 남자 감독관의 욕설과 구타, 성희롱을 참아 넘기면서도 남성노동자들 반에 못 미치는 임금이 고작 여성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대가였다. 근대 산업사회의 요구로 직업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 여성들의 노동은 무시당하고 착취당했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당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죽을 때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 을밀대가 붙어 다녔다. 강주룡은 을밀대 위에서 9시간 동안을 목청 높여 소리치다가 결국 끌려내려와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단식으로 농성 방법을 전환하였다. ‘여류투사 강여사’, ‘평양의 히로인’식의 호응과 함께 평원고무공장 파업은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일반 대중의 응원과 함께 투쟁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강주룡도 76시간 단식 뒤에 풀려나 동무들의 시위에 동참했고, 극적으로 임금인하를 막아낸다. 하지만 강주룡과 강경파 스무명은 해고를 당했고, 그는 유치장에서 다시 57시간 단식을 벌이면서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이라는 후유증을 얻는다.
‘여성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노동사에서도 최초로 기록될 강주룡의 고공농성은, 결국 그의 목숨을 대가로 끝을 맺는다. 다음해 8월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우리가 강주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까닭은 을밀대 고공농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31년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잠시 무장독립단체에도 참여했으며,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노동조합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장하였다. 강주룡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당당한 여성이자 노동자로 깨어났으며,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서는 당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대항하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오늘로 181일째 고공 농성 중인 김진숙이야말로 체공녀 강주룡의 진정한 후예라고 할 수 있겠다. ‘희망버스’에 동승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부터의 응원을 보낸다.
답글삭제지난 목요일(2011.11.10) 김진숙씨가 땅을 밟았다. 크레인 체공 309일만이다. 송경동, 김여진, 박혜경, 노엄 촘스키, 희망버스 참가자들...... 모두모두 애쓰셨네요. 이제 한진중공업 측이 성실하게 합의를 이행해 나가는지 지켜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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