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일 수요일

[사람들] 캐롤 길리건



캐롤 길리건 Gilligan, Carol (1936 ~ )
미국 페미니스트, 발달 심리학자, 윤리학,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30년 이상 교수로 일했다. 1982년에 나온 그녀의 대표작 <<다른 목소리로>>는 하버드 대학신문에서 ‘혁명을 출발시킨 작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에는 페미니즘 잡지 <미즈>가 뽑은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6년 <타임>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을 선정해 커버스토리로 다뤘는데 길리건은 앨 고어, 캘빈 클라인, 로버트 레드포드 등과 함께 뽑혔다. ‘단 한권의 책이 심리학의 법칙과 통설을 바꾸고 의학연구의 가설들을 수정하게 함은 물론 남성과 여성, 남아와 여아의 차이점에 대한 부모와 교사, 그리고 발달 관련 전문가들의 대화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길리건은 심리학 내부에 여성의 목소리를 가져옴으로써 심리학의 목소리를 바꾼 것이다.

<<다른 목소리로>>에서 길리간은 당시 발달심리학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던 콜버그의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콜버그는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평등과 상호성을 보장하는 정의의 원리를 자신의 도덕원리로 채택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행위자라는 ‘정의의 입장 justice perspective’을 취했다. 도덕적 성숙에 이르는 데는 6개의 발달단계가 있는데 마지막 6단계에서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정의의 원리를 자신의 최고 행위원리로 채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콜버그의 모델에 따라 연구결과를 살폈을 때 5단계나 6단계에 이른 경우는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많은 여성들은 3단계(행위의 옳고 그름이 주위사람들의 평가에 달려있는 단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그들을 만족시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다)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여성의 도덕적 판단능력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통념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길리건이 착목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도덕적 성숙의 기준이 과연 정의의 원리 뿐인가. 지금까지 남성들은 권리의 개념을 강조해왔고 여성들은 보살핌의 행위를 중시해온 현실을 고려할 때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길리건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러 연구들을 수행해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도덕적 성숙과정을 추론해냈다. 이 새로운 모델에서 발달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5단계로 구성되는데 마지막 5단계에서 행위자인 여성은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부당한 착취와 가해를 막아야 하고 자신도 보살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보살핌의 원리를 ‘도덕적 판단의 보편적인 자기 선택적 원리’로 채택하게 된다. 정의의 입장과는 다른 ‘보살핌의 입장care perspective’을 제시한 것이다.

길리건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사랑과 보살핌에 바탕한 상호의존성이나 친밀성보다 더 바람직하고 우위에 있다는 콜버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추상적인 정의의 원칙보다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며, 정의의 개념조차 타인에 대한 배려에 종속시키면서 타협을 선호하는 여성들의 태도를 옹호했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행위가 여성의 입장에서는 도덕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정의의 원리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강조하면서 결국 서로 간에 벽을 쌓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도 거꾸로 제기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의의 입장을 상대화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분리의 개념에 익숙한 채 사람들 간의 경계선을 만들고 유지하느라 바쁜(남성) 사회에서 인간관계, 사람들 간의 연결에 항상 유의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가 가치있게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길리건이 새롭게 제시한 보살핌의 입장, 보살핌의 윤리는 왜 여성들이 그런 특성을 보이게 됐는지, 가부장제의 산물이 아닌지에 대한 고찰이 없으며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성차별적 본질주의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사회의 갈채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길리건이 전통적으로 무시돼 온 여성들의 도덕적 관점을 드러내고, 그것이 결코 열등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페미니즘 뿐 아니라 학문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도덕 영역의 지도그리기>>, <<연결하기>>, <<목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등의 책을 냈고 1992년에 출간한 <<교차로에서 만나기>>는 그해 뉴욕타임즈의 주목할 만한 책에 선정됐다. 의학박사인 제임스 길리건과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 출처: 김신명숙. 2007. <<김신명숙의 선택>>. 이프. pp. 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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