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3일 화요일

진격의 이형구

이형구 교수가 풍납토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학부 시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고 최순우(崔淳雨) 박사를 따라 답사에 나서면서부터라고 했다.
이후 90년대부터는 사성(蛇城)설을 견지하는 이병도 무리에 맞서 풍납토성이 바로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임을 외로이 주장해 왔다. 1997년 1월 1일 신정 연휴에도 제자들과 함께 풍납토성 실측조사를 나갔던 차, 인근 현대아파트 터파기 현장이 수상쩍어 몰래 들어갔을 때 포크레인이 파놓은 5m 깊이의 구덩이 여기저기에 무수히 박혀있는 백제토기와 유물들이 이형구 교수의 눈에 띠면서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월초에 풍납토성 보존과 위상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문대 이형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김영상(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선생으로부터 건네받았다는 1958년도 풍납토성 사진이 새로웠으나, 백제 유적과 고구려 유적지 위에 마구잡이로 건축물을 올려 놓은 한중 양국의 닮은꼴 문화재 인식에 몸서리쳤다.




경당연립 재건축부지에서는 ‘大夫’라는 관직명이 새겨진 항아리와 우물터가 발굴되었다. 미래마을에서 출토된 소의 갑골(甲骨)로 보아 교과서에 기술된 부여 계통의 우제점법(牛蹄占法)이 행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었고, 나뭇잎 모양의 은장식품을 통해서도 부여와의 연관성이 유추되었다.



이형구 교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81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석촌동 적석총을 찾았다가 도로개설(백제고분로)로 고분이 파손되고 인골이 교란되는 모습을 목격하고선 5공의 실세 허문도와 담판하는 등 백제유적의 보존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됐다고 한다.


유적지구의 주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당국에서는 하루빨리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보상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하다고 말하는 이형구 교수는 천박한 닥정부와 무개념 문화재청(나선화)과 근시안 강원도청(최문순)이 레고랜드를 밀어붙이고 있는 춘천 중도의 고조선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남선북마하고 있다.


역경없는 삶은 없을 터… 한성백제의 역사를 되살려내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장을 누비면서 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에 헌신하는 이형구 교수의 검게 탄 얼굴에서 장애에 굴하지 않는 시지프스의 신념과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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