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씨순길의 출발지는 7호선 사가정역 1번 출구. 언제나처럼 이재섭 선생님의 모두설명과 함께 사가정시장을 통과하여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사가정 공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대구 출생으로, 호는 사가정(四街亭) 또는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6세에 독서하고 시를 지을 줄 알아서, 신동으로 불렸다. 19세(1438년)에 진사과와 생원과에 연달아 합격하였고, 25세(1444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라는 관직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세종에서 성종까지 45년간 여섯 왕을 모시면서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6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23년간 문형(文衡)을 담당한 대문호이자 전형적인 대각문인(臺閣文人)으로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 대표적인 편저로는 「경국대전」「동문선」의 편찬과 「동인시화」「필원잡기」를 저술하여 조선전기 어느 문인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면목동에서 장안평 사이 지역에 거주했던 서거정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공원명칭을 ‘사가정공원’으로, 공원 내 정자 명칭도 ‘四街亭’으로 정하고 공원 입구까지 연결된 ‘사가정길’도 서울시에서 도로명칭을 정할 때 서거정의 호를 인용했다고 한다. 요약컨대 이곳 길을 사가정길, 지하철역을 사가정역, 공원을 사가정공원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서거정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있다. 참고로 한명회(韓明澮)의 호도 亭(정자 정)자를 쓴 압구정(狎鷗亭)이었다.
사가정공원 내에는 서거정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설치한 시비(詩碑)가 있다.
펼쳐진 책의 형상으로 조각된 ‘한중(閑中)’에서는 한가로움을 사랑한 서거정의 삶의 모습을 보는 듯 하고… 붓을 형상화한 ‘춘일(春日)’은 겨울이 가고 꽃이 피기 전, 이른 봄의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서정적 자아의 심회와 조응시켜 읊은 것이며… 조금 열려진 문 모양의 ‘독좌(獨坐)’에서는 퇴근하여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여유로움을 볼 수 있다.
오동잎 조각의 ‘수기(睡記)’는 여름날 한가롭게 낮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깬 후 순간적으로 와닿는 느낌을 형상화한 것인데, 코스가 달랐기에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사가정공원을 통해 깔닥고개라 불리는 산능선에 오르면 오른편에 용마산과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고 왼편으로는 망우공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있다. 망우공원길로 접어들면 많은 항일 애국지사와 예술인들의 묘와 기림비를 볼 수 있다.
망우리(忘憂里) 고개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와의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한 고개로서, 태조 이성계가 지관을 통해 훗날 자신이 묻힐 명당을 찾게 했는데 지관이 찾아낸 검암산(儉岩山) 밑 동구릉(東九陵) 내의 건원릉(健元陵)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흡족한 마음으로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어사 오우망의 於斯 吾憂忘矣)”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윗길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고 일갈한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선생의 묘. 봉분 둘레의 호석(護石; 둘레돌)이 대나무 형상이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보당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죽산선생은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이제 뒤편이 텅 비어 있는 조봉암의 백비(白碑)를 채우는 일은 온전히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고 읊은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스님의 묘.
출가 전에 얻은 따님이 반대하여 현재 큰스님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이장되지 못하고 있다. 딸자식된 입장에서 볼 때, 부친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하면 합장되어 있는 모친의 유해만 홀로 망우리공원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호암(湖巖) 문일평(1888~1939) 선생의 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혼(魂),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낭가(郎家),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은 심(心),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얼, 신천(信天) 함석헌(咸錫憲)은 씨알로써 우리의 민족정신을 표현하였다.
삼성그룹의 호암재단은 문일평 선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혹시라도 삼성측이 문일평 선생을 존경하고 기리기 위해서라고 착각하지 마시길… 그저 창업주 이병철씨의 호라는 것이 문일평 선생과 같은 ‘호암(湖巖)’일 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 선생의 묘. 선생은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써서 위창에게 가져가 보였더니 위창선생이 잘못된 문장을 지적하면서 “요즘 애들, 한문 몰라서 큰일 났다”고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분이다.
어린이의 영원한 벗,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 선생의 묘는 봉분이 돌로 이루어진 다소 특이한 형태다. 망우리 공동묘지가 들어선 1933년에 방상훈의 조부 방응모는 금광사업으로 번 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이어 고사포를 장만해 일본군에 헌납했다. 워낙에 희귀 성씨라서 소파선생 역시 조선일보 방씨일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떨떠름한 시선을 가졌는데, 이재섭 선생님께 여쭤보니 전혀 무관하단다. 소파선생께 죄송하다.
평소의 음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실제 걸어보니 산책이나 등산로로 훌륭한 조건을 갖추었고 거기에 역사공부까지 더할 수 있는 자연과 문화의 공간이었다. 이곳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공과를 철저히 검증해서 국립묘지로 정중히 모시고, 얼토당토 않게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 매국노나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하겠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대구 출생으로, 호는 사가정(四街亭) 또는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6세에 독서하고 시를 지을 줄 알아서, 신동으로 불렸다. 19세(1438년)에 진사과와 생원과에 연달아 합격하였고, 25세(1444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라는 관직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세종에서 성종까지 45년간 여섯 왕을 모시면서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6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23년간 문형(文衡)을 담당한 대문호이자 전형적인 대각문인(臺閣文人)으로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 대표적인 편저로는 「경국대전」「동문선」의 편찬과 「동인시화」「필원잡기」를 저술하여 조선전기 어느 문인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면목동에서 장안평 사이 지역에 거주했던 서거정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공원명칭을 ‘사가정공원’으로, 공원 내 정자 명칭도 ‘四街亭’으로 정하고 공원 입구까지 연결된 ‘사가정길’도 서울시에서 도로명칭을 정할 때 서거정의 호를 인용했다고 한다. 요약컨대 이곳 길을 사가정길, 지하철역을 사가정역, 공원을 사가정공원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서거정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있다. 참고로 한명회(韓明澮)의 호도 亭(정자 정)자를 쓴 압구정(狎鷗亭)이었다.
사가정공원 내에는 서거정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설치한 시비(詩碑)가 있다.
펼쳐진 책의 형상으로 조각된 ‘한중(閑中)’에서는 한가로움을 사랑한 서거정의 삶의 모습을 보는 듯 하고… 붓을 형상화한 ‘춘일(春日)’은 겨울이 가고 꽃이 피기 전, 이른 봄의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서정적 자아의 심회와 조응시켜 읊은 것이며… 조금 열려진 문 모양의 ‘독좌(獨坐)’에서는 퇴근하여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여유로움을 볼 수 있다.
오동잎 조각의 ‘수기(睡記)’는 여름날 한가롭게 낮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깬 후 순간적으로 와닿는 느낌을 형상화한 것인데, 코스가 달랐기에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사가정공원을 통해 깔닥고개라 불리는 산능선에 오르면 오른편에 용마산과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고 왼편으로는 망우공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있다. 망우공원길로 접어들면 많은 항일 애국지사와 예술인들의 묘와 기림비를 볼 수 있다.
망우리(忘憂里) 고개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와의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한 고개로서, 태조 이성계가 지관을 통해 훗날 자신이 묻힐 명당을 찾게 했는데 지관이 찾아낸 검암산(儉岩山) 밑 동구릉(東九陵) 내의 건원릉(健元陵)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흡족한 마음으로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어사 오우망의 於斯 吾憂忘矣)”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윗길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고 일갈한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선생의 묘. 봉분 둘레의 호석(護石; 둘레돌)이 대나무 형상이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보당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죽산선생은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이제 뒤편이 텅 비어 있는 조봉암의 백비(白碑)를 채우는 일은 온전히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고 읊은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스님의 묘.
출가 전에 얻은 따님이 반대하여 현재 큰스님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이장되지 못하고 있다. 딸자식된 입장에서 볼 때, 부친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하면 합장되어 있는 모친의 유해만 홀로 망우리공원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호암(湖巖) 문일평(1888~1939) 선생의 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혼(魂),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낭가(郎家),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은 심(心),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얼, 신천(信天) 함석헌(咸錫憲)은 씨알로써 우리의 민족정신을 표현하였다.
삼성그룹의 호암재단은 문일평 선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혹시라도 삼성측이 문일평 선생을 존경하고 기리기 위해서라고 착각하지 마시길… 그저 창업주 이병철씨의 호라는 것이 문일평 선생과 같은 ‘호암(湖巖)’일 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 선생의 묘. 선생은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써서 위창에게 가져가 보였더니 위창선생이 잘못된 문장을 지적하면서 “요즘 애들, 한문 몰라서 큰일 났다”고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분이다.
어린이의 영원한 벗,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 선생의 묘는 봉분이 돌로 이루어진 다소 특이한 형태다. 망우리 공동묘지가 들어선 1933년에 방상훈의 조부 방응모는 금광사업으로 번 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이어 고사포를 장만해 일본군에 헌납했다. 워낙에 희귀 성씨라서 소파선생 역시 조선일보 방씨일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떨떠름한 시선을 가졌는데, 이재섭 선생님께 여쭤보니 전혀 무관하단다. 소파선생께 죄송하다.
평소의 음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실제 걸어보니 산책이나 등산로로 훌륭한 조건을 갖추었고 거기에 역사공부까지 더할 수 있는 자연과 문화의 공간이었다. 이곳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공과를 철저히 검증해서 국립묘지로 정중히 모시고, 얼토당토 않게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 매국노나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하겠다.
깔닥고개로 올라가는 사진과 문일평 선생 묘 앞에서의 단체사진은 김승주 선생님이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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