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이성적으로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좀 더 우월한 이성을 가진 남성, 특히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교화되어야 하는 존재다.”
여자로 살기 - 역사 속의 그 여자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은 이성적으로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좀 더 우월한 이성을 가진 남성, 특히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교화되어야 하는 존재다.”
유교의 삼종지도냐고? 아니다. 서양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말이다. 계몽사상가들의 열린 생각, 트인 눈을 남몰래 흠모해 오던 독자라면 깜짝 놀랄지 모르겠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누구든 공평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나. 유감스럽게도 계몽사상가들이 말한 ‘인간’은 남성이지 여성은 아니었다. 지금 서유럽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높아졌지만, 300년 전만 해도 여성을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루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할 대상은 이성이지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가 바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다.
여성은 이성적 존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한때 스스로 ‘루소와 사랑에 빠졌다’고 할 만큼 루소의 사상에 심취했다. 루소가 말한 ‘천부인권’이라든가 ‘자연법’ 사상에 깊이 공감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루소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 결실이 《여권옹호론》이다.
《여권옹호론》은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성서 또는 페미니스트 선언문이라 불린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이다.
하지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무려 한 세기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이의 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건 1970년대 들어 유럽에 여성운동이 새 바람을 일으키면서부터다. 이유는, 메리의 삶이 유독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로 그이가 남긴 업적의 가치가 왜곡된 탓이기도 하다.
메리는 서른세 살 때 《여권옹호론》을 썼다. 《여권옹호론》을 쓰기까지 메리의 삶을 더듬어 보자.
메리는 1759년 영국 런던에서 몰락한 상인의 맏딸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그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부모의 끊임없는 불화였다.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며 메리는 ‘결혼이란 여성에겐 견딜 수 없는 짐이요, 여성을 노예보다 더 비참하게 만드는 굴레’라고 생각하게 했다. 메리에게 결혼은 ‘법으로 보장된 매춘’일 뿐이었다.
메리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만 열여섯 살 때 아는 목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영리하고 배움에 열성적이었던 메리는 실력을 인정받아 귀족 집안 아이들의 놀이 상대, 가정교사, 부유한 가정의 말 상대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부유한 상류 집안을 드나들며 메리는 호화로운 저택 서재에 장식품처럼 꽂혀 있는 책들을 읽어 치웠다. 그이가 본 상류사회 여성들은 오로지 ‘즐기는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연극, 무도회, 트럼프, 무도회……. 너무 어리석은 삶이라고 그이는 생각했다.
상류든 하류든 여성이 무기력한 존재이긴 마찬가지라고 깨달은 메리는 그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이는 여성이 이성적으로 미개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게 된 근본 이유가 사회제도의 모순, 특히 불평등한 교육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교육 때문에 여성은 스스로가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며, 설령 깨닫는다 해도 이성을 어떻게 가꾸고 드러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단다.
메리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운영할 꿈을 키웠다. 1784년 마침내 부유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뉴잉턴 그린에 학교를 열었다. 그이 나이 스물일곱 살 때 일이다.
그러나 학교는 1년이 채 못 가 문을 닫고 만다. 여동생 엘리자의 남편이 방해한 탓이다. 엘리자는 남편의 구타에 시달리며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메리는 엘리자를 도망치게 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편의 횡포가 아무리 심해도 법률상 남편의 ‘소유물’인 아내가 집을 나온다는 건 그때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엘리자의 남편은 메리를 비방하며 메리가 운영하는 학교의 평판을 떨어뜨려 결국 문닫게 하고 말았다.
혁명 한복판에서 태어난 《여권옹호론》
메리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진보적 지식인들과 사귀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책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메리는 열광했다. 여성의 지위가 변화되려면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교육제도가 바뀌려면 사회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메리는 혁명의 열풍이 몰아치는 프랑스로 건너가 토머스 페인, 콩도르세, 탈레랑 같은 내로라하는 혁명가들과 만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여권옹호론》이 탄생한다.
《여권옹호론》은 탈레랑의 <공공교육에 대한 보고서>의 답신 형식을 띠고 있다. 탈레랑은 혁명 후 프랑스가 어떤 교육을 해야 할 것인가 계획하면서 <공공교육에 대한 보고서>를 썼는데, 메리가 이에 대해 《여권옹호론》을 내놓은 것. 《여권옹호론》을 읽은 탈레랑은 프랑스 교육위원회가 교육안을 만들 때 메리를 참여시키도록 주선했다.
메리는 《여권옹호론》에서 여자 어린이의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유아기야말로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니만큼, 여성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려면 유아기 때부터 평등한 여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이는 주장했다.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 남녀 구별 없이 똑같이 옷을 입히고 자유롭게 배우고 동등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도록 남녀공학을 실시해야 한다’ ‘종교, 윤리 같은 과목뿐 아니라 신체 단련을 위한 체육을 중심으로 교과 과정을 짜야 한다’ ‘여성이 신체적 열등함을 극복하려면 어려서부터 남성과 같은 신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요즘은 초등학교부터 남자와 여자가 같은 교실에서 같은 내용을 공부하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무렵 남자와 여자가 한 자리에서 더구나 같은 내용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충격일 만큼 과감한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대를 맞았다. 메리는 혁명에 실망을 느꼈다. 그러던 1793년 2월,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자기 나라로 혁명의 불똥이 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한 것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던 영국인들은 스파이로 몰릴 위험에 빠졌다. 메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메리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인 사업가 길버트 임레이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자 임레이는 등을 돌렸다. 메리는 템즈강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 했다. 두 번에 걸친 메리의 자살 미수는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윽고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옛 동료 고드윈과 결혼했다. 둘 다 기존 결혼 제도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동거하다가 메리가 임신을 하자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메리는 딸을 낳은 지 열흘 만에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때 나이 서른여덟. 《여권옹호론》을 발표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이듬해 고드윈은 메리의 어린 시절 급진 서클 활동, 연애와 자살 미수,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솔직하게 쓴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이의 회고록은 사람들로 하여금 메리를 사생활 복잡한 자유분방한 여성으로 여기게 했다.
그때 신문은 메리를 가리켜 ‘철학적 바람둥이’라 했고, 여성으로서 훌륭한 행동은 하지 않고 그럴 듯한 주장만 앞세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메리의 사상이 지닌 가치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숨을 죽였다. 메리는 페미니즘과 도덕적 방종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었다. 메리가 선구자 같은 업적을 남겼는데도 뒤늦게야 인정받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세기 반이 지나서 메리의 사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가 메리를 잘 알지 못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알게 해 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성 최고의 행복은?
여성에게 인생 최고의 행복은 뭘까? 메리는 대답한다. 남성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에 ‘쓸모 있는 시민’이 되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쓸모 있는 시민이란 사회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사회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그이의 믿음이었다.
그이는 사회 참여의 한 방법으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자녀를 바르게 교육시키는 일은 하나의 당당한 ‘직업’이라고. 이 주장은 당시 영국 여성들에게 아주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중산층 여성들에게.
메리의 생각은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정치 참여를 갈망하던 당시 영국 중산층, 부르주아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이는 18세기 영국 중산층 여성들을 사회의 중요하고도 쓸모 있는 구성원으로 당당히 복권시켜 놓았다. 혁명이 끝나고 유럽 사회를 이끈 새 세력이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메리가 부르주아 여성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메리는 온건한 중산층 여성운동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자연인임을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하거나 체계 갖추어 설명해내지 못하던 그때, 여성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고 여성문제를 사회 개혁과 연결시켜 파악한 그이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메리의 딸들은 어찌 되었을까? 고드윈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딸 메리는 시인 셸리와 결혼했으며 소설가가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가 바로 딸 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