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7일 금요일

석촌동 연접적석총

#비지트인한성백제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석촌동, 방이동, 풍납동, 신천동 일대를 탐방하며 보냈다. 석촌동(石村洞)이라는 동명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돌말’, ‘돌마리’라고 불려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은 현재 돌무지무덤(적석총) 5기, 흙무지무덤(즙석분구묘) 1기, 움무덤(토광묘) 2기가 복원돼 있다. 정비된 2,3,4호 돌무지무덤은 계단 형태로 만들어져 중국에 있는 고구려의 태왕릉이나 장군총의 모습과 유사하여 부여에서 시작된 문화적 동질성을 보여준다.

몇 년 전과 달리 이번 답사에서는 새로이 ‘연접적석총’이란 구조를 알게 됐다. 연접적석총은 돌과 흙을 쌓아 만든 다수의 중·소규모 적석묘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확장하면서 큰 묘역을 이루는 형태로 드러났다. 특히 2기가 연접된 형태로 복원된 석촌동 1호분과 이에 인접한 A호 적석총(내원외방분)도 포함되어 총길이 120m에 달하는 규모를 보인다. 일정에 쫓길 수밖에 없는 동행탐방 없이 혼자 방문해 찬찬히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 

한 변의 길이가 50m가 넘는 3호분(동서 50.8m, 남북 48.4m)은 근초고왕릉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석촌동 고분들은 윗부분이 심하게 깎이고, 훼손되는 바람에 무덤 주인공이 묻힌 공간인 매장주체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석촌동 고분군의 돌들은 돌무지무덤의 내부를 채우고 외부를 감싸고 있던 것이다. 어떤 돌들은 한쪽 면을 편평하게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무덤의 외부를 감싸고 있던 돌들의 특징이다. 발굴된 많은 강돌과 깬돌을 분석한 결과 편마암과 규암 등으로 밝혀졌으며, 대모산과 연결된 석촌동 주변 산지와 한강에서 가져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욱리하(郁利河)에 큰 돌들을 가져와 묘곽을 만들어 선왕의 뼈를 묻었다.”는 「삼국사기」 기록(백제 개로왕 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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