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0일 금요일

1871년 6월10일, 구슬프고 장엄한 항전

6월10일 하면 1987년 6·10민주항쟁과 1926년 6·10만세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헌데 1871년 6월10일도 기억해야 한다. 5년 전인 1866년 대동강에서 자국 상선 General Sherman號가 소각된 사건과 통상교섭을 명분으로 米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소장이 지휘하는 조선원정대(군함 5척+1,230병력)가 1871년 6월10일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48시간 전투’가 시작된다. 엄청난 화력의 열세를 보인 조선군은 초지진과 덕진진(德津鎭)을 내주고 광성보로 퇴각했다.

광성보(廣城堡)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1823~1871)이 지키고 있었다. American Civil War(1861~65)를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은 조선군의 후방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고, 강화도 동해안에서 유독 툭 튀어나온 광성보를 3면에서 옥죄어왔다. 조선군은 미군의 총탄을 막기 위해 초여름 13겹의 면갑옷을 입고서 싸우다 피탄에 불이 붙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했다. 패배가 뻔한 전황인데도 단 한 명의 탈영병이 없었고, 최후에는 돌과 흙을 무기 삼아 던지고 뿌려가며 투혼을 불살랐다. 8시간 가량 치러진 학살 수준의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어재순 형제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염하(강화해협)로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

강화역사박물관은 辛未洋擾 당시의 광성보전투를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조선군은 상륙 후 성벽을 올라오는 미군을 상대로 분전하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의 전군이 궤멸당하고 만다.

상륙전을 경험한 슐레이 소령은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조선군은 낡고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아마 우리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는 기록(기함에서의 45년, 1904)을 남겼을 정도였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다음날인 6월11일에 철군하면서 가로세로 413×430㎝의 ‘帥’(장수 수) 한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잘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수(帥)자기는 약탈된 지 136년이 지난 2007년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만료됐지만 2년 단위로 갱신되고 있다. 미국측은 ‘수자기’를 문화재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에 임대는 가능하나 반환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사람 사이에는 평생의 친구가 있을 수 있지만, 국가 간에 영원한 우방은 없다. 151년 전 제국주의 미국은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해왔다. 그리고 우린 맞서 싸웠다.

신원을 알 수 없는 51구의 전사자가 7기로 분묘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으로 남았다. 이곳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다.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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