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 목요일

국보법 다큐 「실행자들」

어제 저녁 7시, 충무로 대한극장(1층 2관)에서 우리 사회를 억누른 그들의 이야기 「국가보안법의 실행자들」을 관람했다.
다큐는 “국가정책을 은밀히 조종하는 선출되지 않은 관료집단이 존재할까?”라는 2018년 3월 미국 몬머스대학 여론조사 질문을 시작으로 ▲정치개입 ▲DNA ▲악용은 필연이다 등 3개 파트로 풀어나간다. 다큐 내용을 요약하자면…

국정원, 경찰, 기무사(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사찰 목적은 공히 ‘정치보고서의 작성’이다. 우리는 흔히 정보기관이 정권에 충성한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충성을 다했지만 민주세력이 집권했을 때는 태도를 바꿨다.
군인권센터에 제보된 기무사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속보를 본 기무사 요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노무현은 기무사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기에 정치개입이 일상이었던 군정보기관 입장에서는 정권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 없다. 기무사에서 방출된 사람들이 민간인 경력직 군무원을 뽑는 자리에 지원해서 다시 그 자리에 들어가는 회전문이 기무사 인적개편의 결과였다. 대공분실은 가장 많을 때가 전국적으로 44개가 운영됐는데, 정보경찰 역시 폐지되지 못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정원 등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노무현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반발을 불러왔다. 국정원은 스파이앱을 설치, 스마트폰을 ‘점거’해 국정원 서버로 전송되는 패킷을 역조립하는 감청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국정원의 업무는 북한업무가 아니라 좌파(진보·야당·호남)척결로 극우보수세력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파수꾼 역할이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삼아 집권한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짓누르기 위해 ▲1948년 12월1일 법률 10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1950년 10월 육군본부 직할의 특무대를 창설했다. 일제가 잉태하고 이승만이 키웠으며 박정희가 완성한 극우공안체제는 친일과 반공이 결합한 극우적 성향을 야기했다. 극우성은 반드시 폭력성을 동반한다. 정보기관에 내재된 극우성과 폭력성은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승진을 하고 포상금을 받아 가는 극단적 집단이기주의를 초래했다. 국가보안법 사건을 이용한 정보기관의 포상금 잔치는 계속되고 있다. 유우성 사건으로 국정원 직원들에 지급된 포상금은 환수되지 않았다.

형법은 실제 발생한 범죄행위가 기준이다. 반면, 국가보안법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판단하고 처벌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으로 인해 정보기관이 자행하는 불법행위는 필연이 된다. 국제기구도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지적해왔다. 국가보안법은 “모호한 용어로 정의되어 있고, 행위의 범위가 불합리하게 광범위하다.”(자유권규약위원회) “그 모호성으로 인해 독단적으로 적용될 심각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문방지위원회) “정치적 다원성과 평화적 반대를 억압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유엔특별보고관)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그것이 적용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유엔인권이사회)

국가보안법의 악용을 피하기 어려운 또 다른 근본문제는 ‘반국가단체’ 규정의 모순에 있다. 여기서 반국가단체는 북한을 지칭하는데, 북한주민은 이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구성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처벌대상이 된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주민을 처벌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북한을 연구하거나 말하는 것, 북한사람과 만나거나 통신하는 것, 북한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 등 북한과 관련된 모든 행위(동조, 찬양고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도 있으나, 언제 어떤 법이 적용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치세력과 국민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어떤 행위는 보호받고 어떤 행위는 처벌받는지, 누가 하면 보호받고 누가 하면 처벌받는지, 처음엔 합법이었는데 언제 어떻게 뒤바뀌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될수록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도 늘어나는 모순. 국가보안법이 존치한 상태로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21년 5월19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에 10만 청원이 성사되었다. 청원을 시작(5.10)한 지 단 9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폐지를 반대하는 국회청원도 시작되었다. 국정원의 입장은 “간첩을 잡는 것이 국정원의 일이며, 국가보안법은 폐지가 아닌 존치·개정해야”(2021.6)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레드콤플렉스는 빨갱이공포증, 간첩공포증이 아니라 색깔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증이다(김태형). 국가보안법이 존치하는 한 정보기관은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통일을 가로막는 실행자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정보기관 존재의 근거이자 비전이며(조지훈), 조직을 받쳐주는 빽이자 명분이면서(최승제), 불법행위를 저질러도 괜찮다고 하는 생각의 기반이다(오민애). 국가보안법을 자양분으로 공작을 펼치고(장경욱), 결국은 혐의자의 과거 이력·행적을 통해서 주관적인 추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이주희). 남북관계는 국정원이 통제하는 수준에서의 교류협력만이 가능하다(오창익). 공안기관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분단상황에서 나온다. 개혁은 미친 척하고 하는 것이다(한홍구). 모든 사람의 찬성을 받기는 어렵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실 결단밖에 없다(우희종).

북한 기술자들과 인공지능 사업을 진행하던 김호氏의 갑작스런 구속은 국정원이 김호氏의 사업을 오랫동안 관리하고 협조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봤을 때 더욱더 충격적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지면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과 남북 교류협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고 ▲종북으로 몰리지 않기 위한 자기검열, 상호검열이 횡행하며 ▲민주진보세력의 위축과 분열, 수구세력의 결집을 유발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정보기관의 고문과 구타는 몇몇 수사관들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국가폭력이다. “(위기를 감지한) 공안조직의 절박함을 지금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철폐를 못하고 있다”는 김호氏의 외침이 처절하다.

59분의 런닝타임 후 노래패 ‘우리나라’의 「통일이 안보다」를 배경음악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제작위원, 후원자 명단에 아는 분 이름도 보이고 페친도 보인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 무대 왼쪽부터 류성(각본), 서지연(총연출), 장경욱(변호사) 순. 내 자리(D열5번)에서 대각선 바로 앞(C열6번) 뒷모습이 대북사업가 김호氏의 부친 김권웅 님이다.

불법사찰과 인권침해, 고문과 조작,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과 정치개입은 국가보안법의 자체 모순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결과이다.

친일과 반공주의, 극단적인 폭력성, 조직 이기주의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뿌리 깊은 유전자이다. 그동안 정보기관의 개혁이 번번이 좌초된 것은 그들의 유전자를 바꾸지 못한 채 명칭 변경, 기관장 교체, 제도 조정 등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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