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9일 월요일

공빈 김씨 모자 묘역

12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공빈 김씨 삼모자(三母子) 묘역을 답사했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이혼(李琿)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이 없던 차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전란 중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分朝)를 이끌며 관민의 신망을 얻었는데, 이는 정탁(鄭琢)이 기록한 피난행록(避亂行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방계승통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말년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고 싶어했으나, 두 살배기 어린 아이였기에 승하 직전 할 수 없이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608년 즉위 초부터 광해군은 전후복구에 전념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의 자구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실정으로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능양군 이종(李倧)과 반정군에게 폐위당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 67세(1641년)의 천수를 다했다.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1643년 제주도에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광해군묘(사적 제363호)는 2개의 봉분(쌍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하나에 망주석 2개,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문화류씨 문성군부인의 저고리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15호(광해군비당의)로 지정돼 있다.


이어서 2번째 답사지는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53~1577).
즉위 직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10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가 모두 삭탈되어 성묘(成墓)로 강등되었으나,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외양을 볼 수 있다. 2006년에 성묘에 대한 도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전광렬이 주연한 MBC 드라마 <허준>에서 박주미가 공빈으로 출연했었다.
진건읍의 송릉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임해군 이진(李珒, 1572~1609)은 선조의 서장자이자 광해군의 친형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임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포로가 되어 협상 끝에 풀려났다.


방탕하고 난폭한 성격 탓에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