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금요일

망원(望遠)

5월 14일(토)… 제15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망원동과 합정동 일대를 걸었다. 명례방협동조합의 2번째 야행(이야기가 있는 도보여행)을 겸한 일정이다.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성산동 성당을 지나고, 홍익여중고를 경유하여 먼저 찾아간 곳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아시아연대회의>를 발족한 이후 민족을 넘어 여성인권의 문제로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왔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원래 서대문구 독립공원 매점 부지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지금의 성산동 자리에 들어서게 됐다. 못난 남자들 때문인데,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 취급을 하는 소위 독립유공자 단체라는 사람들의 자뻑의식에 어처구니가 없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 1997년 별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것을 기념해 8월 14일을 ‘위안부 기림일’로 정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는 1992년 1월 8일을 시작으로 2015년 10월 14일, 1200차에 이르고 있다.


기획전시관2를 관람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1964.9~1973.3)한 한국군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이 발생하였고, 그에 따른 피해자들은 엄청난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듯 한국 역시 베트남에서 자행한 부끄러운 일들에 대해 책임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산증인인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42분만이 생존(2016년 5월 기준)해 계신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박유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책(제국의 위안부)을 썼을까. 이덕일의 책 제목이기도 한 ‘우리 안의 식민사관’은 너무나 견고하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앞길을 거쳐 서교동 최규하가옥으로 향했다. tvN 응팔(응답하라 1988)에 동룡이네 집으로 나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드라마에서 동룡이가 이 식탁에 앉아 엄마가 끓여준 쇠고기미역국을 먹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이 나왔었다.


12대 국무총리와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는 1973년 오일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설득하여 원유를 확보하는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사임하고 만다. 문민정부 시절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법정 증언을 거부하고 관련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2006년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지상 1·2층과 지하층으로 이뤄진 최규하가옥(등록문화재 제413호)에서는 최규하·홍기 부처의 검소함을 느껴볼 수 있다.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에서 사전예약을 했기에 보다 상세한 해설(김영숙 전시해설사)을 들을 수 있었다.


태종의 차남이자 세종의 둘째형 효령대군이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1425년 세종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왔다가 이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려 매우 기뻐하면서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가 20세에 요절한 관계로 세조 사후, 차남인 예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재위 14개월만에 의문사한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네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이 즉위해야 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의 선택을 받은 차남 잘산군이 주상이 되니 이가 성종 임금이다. 월산대군은 희우정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이름하고 시문을 읊으면서 현실정치에서 손을 놓았다. 그후 어머니인 덕종비 소혜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35세로 병사했다.
연산군 시절 망원정의 규모가 연회를 즐기기에 협착하다 하여 증축을 명하면서 수려정(秀麗亭)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아담한 정자로 남게 되었다.


강변도로 쪽의 솟을삼문이 아름다운 망우정…
가을밤에 낚시를 드리웠는데 고기 대신 빈 배에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자연인의 유유자적하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가 선명한 ‘추강에 밤이 드니’란 월산대군의 시조를 읊조려 본다. 멀리 원거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는 망원(望遠)의 의미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당산철교 지척에 20m 높이로 우뚝하니 자리잡은 사적 제399호 잠두봉(蠶頭峰)은 수도 한양의 방어기지였는데…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당한 후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충남 아산 음봉에서 옮겨온 복자바위(福者岩)는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신도들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걸터앉아 성가를 불렀던 바위인데,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바위’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 4월,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으로 유명한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높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의 화강석으로 제작했다는데… 순교성지 내의 척화비는 나중에 세운 가비(假碑)가 아닌가 생각된다.


양화진 장대석을 통해 어영청 관할의 진대(鎭臺)를 설치하여 옛 양화도(楊花渡)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호조에서는 삼남에서 올라온 세곡을 관리하기 위해 점검청을 두었다고 한다.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지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입국한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 1872~1909)은 4월 14일 (Daily Chronicle)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해임된 후,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1904년 7월 18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했다. 고종은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이름과 함께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인 베델 선생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으며 국한문·한글·영문판 등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일제의 압력을 받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1909년 5월 1일 고문후유증으로 서거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인수되어 제호에서 ‘대한’이 빠진 매일신보로 개칭, 1910년 8월 30일자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베델은 37세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생애의 마지막 5년을 한국에서 보냈고, 유해는 고국 영국이 아닌, 이국땅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A-2). 선생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베델 선생 묘소 옆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으로 불리는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박사의 묘소가 있다. 박사는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하였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증은 헐버트, 이회영, 이상설 순으로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추방된 지 42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헐버트 박사는 입국 일주일만인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서 서거하였다. 평소 “나는 웨스터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소망에 따라 박사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B-7). 1950년 3월 1일에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이국인들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이국땅에 묻힌 벽안의 선열 두 분의 영면을 기도한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정치인부터 꺼리낌 없이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표방하는 경제계,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종교계까지… 아직도 친일부역세력이 횡행하는 우리의 현실… 참으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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