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2일 목요일

원천부원군 묘소 참배

5월 5일…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찾아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대은선생 행장(行狀)’ 역문(譯文)이다.

공의 휘(諱)는 안열(安烈)이요, 자는 충가(忠可)요, 호는 대은(大隱)이요, 성은 변(邊)씨라. 변씨는 본래 자성(子姓)이니 은(殷)나라 미중(微仲)의 후손이라. 미중이 송왕(宋王)에 봉(封)하여 그후 평공(平公)에 이르러 아들 어융(禦戎)이 자가 자변(子邊)이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으로 하다.
 대대로 중국 롱서(隴西)에 살았다가 변송말(汴宋末)에 바다를 건너 동으로 와서 취성(取城)에 거하니 곧 지금의 황주(黃州)라. 우리 고종(高宗) 때에 휘(諱) 여(呂)가 있어 충절로서 상장군에 재수되어 태천백(泰川伯)을 봉하였다. 그 후 휘(諱) 윤(允)은 진사로서 서해도안찰사가 되었다. 생휘(生諱) 유(宥)인데 공부의랑(工部議郞)이요. 생휘(生諱) 제(制)는 검교참지정사(檢校參知政事)이고, 행위(行諱) 눌(訥)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요. 부인은 백(白)씨니 공에게 증조라.
생휘(生諱) 석(碩)은 문과통례(文科通禮)니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그의 아우 순(順)은 원나라의 벼슬하여 심양후(瀋陽候)를 봉하였고 고려조에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추증하였고 부인은 오(吳)씨니 공의 조(祖)라. 생휘 양(諒)은 세습하여 심양후를 봉하고 성근익조공신(誠勤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겸직하였고 부인은 곽(廓)씨 공의 부모라. 원통(元統) 2년 갑술 4월 갑자일에 심양사제(瀋陽私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지조가 청고(淸高)하고 국량(局量)이 넓어서 문장도 능하며 무예도 뛰어나서 세상을 경륜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정(至正) 11년 신묘 정월에 18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특히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남이라. 일 년 동안에 초승(超陞)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2월 경자(庚子)에 우리 왕대비가 원나라 노국공주로서 공민왕에게 하가(下嫁)하니 그때 공이 수장(首將)으로서 배행(陪行)하고 와서 드디어 우리 조정에 벼슬하였다.
 임진에 왕의 친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주로 관적(貫籍)을 하사하였으니 원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관향을 원주로 하였다. 임인(壬寅)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여 이등공신을 녹훈(錄勳) 받고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배명되었다. 조공 후 경성을 회복하니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하였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고 두 번 겸직하여 지삼사일직사사(至三司密直司事)가 되었다. 계축(癸丑) 8월에 총의용우군(總義勇右軍)이 되고, 갑인 9월에 최영과 같이 제주의 적을 토벌할 것을 정하여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가 평리로 전직이 되었다. 을묘에 상왕이 즉위하자 공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윤충량절선위익찬공신(輪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병진 9월에 양광(楊廣) 전라도도지휘부사 겸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11월에 왜적이 부령(扶寧)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는지라 공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 등과 다같이 독전하여 적을 대파하니 참획(斬獲)한 바가 심히 많았고 첩보를 상진(上秦)하니 왕이 백금 한 덩이와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하였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2품 이상의 고관들이 천수문(天壽門)에 나와 굿놀이를 하며 맞이하였다. 공이 승진하여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정사(丁巳) 3월에 경기도 총사로 재수되어 왜구를 공격할 새 4월에 왜선이 서강으로 침입하거늘 공이 최영과 더불어 격파 퇴각시켰다. 5월에 왜적을 수원 양성(陽城)에서 격파하고 8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조전원수가 되어 왜적을 해주에서 격파하였다. 또 최영과 같이 왜적을 해평에서 격파하다. 경신(庚申) 8월에 왜선이 대거 침공하여 충청·전라·강원·경상도를 도살하고 인민을 살상하니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가 되어 왜적이 침략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왕이 이성계를 명하여 양광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왜적을 운봉 인월역에서 대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빛이 되어 6,7일이 되어도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 싸움에서 말 1,600여 필과 무기를 무수히 노획(鹵獲)하여 첩보가 상진되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궁중에 큰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10월에 개선하니 왕이 최영에게 명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고 천수문 앞에서 영접하고 이성계와 공에게 황금 5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임술 4월에 왜구가 담양을 침략하자 공이 도원수가 되어 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격파하고 8천여급을 참수하고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다. 5월에 또 한방언 등과 같이 왜구를 안동에서 격파하여 3천여 급을 참수하고 말 60필을 노확함에 훈록으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봉하였으며 얼마 후 판삼사사가 되었다.
 무진(戊辰)에 이성계를 따라 요양 정벌에 가서 위화도에 이르러 의리(義理)를 들어 회군하였다. 6월에 상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공이 드디어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내가(牧隱) 공과 더불어 정비(定妃)의 교지(敎旨)를 받고 왕자 창(昌)을 옹립하였다. 9월에 상왕이 여흥(驪興)으로 옮기자 공이 사사로이 알현(謁見)하고 나와 더불어 상왕을 영립(迎立)할 것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왕실에서 믿음이 있고 조정의 명망이 심히 높았다.

 이성계가 포은과 공을 초청하고 주석(酒席)을 베풀고 술을 권하여 노래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 담이 퇴락(頹落)한들 어떠하리
우리들이 이러하다 죽지 아니하면 또한 어떠하리’ 하니

 포은이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공이 또 화답하기를
‘내 가슴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져 쓰라림은 네맘에
맡기련만 우리 님 빼앗는덴 내 어찌 굴할소냐’ 하였다.

 기사(己巳) 11월에 대호군 김저(金佇)가 밤에 이성계의 집에 들어가서 이성계를 모해(謀害)코자 하다가 도리어 잡혀 갇힌 바가 되어 국문(鞠問)에 불복하니 이에 칼로서 발바닥을 베고 불로 지져대자 묻는데 따라 자복하였다. 이것이 구실이 되어 공이 연루되니 드디어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왕(上王)을 강릉으로 옮기고 왕자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승진(陞進)되었다. 경오(庚午)정월에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이언(李彦)·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고 공에게 사형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파직만 하였다. 다음 날 또 상소하니 왕이 오히려 관대히 하여 삭직(削職)하고 한양으로 유배하였다. 또 그 무렵 성문 밖에서 강도가 일어나고 궁정에 여우가 나오는 것을 변안열의 소의라고 면전에서 진달(秦達)하고 또 5차나 상소하였다.
 대사헌 성석린(成石磷)이 공을 대역으로 논계(論啓) 하는지라 왕이 부득이하여 상소를 물리고 배소(配所)로 보내어 ‘국문(鞫問)을 하지 않고 사형하라.’하니 평의사가 상진하기를 ‘대신을 그 죄로 묻지도 아니하고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다.’하니 왕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에게 가서 힐문케 하니 벽재역에 이르르니 공이 이미 피화(被禍)됨을 들었다. 실은 정월 16일 경진에 피화되었다.
 이에 4월에 회군의 공을 훈록할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변안열은 이미 죽었으나 의를 일으켜 회군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잊을 수 없다.’ 하고 녹번을 하사하고 직첩(職牒)을 환급하였으며 묘지를 하사하여 양주(楊州) 주엽(注葉)에 의관(衣冠)으로 장사(葬事)하였다.
 신미(辛未) 9월에 공이 이초(彝初)의 무고(誣告)에 사연(辭連)되어 마침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하고 가산을 적물(籍沒)하였다.
 아! 공의 충열(忠烈)이 포은(圃隱)과 같으니 후인이 논하고자 하는 자는 포은에 구하면 가(可)할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진안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元)씨로 3남 1녀를 낳으니 남(男)은 현(顯))이니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이(頤)와 예(預)요 여(女)는 이방번(李芳蕃)에 출가하였고 손(孫)에 남녀는 70여 인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