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0일 토요일

한민족사학회 창립대회 참석

오후 2시… 한민족사학회 창립대회 및 학술세미나 참석 차 서대문독립공원(3호선 독립문역 ④번출구) 독립관 무궁화홀로 향했다(서대문구 의주로 247).


독립관(獨立館)은 1407년(태종7)에 중국사신들의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迎賓館)으로 초기의 이름은 모화루(慕華樓)였으나, 1429년(세종11) 확장·개축되면서 모화관(慕華館)이라 개칭되었다.
세워질 당시에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영천동이었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칠량 팔작지붕 구조로 되어있는 조선시대 한식 목조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구한말에 국제관계의 변화로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모화관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으나 나중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서울특별시는 1989년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서대문형무소를 의왕시로 이전하고, 전문가의 고증·자문에 따라 지상 1층(555㎡), 지하 1층(377㎡)의 구조로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독립관을 복원하여 지상 1층에는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 1층은 학술 및 기념 행사장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애초에 중국측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재)동북아역사재단이 바야흐로 변질되어 되려 동북공정의 최대 도우미를 자처하는 행태를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어 분연히 일어나 한민족사학회를 발족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변이다.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영문책자 시리즈를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에 발간 의뢰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다. 역사학계에도 모피아·관피아·산피아·해피아·법피아와 같은 사(史)피아가 존재함이다. 학자들만의 유희에 머물지 않겠다는 이덕일 초대 한민족사학회장의 일성이 귀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박사학위자뿐만 아니라 역사관련 단독저서 2권 이상 저자에게도 학술회원의 문호를 열어놓고 있는 특이성을 회칙에 명시하고 있다.
모화사상과 식민사관에 맞선 새로운 역사학회의 탄생을 축하하고 지지한다.


독립문 앞쪽의 서재필 동상은 촬영하지 않았다. 공무원 수험서 「심한국사」로 유명한 심태섭 선생에 따르면, 필립 제이슨(1864~1951)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항일 독립투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18세인 1882년(고종19) 별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관직을 시작한 서재필은 갑신정변(1884)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하여 1890년 조선 출신 최초의 미국시민권자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2차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박영효의 권유를 받고 1895년 중추원 외부의 미국인 고문으로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1896.4.7)했지만, 그가 얘기하는 독립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에 국한되는 것이고, 그가 주창한 한글전용은 청나라와 한자를 배척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어의 로마자화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1977년 박정희에 의해 서훈 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고,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현 국사교과서에서는 철저한 미국인 필립 제이슨을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로 미화·둔갑시켜 놓고 있다. 아마도 일제의 ‘조선사편수위원회’가 어떠한 개혁도 없이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회’로 자동계승되었기 때문이겠지. 도리어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說 1872~1909) 선생이야말로 비록 외국인이지만, 일본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배설 선생께는 1968년 필립 제이슨보다 아래 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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