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3일 수요일

만해(卍海)의 심우장(尋牛莊)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1호…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양옥의 관리사 그리고 용운스님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는 작은 정원이 나온다.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독립선언서 공약(公約) 3장을 집필했던 승려이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이 1933년부터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입적할 때까지 사시던 심우장(尋牛莊)은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은 기와집이다.


심우장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온돌방이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고, 부엌 뒤로는 식사 준비를 하는 공간인 찬마루방이 배치되어 검소하고 소박한 구성을 보여준다. 남향을 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하여 동북향으로 지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태백의 마부작침(磨斧作針)은 들어봤어도 마저절위(磨杵絶葦)라는 문구는 생소한데…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쉬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님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용운스님은 기미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유했으나, 변절한 최린·최남선 등과는 아예 관계를 끊고 살았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60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을 때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용운스님이 자신이 머물던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키셨고, 조국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영양실조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속세를 떠나셨다. 최고 수준의 문학적 성취와 진정성이 담긴 스님의 시편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