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박제가, 상공업 진흥을 역설하다!

영조 때인 1750년 밀양의 서얼 신분으로 출생하여 『대학』에서 뜻을 취하여 제가(齊家)라 이름하고, 굴원의 『이소』 노래에 뜻을 붙여 초정(楚亭)이라 호를 지음.
1779년에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이른바 ‘4검서관’으로 이름을 날림.
그가 살아 활약한 18세기는 산업혁명, 계몽과 이성의 시대로 중국에서는 강희·건륭의 통치 시기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벽(癖, 미칠)과 치(癡, 멍청이)의 오덕후들이 모인 학습동아리 ‘백학파’의 일원으로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금, 서이수, 백동수, 이희경, 이희명, 원중거, 변일휴, 김윤겸, 김용행, 이광섭, 이희산, 홍대용 등과 교류를 맺었지만… 뜻이 맞는 이가 적어 늘 고독한 일상을 살아간 듯.

박제가는 가난과 고통의 원인을 부정부패나 서얼제도에 국한하지 않고, 그 기저에 놓인 조선사회의 본질적인 한계를 발견함. 10~20% 안에 속하는 상류층 인사들마저도 끼니를 건너뛰고, 종이가 없어서 책을 쓰지 못하고, 기본적인 생필품 부족과 함께 여차하면 여기저기 돈을 빌려야 하는 가난한 조선의 현실이 북학으로 표현됨.

『맹자』「등문장공구」에서 남만의 지식인 유량 같은 사람들이 유학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한 것을 차용하여 자신의 저서 이름을 『북학의』라고 명명했는데…

北學의 3가지 논리는 ①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 출처를 따질 것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② 오랑캐가 중원을 점유하고 있을지라도 실제 중원의 문명은 역사적으로 면면히 전승되어 온 하·은·주 3대 이후의 고유한 중화의 것이라는 인식. ③ 궁극적 목표는 이적을 물리치기 위한 실제적인 힘을 기르는데 있고, 결국 북벌론이나 대명의리론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기검열적인 요소를 보이면서도 맹목적인 국수주의에 비판을 가하였다.

『北學議』(내편)「안장」에서 보듯 “대저 재물은 비유하자면 우물과 같아서, 퍼내면 채워지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 심지어 농업이 황폐해져 농부는 농사하는 방법을 놓치고, 장사는 이익이 박해 실업한다. 그러니 사민(四民)이 모두 곤궁하여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는 일갈로 利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수레를 이용한 교통의 개선과 청나라 선진문물 수용 및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주장했다.

박제가… 그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서얼로 살았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상위 10% 안에는 드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국왕(정조)의 측근에서 20년을 근무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조선이라는 사회가 너무나 완고하다는 사실, 주변 사람들조차 그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외침을 외면한 현실, 그 고루하고 답답함이 미래에 어떤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안타까움은 아니었을까?
- 오지석 숭실대 교수, “우리시대는 어떤 목민관을 원하는가” 제3강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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