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4일 화요일

김육, 안민은 대동법에 있다.

조선시대 세금으로는 토지에 대한 조세(租稅), 개인에 대한 부역(賦役), 가호에 대한 공납(貢納), 정남의 병역인 군역(軍役)이 있었다. 지방민이 국왕에 대한 충성의 개념으로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貢納)은 국가수입의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종류만 해도 수천가지인데다 해당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각 군·현마다 토지 면적과 백성의 수가 달랐음에도 군·현 및 가호(家戶) 단위로 부과돼 작은 군·현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군·현과 마을이라 해도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와 가난한 전호(佃戶)가 같은 액수를 납부하는 불평등한 악법이어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사실 공납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은… 부과 단위를 가호에서 토지 면적으로 바꾸면 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부담이 늘어나고 토지가 없는 전호(소작인)는 면제되게 된다. 처음 공납의 문제를 건드린 인물이 조광조였고, 이를 재론한 사람이 이율곡이었으나, 토지결수를 공납액의 기준으로 삼는 대공수미법은 양반관료들과 전호지주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광해군은 1608년 즉위년에 한백겸과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으나, 인조 때 조익의 건의로 강원도로 확대되었을 뿐 양반 지주들의 결사적인 반발과 부정부패의 여지가 적어지는 것을 꺼려한 아전들의 몽니로 정작 농토가 많은 하삼도(경상·전라·충청)로 확대 실시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김육은 효종에게 자신을 등용하는 조건으로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대동법 정국을 열었고, 결국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확대 실행을 이끌어 내었다.

대동법 시행과 관련한 주요 요소
광해군
관청
시행
기준
세목
제안/재청
1608
선혜청
경기도
토지면적
미곡(쌀), 포(布)
한백겸/이원익

원인
ㆍ지역에 일정한 액수의 공납 부과, 이를 가호(家戶)에 할당
ㆍ토지와 인구를 기준하지 않은 부당한 할당량으로 농민 부담 증가
ㆍ신유공안(1501)으로 공납 체제 파괴, 방납업자의 폭리와 매납 등 발생
내용
조광조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미법을 제안, 기묘사화로 실패
ㆍ1569년 이이가 공물을 미곡으로 대체하는 대공수미법 제안(동호문답), 지배층의 반대로 무산
ㆍ1594년 유성룡의 제안으로 대공수미법 시행, 1년만에 폐지됨
ㆍ임진왜란 이후 1608년 5월에 광해군이 한백겸과 이원익의 제안을 수용해 대동법 실시
경과
ㆍ1623년(인조1)에 조익 건의로 강원도에 실시
ㆍ1651년(효종2)에 김육 등의 건의로 충청도에 확대
ㆍ1658년 전라도, 1666년에 함경도, 1677년에 경상도, 1708년전국적 실시
영향
ㆍ조세 정의의 실현: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여 세금의 형평성이 유지됨
ㆍ공인의 등장: 관청물품을 조달하는 새로운 직업, 서양의 부르조아 계급과 유사
선대제의 등장: 상인자본이 수공업을 재배하는 형태로 초기 자본주의 형성

훨씬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 등 기득권의 집요한 반대를 이겨낸 혁명적인 조세개혁 법안인 대동법은 숙종 때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조세정의의 실현과 함께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 수공업자에게 자본을 대주고 용품을 제작게 하는 선대제(先貸制)를 촉발하여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지만, 얽히고설킨 조선사회의 수많은 모순을 한꺼번에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되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金堉)과 같은 안민(安民)을 최우선으로 하는 목민관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오정윤 미래학교장, “우리시대는 어떤 목민관을 원하는가” 제1강 요약정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