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6일 토요일

가톨릭교회, 반사회성 지적하는 책임 있는 목소리 내야

1910년 3월26일 토요일, 랴오닝성 뤼순감옥엔 비가 내리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오전 10시 15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9.9.2~1910.3.26)은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 여사가 보내온 흰 두루마기를 입고 교수형으로 불꽃 같은 31년 삶을 마감했다. 1897년 1월, 황해도 매화동본당 청계동공소에서 안응칠에게 세례를 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한국이름 홍석구) 신부가 안중근 도마를 세차례 접견하며 마지막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1910년 12월,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된 안명근 야고보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척살에 관련한 일을 빌렘 신부에게 고해했는데, 이를 보고받은 조선대목구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이름 민덕효) 주교는 눈길을 걸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및 주차군헌병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에게 밀고했다. 이 일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날조되면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가 해체되고 독립운동의 불씨가 꺼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뮈텔 주교는 당시 일본인들이 종현성당(명동성당)의 진입로를 차지하여 진고개로 넘나드는 통로가 막히면서 소송까지 갔던 문제를 배덕(背德)의 대가로 양로원 길과 수녀원 정문 길을 확보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고해성사 비밀준수의 의무를 저버리고 가톨릭교회는 그를 파문했지만, 안중근 도마는 끝까지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이는 1909년 12월13일부터 1910년 3월15일까지 써내려간 한문본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0년 ‘안중근의사 순국 100돌 추모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당시 교회 상황으로 봐 뮈텔 대주교가 교회와 사제,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모두를 돌보는 방법을 고심해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뮈텔 주교를 옹호했다. 반면, 2019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담화에서 “100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했다. 주교회의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였고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하였다”고 반성했다.

반성과 성찰은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검찰공화국의 도래를 앞두고 어느 때보다 교회 장상(長上)들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며 복음적 소명을 다하여야 한다. 눌린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침묵과 방조로 일관하는 것은 또다른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안중근 도마의 생애는 가톨릭 평신도사도직의 전범(典範)이다. 그동안 사제, 교회의 침묵에 제동을 걸지 못한 신자들도 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17년 3월26일(日) 안중근의사 순국 107주년 추모식 및 생가복원선포식에서 사부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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