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7일 월요일

광나루 건너서 보루 길을…

6일(日) 오전 11시,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가 진행하는 「서울-평양, 고구려로 만나다」 첫 현장탐방으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을 만나고 왔다.

낙타고개에서 해맞이광장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산불진화장비 보관함(26) 앞쪽에 돌무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고구려가 아닌 신라의 부부합장묘로 추정된다는데 10㎝ 정도만 걷어내면 바닥이 나온다는 설명을 들었다.


사실 나는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 돌덧널무덤(石槨墓석곽묘), 돌널무덤(石棺墓석관묘), 고인돌무덤(支石墓지석묘), 돌방무덤(石室墓석실묘) 등 돌무덤(石墓석묘) 종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아래]아차산 3보루 왼편에도 돌무덤 흔적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니 왼편으로 지면에서 살짝 넓게 패인 공간이 나온다. 1보루가 있었던 곳이다. 30㎝만 파내려가도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누고 있는 쉼터로 변모한 모습이다. 당장은 추가 발굴계획이 없다고 했다. 발굴 최소화… 발굴 자체가 파괴행위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우측 건너편에 5보루가 보인다.


아차산 5보루는 현재 출입이 제한돼 있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쌓으면 말 하나 지나갈 정도로 쌓기 때문에 아차산에서도 마도(馬道)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그리고 등산로에 보이는 돌들이 다 성돌이라고… 결국 유적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거다.

산 아래 평지에는 백제 유물이, 고구려 유물은 주로 산지에서 발견된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다.

용마산 1,2보루 너머가 능리, 지금의 능동 일대다. 최종택 교수는 6세기 전반 말객이 지휘하는 고구려 둔전병이 이곳 아차산 라인에 1천명, 건너편 용마산 라인에 1천명 주둔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남쪽으로 펼쳐진 강변 앞쪽에 아차산성(아단성)이 보인다.


용마산 1,2보루 전경

1997년 봄, 무려 15세기 동안 묻혀 있던 아차산 4보루 발굴 조사를 계기로 양주와 임진강 일대, 대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고구려 성들이 추가로 확인되었고, 2004년에 20개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堡壘群)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됐다.

탐방단은 최종택 교수의 방어시설, 저수시설 등 유구배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아차산 4보루 성벽을 돌아보았다. 건조한 겨울철엔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말단 병졸이 산길을 따라 내려오기도 했을 거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1997년 아차산 보루 중 처음 발굴된 아차산4보루 모습


하산길에는 3보루 유적지에서 방앗간 시설을 확인했다. 방아채를 받쳐주는 화강암 지지대인 볼씨는 놀랍게도 등산로 한가운데 있어 지금도 등산객들의 발길에 차이고 있다.


3보루의 방아시설 중 하나인 디딜방아 볼씨(방아를 받치는 쌀개를 지지하기 위해 박아 놓은 돌). 사진에서 방아확(곡물을 빻는 둥근 홈이 난 돌)은 보이지 않는다.

백제군의 반격을 받은 고구려는 500년 무렵 한강이북 아차산에 보루를 축조하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보루군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퇴각한 551년경 폐기되기까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위] 최종택 교수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장면을 포착해준 김현주님의 센스 만점 샷… 고맙습니다.  [아래] 15~16세기 전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명왕이 바라보았을 한강이남땅

신라나 백제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물·유적이 적은 남녘의 고구려 자취를 발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새록새록~ 다음 아차산성 탐방 일정(6월27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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