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4일 금요일

평양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

1일(화) 저녁 7시, 평양탐구학교 2회차는 (주)여행이야기 박광일 대표가 「평양의 역사와 역사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택(宅), 왕검성(王儉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부루나, 서경(西京), 호경(鎬京), 류경(柳京), 평양부, 평양직할시… ‘혁명의 수도’ 평양(平壤)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평양은 427년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안학궁)로 건립됐고, 586년에는 최대 길이 23㎞에 달하는 장안성(북성·내성·중성·외성)이 완공되면서 명실공히 한반도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 당시에도 개경, 경주, 한양과 함께 4대 주요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며 제2의 중흥기를 맞이했다. 조선왕조는 전조 고려의 개경세력을 압박했고, 중국과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평양은 한반도 북부의 중추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하고, 대륙 침략을 위한 공업 및 병참기지로 개발했다.

김일성 원수는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평양을 포기하지 않고 일제가 추진했던 동서축을 기준으로 계획·확장하여 ‘이상적 사회주의 도시’ 공간을 구현하는데 힘을 쏟았다.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은 평양성(371), 당제국의 안동도호부 설치(668), 묘청의 서경천도운동(1135), 조위총의 반무신란(1174), 몽골제국의 동녕부 설치(1270), 임진전쟁 초기 4차례의 평양성전투(1592~93),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1925, 엘리자베스 키스), 근대 교육과 상공업의 도시, 일제강점기 기생권번의 도시, 서울과 함께 3·1만세운동을 벌인 도시…

그러나 1945년 이후 남녘에서는 평양에 대한 기억이 단절되거나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착되어왔다. 우리는 우리의 반쪽 북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있을까? 구미에 맞춰 걸러진 자극적 정보를 뚫고 온전히 평양을 바라볼 수 있을까?

모른다. 모르기에 북녘을 이해하는 창(窓) 평양을 탐구하고 알아보자는 거다. 남이든 북이든 필터링된 정치·경제 이슈에서 한발 물러나 서로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과 진심 어린 대화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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