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 B-99묘는 중앙대 동문 김태년-서현무 부부의 합장묘다.
신랑 김태년(22세)은 4·19혁명 당일 오전 11시에 학우들과 함께 세종로 치안국 무기고 근처에서 시위 상황을 녹음하다 오후 2시경 경찰의 소총 직격탄을 맞고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을 거뒀다.
신부 서현무(23세)는 을지로2가 내무부 앞에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다 중부서로 연행돼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혁명의 성공으로 풀려나긴 했으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7월2일, 혜화동의 수도의과대학 부속병원 공동실 58호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양가 부모는 두 청춘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같은해 11월11일 영혼결혼식을 올려주었다. 35년 후인 1995년 정부는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었음에도 그때까지 따로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묘(김태년 B-99, 서현무 B-44)를 김태년의 묘에 합장(11월19일)하고, 이름과 사진을 함께 넣은 비석도 새로 세웠다.
그런데, 답사를 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 신부 쪽이 한살 많은 연상연하 커플인데… 신부 서현무는 4·19혁명의 한 도화선이 됐던 3·15부정선거일과 같은 3월15일(1938)에 태어났다. 한 살 적은 신랑 김태년의 출생일은 또다른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 쓰러진 10월26일(1939)이다. 자유당정권과 유신체제를 사실상 끝장낸 날짜가 두 학생의 출생일이다. 참으로 오묘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두 학생의 모교 중앙대학교에서는 모두 여섯명의 의로운 4·19희생자가 나왔다. 영면하소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